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7:1-25, 8:1-22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4).”
본문은 어려운 시대에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입니다. 그 시대는 국가적으로 가장 위기였습니다. 그들은 위기의 때 마땅히 삼가며 조용해야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징조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떨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마땅히 이들을 징계하셔야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임마누엘, 다시 말하여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핵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독교는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친히 찾아오시고, 찾아오셔서 함께 하시고,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을 봉함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지도자의 자세와 소망의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1.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사 7:1-9).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사 7:1). 아하스 왕은 유다의 12대 왕으로 20세에 왕위에 올라 20년간 유다를 통치했습니다(B.C. 735-715). 그는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고,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우상을 섬겼습니다(왕하 16:1-4). 당시 국제 정세는 앗수르가 북방에서 신흥제국을 건설하여 세계를 제패하고자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유다도 이에 가담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앗수르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앉혀 자기들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괴뢰정권을 세우고자 했습니다(사 7:6).
그러나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그들은 유다를 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하스 왕과 백성의 마음은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습니다(사 7:2). 숲은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면 연쇄적으로 소리를 내며 흔들립니다. 이처럼 왕이 전쟁의 공포에 불안하자 백성들이 불안에 떨었습니다. 이로 인해 돈이 있는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강재국인 앗수르와 애굽으로 이민을 가려고 가방을 챙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하스 왕이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왕은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태산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은 오히려 백성들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지도자가 백성들과 똑같이 절망할 때 절망하고, 불안할 때 불안하고, 힘들 때 함께 힘들어하면 이는 지도자라 할 수 없습니다. 지도자는 백성과는 뭔가 달라야 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야 하고, 생각이 달라야 하고, 생각하는 자세가 달라야 하고, 희망과 비전이 달라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세움 받았을 때 몹시 두려웠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한테도 대들고, 때로는 돌을 들고 쳐서 죽이려고 하던 백성들이 자기 말을 들을 것인가 심히 두려웠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수 1:6,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지도자는 어떤 환경과 역경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아들인 스알야숩을 데리고 아하스 왕을 만나라고 했습니다(사 7:3). 하나님께서 아들인 스알야숩을 데리고 아하스를 만나라고 하신 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 스알야숩은 감히 혼자 왕궁을 찾아가 아하스 왕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인 이사야와 함께 갈 때에는 조금도 두렵거나 위축되지 않고 만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위기의 때에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사냥개가 백두산 호랑이를 향해 돌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뒤에는 포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하스 왕이 불안한 것은 자기를 도와줄 구원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두려워서 앗수르와 동맹을 맺었지만 앗수르가 진정한 구원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자가 되어 주실 때,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동맹하여 쳐들어온다 할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위기는 기회가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포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사 7:4-5). 우리가 살다 보면 개인에게 어려운 문제가 생기고, 가정에 복잡한 문제가 생기고, 직장에 문제가 생기고, 교회에 어려움이 생기고, 국가에 재난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위기의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첫째, 삼가며 조용하라.
위기의 때에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호들갑을 떨고 함부로 입을 떠벌리며 동네방네 다니며 불평하며 떠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떠들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자가 아니라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요 불행과 멸망을 좇는 자입니다.
반면에 조용히 기도하는 자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혼인 잔치 집에 초대를 받아갔습니다. 그때 마침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혼인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아는 혼인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흉을 보고 떠들어대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조용히 예수님께 나아가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바로 여기에 마리아의 위대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기도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때에 물을 포도주로 만드셔서 혼인집에 기쁨을 샘솟게 했습니다.
둘째,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홍해를 앞에 두고 장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사실 홍해 앞에다 장막을 친다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작전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장막을 치도록 말씀했습니다. 이때 바로가 특수 병기 육백승과 애굽의 전 마병을 동원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해 왔습니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제 애굽 군대가 노도와 같이 추격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앞에는 노도와 같이 흐르는 시퍼런 홍해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도 갈 수 없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찌하여 애굽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이곳에서 죽게 하는가 애굽에는 공동묘지가 없어서 이리로 데리고 와서 죽이려 하느냐’며 모세를 원망하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떠했습니까? 모세는 위기의 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바라보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암반을 오를 때 위만 바라보고 올라가야 끝까지 오를 수 있지만 밑을 바라보는 즉시 두려워서 추락한다고 합니다. 모세도 추격하는 애굽 군대나 시퍼렇게 넘실대는 홍해를 바라보았다면 무리들과 같이 똑같이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오늘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실 구원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능력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실 구원의 손길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바로의 손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도와주시고 친히 해결하여 주실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모세는 두려움을 이기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도우셔서 홍해를 육지로 만들어 애굽 군대를 따돌리고 건너게 하셨습니다.
지금 한국은 2014도 경제성장률이 3.5%로 경기가 침체되고 체감경기도 말이 아닙니다. 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교육, 고용, 훈련 등을 모두 거부하는 무업자(無業者))족이 프리터족(free와 arbeiter)의 합성어로 본인에게 필요한 돈이 모일 때까지만 일을 하고, 지속적으로 일을 하지 않는 집단)보다 더 많습니다. 니트족이 2012년에 25.9%로 OECD 32개국 중 8위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10위인 그리스(23.6%)보다도 심각하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현실을 반영하는 신조어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인구론이 등장하는데 이 ‘인구론’이란 인문대 졸업생의 90%는 논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년실신이란 단어입니다. 청년실업자와 청년신용불량자의 글자를 딴 용어입니다. 10명 가운데 4명이 빚진 경험이 있고, 8명 중 한 명은 신용불량자로 추락한 경험이 있고, 20대 중에 빚에 허덕이다 개인파산을 신청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낙심이 되고 절망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다음 세대를 이어갈 우리 젊은 청년들이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이 시대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50년대 60년대는 지금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 선배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선배들은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통곡하며 민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 때 어려움을 뚫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곳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젊음과 살아갈 시간아 얼마나 큰 재산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희망을 갖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이사야서 7:7-9절을 보면 아람과 이스라엘의 도모가 이루지 못했습니다. 인류역사에서 각 나라의 흥망성쇠는 강대국이라고 흥하고 작은 나라라고 망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이 계획을 세울지라도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잠 16:9).
결국 아람은 B.C. 732년에 망하고 북이스라엘은 아람이 망한 10년 후 B.C. 722년에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사 7:9하). 하나님을 믿는 것이 굳게 서는 지름길입니다. 아멘.
2.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사 7:10-25).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사 7:10-11).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아하스 왕에게 징조(sign)를 구하라 했습니다. 기독교는 보고 믿는 신비주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믿고 보는 믿음의 종교입니다(막 16:17).
그런데 하나님은 징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믿음을 더 견고하게 하시고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가 예수님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확인을 하지 않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직접 확신을 시켜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요 20:29).
그러나 그는 징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사 7:12). 겉으로 보면 아주 겸손하고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더 의지했기 때문입니다(왕하 16:7). 그의 눈에는 하나님이 무력하게 보였으며 강대국 앗수르는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강대국을 더 의지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의지하는 것이 있으면 절대로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 능력을 의지하면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의지하면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물질을 의지하면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물질을 의지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 능력과 권세를 의지합니다. 자신의 미모를 의지하고, 자기 실력을 의지하며 삽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사 7:13). 하나님은 불신앙과 불순종을 가장 슬퍼하십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징조를 구하지 않는 교만한 그들을 외면하셔야 옳습니다. 우리가 말을 듣지 않는 양이 있을 때 외면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징조를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이 말씀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창세기 3:15절과 사무엘하 7:15절에서 메시아 탄생을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친히 이루셨습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성경 곳곳에 예수님의 별칭이 나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9장에서는 한 아기로, 11장에서는 한 싹으로, 53장에서는 고난의 종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왜 현 시점에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지금 아하스와 백성들은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가 옆에라도 있어 주면 큰 힘이 됩니다. 그런데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십니다.
어린아이는 혼자 있으면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부모와 함께 있으면 행복감을 느낍니다.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살다 보면 때로 외롭고 고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결코 고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호자가 되시고 울타리가 되시고 담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소망이십니다.
아하스 왕과 백성들은 교만하여 강대국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소망의 주가 되셨습니다. 소망 중에 그들을 돕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을 배반하고 슬프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도 배반하지 않으시고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우리 중에 불순종한다고 교만하다고 소망을 끊어 버리셨다면 여기에 한 사람도 남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는 소망의 주이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하다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죄악을 담당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소망의 주가 되신다면 여전히 연약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의 죄악과 연약함을 담당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육신의 몸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계시면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同苦同樂하면서 그들의 슬픔과 아픔과 질고를 다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의 병든 내면을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마태는 민족의 배반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그와 3년 반동안 함께 하심으로 이기적인 죄에서 구원 받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 은혜가 너무나 커서 성탄 첫 메시지로 ‘임마누엘’성육신하셔서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동행이란 단어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동행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동행하시기 위해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찬양합니다.
15-25절을 보면 장차 불순종한 유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나옵니다. 앗수르에 의해서 멸시를 당하고 황폐하여서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에서 나오는 젖을 통해서도 충분할 정도로 저주받은 땅이 됩니다. 포도나무 밭이 질려와 형극의 밭이 되고 그 질려와 형극 까닭에 두려워서 그 밭에 갈 수 없게 됩니다.
3.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사 8:1-22).
이사야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이름했습니다. 이는 노략이 신속하고 약탈이 급속하다란 뜻으로 앗수르의 침입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징조를 구하지 않았을 때 결국 패망하였습니다(사 8:1-15).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증거의 말씀이고 율법입니다(사 8:16). 그러기 위해 다가 올 시대의 환난과 고난의 때에 백성들이 그 말씀에서 위로를 받고 소망을 얻도록 말씀을 봉함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산 자들이 죽은 자에게 가서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사 8:19). 생명이 없는 신접한 자나 우상에게 도움을 청하고 위로와 소망을 기대하는 것은 가장 미련한 행위입니다. 우리가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르면 정녕 아침 빛과도 같은 신선하고도 밝고 아름다운 응답을 얻게 됩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우리가 위기의 때에 삼가며 조용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고 묻고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 때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찬란한 아침 빛과 같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