04 이사야서 3:1-26, 4:1-6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영화로울 것이요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사 4:2-3).
본문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하고 의뢰하는 모든 것들을 제하여 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만한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고관들, 그리고 교만하고 음란하며 사치에 눈이 어두운 시온의 딸들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시온에 남은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는 영화롭고 아름답고 거룩하게 하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끝까지 남은 자가 되어 시온의 영광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1. 예루살렘과 유다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사 3:1-26, 4:1)
하나님은 본래 심판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Jehovoah)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 완전하신 분, 구속자로 전에도 계시고 현재도 계시고 영원히 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 구원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궁극적인 목적 또한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도록 함에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교만한 사람들을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첫째, 그들이 의지하는 것들을 제하십니다(사 3:1-15).
그들은 양식과 물을 의지했습니다(사 3:1).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의지하고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 모든 물을 제하십니다. 이는 기근과 가뭄으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참기 힘든 것은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요즘 한국이 청년 실업자 문제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청년들이 위축되어 있고, 장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까? 이는 생계문제, 즉 인간의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IS가 인간의 원초적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합니다. 거기다가 미인들을 인터넷에 등장시켜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까지 시켜준다니 현혹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5만원권의 현금과 달라와 귀금속, 그리고 채권을 사서 금고나 장롱 속에 숨겨 놓는다 할지라도 먹을 양식이 떨어지고 물이 떨어지면 이런 것들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귀금속을 먹을 수 있습니까? 달라와 현금을 먹을 수 있습니까? 먹을 쌀이 있고 마실 물이 있을 때 귀금속과 달라가 귀한 것이지 먹을 양식이 없고 마실 물이 없으면 이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금을 갖기를 소원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소원대로 만지는 모든 물건이 누런 황금으로 변하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볼펜을 만져도 금이 되고, 책을 만져도 금이 되는 등 만지는 것마다 금이 되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는 이제 배가 고파서 먹기 위해 빵을 만졌습니다. 만지는 순간 그 빵도 금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황금을 놓고 굶어 죽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되 먼저 식량 문제와 물로 심판하십니다.
북한이 식량 문제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군사력 증강과 핵개발에 열을 내고 있습니다. 강군양성이나 핵도 먹고 마실 물이 풍족할 때 위력이 있는 것이지 먹을 양식이 없는데 군사력과 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먹는 문제로 고생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평양은 제 2의 예루살렘이라 할 정도로 말씀을 사랑하고 성령의 역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믿음의 성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린 거룩한 성지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황해도 솔뫼 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생긴 교회입니다. 이런 땅에 공산주의가 들어서서 교회를 다 훼파시키고 성도들을 죽이고 주체사상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30대인 김정은이를 위대한 수령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여러 모양으로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완악하여 하나님을 슬프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집단을 그냥 내버려두시겠습니까? 그리했을 때 그들이 그토록 소원하던 기와집과 하얀 이밥, 그리고 고기국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수해나 가뭄으로 그 땅을 심판하심으로 기와집은 그만 두고 비새는 집, 하얀 이밥은 그만 두고 강냉이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한 때 믿을 것은 부동산, 특히 아파트 밖에 없다면 아파트에 목을 매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빚을 얻어 대형 아파트 구입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대형아파트에 당첨되는 순간 대박이 터졌다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형 아파트 구입은 대박이 아니라 쪽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대기업이 먹거리를 만들어 줄 것이라며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습니까? 영원할 것 같았던 삼성도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대기업이 휘청거리면 수많은 하청업체인 중소기업들이 문을 닫게 됩니다. 수만 개의 일자리, 일터가 없어집니다. 일터가 없어지면 수많은 사람들의 양식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회개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의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정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의지했습니다(사 3:2-4). 선지자가 복술자와 함께 나오는 것을 보면 거짓선지자를 말합니다. 그들은 거짓선지자들을 믿고 따랐습니다. 경도된 사상과 이념은 거짓선지가가 됩니다. 분배와 평등에 경도된 공산주의는 거짓선지자입니다. 성장과 소유에 경도된 자본주의 또한 거짓선지자입니다. 그들은 기술과 스팩과 각종 자격증을 의지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따기 위해 목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정교한 장인들도 아무 소용이 없었고, 자격증들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라를 혼란하게 하셨습니다(사 3:4). 그것은 소년들을 백성들의 고관으로 삼게 하신 것입니다. 어린 소년들이 다스리니 나라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이웃은 서로 돕는 관계요, 비천한 자와 존귀한 자와의 관계는 존경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어린 소년들이 다스리니 백성이 서로 학대하고,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를 잔해했습니다(사 3:5). 질서가 파괴되어 잔학한 현상들이 생기자 지혜로운 자들이 다 숨어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나라를 다스려 달라고 하면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국결 국가나 동동체는 세월초처럼 좌초위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건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처럼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은 언어로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음이라”(사 3:8).
‘영광의 눈’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에서 나오는 신령한 빛을 말합니다. 그들은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할 입을 가지고 우상을 찬양했습니다.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이웃을 괴롭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초리를 두려워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어디 있느냐?’ ‘나와 보라’며 오만방자했습니다. 사람은 말에 실수가 없어야 온전한 사람입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의 척도는 그 사람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로 하나님의 영광의 눈을 대적하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그들은 행위로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말에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가꾼 귀한 포도원을 빼앗고, 가난한 자의 물건을 탈취하고,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을 가지고 뭣을 하겠습니까? 사치와 낭비의 주범 노릇을 했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안색으로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사 3:9).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합니다(전 8:1). 그런데 그들의 ‘안색’(face), 얼굴에 죄가 서리어 있어 소돔처럼 영혼마저 마비되어 죄를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드러내놓고 짓고 죄를 즐기고 죄를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영혼에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에게는 복을 주십니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은 것임이니라”(사 3:10-11).
의인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습니다. 반면에 악인은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의를 심으면 의의 열매를, 악을 심으면 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의의 열매를 심은 것이 아니라 악의 열매를 심었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속일지 몰라도 그가 맺은 열매를 속일 수 없습니다(마 7:15-20). 의의 열매를 심고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의 원리입니다.
둘째, 시온의 딸들이 의지하는 것들을 제하십니다(사 3:16-26, 4:1).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작거려 걸으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사 3:16).
시온의 딸들의 죄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교만입니다. 둘째는 음란입니다. 셋째는 사치의 극치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사치했습니까? 21 가지의 장식품이 나옵니다.
그들은 장식한 발목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얼굴 거리개와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반지와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손거울(당시 거울은 청동으로 만들기 때문에 값이 비쌈)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로 장식했습니다(사 3:18-23).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제하셨습니까?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사 3:17).
물이 없어 머리를 감지 않으면 머리에 쇠똥이 생깁니다. 쇠똥이 생기면 딱지가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하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는 미니스커트를 입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헤어진 옷을 깁고, 또 깁고 해도 더 이상 기울 것이 없기 때문에 하체가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겉옷이 수십 벌 되던 여인들, 실크 옷만을 걸치고 다니던 그들이 이렇게 됩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그들의 모든 사치품을 제하셨습니다.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합니다. 노끈이 띠를 대신합니다. 숱한 머리털이 대머리가 됩니다. 여인의 머리털은 영광입니다. 그런데 하도 머리에 짐을 이고 다녀 대머리가 된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저주가 어디 있습니까? 굵은 베 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합니다. 수치스러운 흔적이 아름다움을 대신합니다.
그것으로 끝납니까? 남편들이 전쟁터에 나가 죽게 됩니다. 이로 인해 웃음꽃이 만발하던 성문은 곡소리로 요란하며 아름답던 시온은 황폐하게 됩니다(사 3:25-26).
더 비참한 것은 전쟁에서 남편들과 장정들이 다 죽었기 때문에 남편감들이 없어 일곱 여인이 한 남자를 붙들고 수치를 면하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됩니다(사 4:1). 당시 여인들이 남편이 없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여인들의 이런 모습은 장차 시온의 딸들이 강대국의 노예가 될 것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10년 후에 북이스라엘 여인들은 말씀대로 앗수르에 끌려가 그들의 노리갯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혈통이 끊겨 사마리아인이 되었고, 남유다의 시온의 딸들은 100여년 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해 그들의 노리갯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나라의 장래를 보려면 여인들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인들이 순결하고 정결하며 믿음의 여인들이 있을 때 그 나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형제들의 값싼 사랑이나 받으려고 꼬리나 치고, 방구석에 앉아서 T.V.나 보며 손톱을 다듬는 여인들이 있는 곳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내일의 젊은이들이 병들어 있을 때 무슨 민족의 희망이 있겠습니까?
여인들은 내일의 젊은이들을 키우는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여인들이 있는 나라와 민족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여인들이 있는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런 캠퍼스는 희망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위대한 형제들의 뒤에는 반드시 위대한 믿음의 여인, 기도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졸부의 뒤에는 반드시 졸녀가 있었습니다. 삼손의 뒤에는 데릴라가 있었고, 헤롯의 뒤에는 헤로디아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뒤에는 사라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뒤에는 한나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의 뒤에는 모니카가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뒤에는 캐자린이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리 뒤에는 수잔나가 있었습니다. 한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남편 뒤에는 믿음의 아내가 있습니다. 성장하는 교회 뒤에는 믿음의 여인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여인은 기도의 여인입니다. 우리 교회에 믿음의 어머니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2. 남은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사 4:2-6)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자를 축복하셨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사 4:2-3).
‘여호와의 싹’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싹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활력이 있습니다. 그 싹은 아름답고 영화롭습니다.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는 세상 여인들이 하는 것처럼 살지 않고 주님의 품에 안겨 사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세상에서 좋아하던 것들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좇았습니다.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거룩한 순례의 생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넓은 길을 떠나 좁은 길로 천성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시온에 남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시온에 남아 있다’는 것은 말씀을 붙들고 산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거짓 가치관과 구습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말씀은 그들의 거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교회를 지킨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끝까지 남아서 믿음의 순결로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며 전도로 교회를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끝까지 믿음을 지킨 남은 자들의 역사입니다. 이사야서의 핵심 중의 하나가 남은 자를 통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바울도 남은 자를 통한 역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롬 9:27-29, 11:5).
아담 이후 하나님의 역사는 남은 자를 통해 계승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 대신 셋을 통해 역사를 계승하셨습니다. 죄악이 가득한 노아 시대에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 노아를 통해 역사를 계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의 죄악이 가득하던 시대에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남은 자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남은 자를 통해 그 역사를 계승하셨습니다.
우리는 남은 자 하면 단순히 교회 안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은혜가 분명하고 날마다 구원 받은 은혜에 감격하는 삶이 남은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 받는 자가 남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여 남은 자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남은 자들이 누릴 복이 무엇입니까?
첫째, 영화롭고 아름다우며 거룩함의 칭함을 받게 됩니다.
‘거룩하다’는 죄와 분리하다는 뜻입니다. 조금이라도 흠결이이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금이나 은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거룩하게 된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했습니다(살전 4:3). 그리고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빌 2:12). 우리는 신분이 변했지만 세상에 있는 동안 항상 더러워질 수 있기 때문에 정결한 신부처럼 날마다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단장해야 합니다. 이를 성화라고 합니다.
한국 성도들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의 진리를 잘 압니다. 이것은 참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후의 삶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고 구원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은 후의 삶 또한 중요합니다. 한국에는 870만의 성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사회는 870만의 성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만일 870만의 성도가 있다면 지금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는 거룩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거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십니다. 또 초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됩니다(사 3:5-6). 이처럼 성도는 완벽한 보호를 받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을 보면 사데교회가 나옵니다. 사데교회는 돈이 많은 사데에 세워졌습니다. 돈이 많은 도시에 세워졌기 때문에 사데교회 또한 돈 많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쾌락을 즐기고, 봉사하는 것보다 향락을 즐겼습니다. 그런 중에도 몇 사람은 옷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속에 오염되지 않았고 향락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물질의 세력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는다’는 것은 이들을 기억하여 절대로 중간에 변질되거나 타락하지 않게 붙들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난 자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굳게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1-34).
성도는 장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세상을 즐길 때 성삼위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즐길 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며 인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현재 보이는 화려함에 미혹될 때 장래의 영광을 사모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남는 자가 되어 거룩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남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남은 자가 되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소산을 먹으며 보호를 받으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하는 것을 어떻게 하셨습니까(사 3:1-12)?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에게 각각 주시는 보응이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어떤 점을 보시고 심판하십니까(사 3:13-15)? 시온의 딸들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이들을 어떻게 심판하십니까(사 3:16-4:1)? 믿음의 여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3. 하나님께서 시온에 남아있는 자들의 축복이 각기 무엇입니까(사 4:2-6)? 여기에서 하나님의 역사방법에 대해 말해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