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부활절 메시지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제가 이번 고난 주간에 죽음에 관한 책을 두 권 읽었습니다. 하나는 케이건이 쓴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카타리나 라카나가 쓴 “죽음”이었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 죽음에 대한 명제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인류 역사 이래 죽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때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Mors certa, hora incetra(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우리가 죽는다. 그리고 불확실한 것은 죽음이 닥치는 시기이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초연한 사람 또한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죽음을 앞두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은 미지의 세계이고, 박탈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들을 갈라놓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갈라놓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남편과 아내, 자녀, 평생 모았던 자산, 명예와 명성, 그리고 아름다운 몸매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죽음 앞에는 용사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 시대에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성대한 개선행렬을 할 때에 바로 뒤에 노예 한 명을 세워놓고 따라가면서 계속 다음과 같이 외치도록 했습니다. “당신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도 한낱 인간임을 기억하라- Memento mori. Hominem teesse memento)”
미국의 3대 명사 중의 한 사람인 케이건 교수는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언젠가는 죽음에 직면해 있는 우리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신중해야 합니다. 목표를 세울 때도 신중해야 하고, 그 목표를 어떻게 이룰지를 선택할 때도 신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죽는다는 당위성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할 수 있습니까? 아마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는 죽으면 그만이라며 내일 죽은 터이니 먹고 마시며 즐기자는 쾌락과 육신을 좇아서 사는 부류일 것입니다.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
한국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니 젊어서 노세” 이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민요는 한국을 망국으로 몰아넣는 민요 중의 하나입니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여정 속에는 시기마다 채워야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을 채우지 않으면 늙어서 고생을 합니다. 신입생들은 거의가 입학을 하자마자 곧 먹고 마시고 취하여 거리를 휘젓고 다닙니다.
그러나 대학 때 공부할 양의 공간을 채우지 못하면 장래가 불확실합니다. 그리고 청년의 때에 졸업과 병역, 취업, 그리고 결혼입니다. 이 시기에 이런 공간을 채우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의 연구를 보면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사라질 나라가 한국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급속도의 출산감소와 고령사회로의 진입 때문입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것은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가정은 단순히 사적인 공간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모여 사회를 구성하고 민족을 구성하고 국가라는 틀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지금 청년들이 여러 원인으로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다고 하지만 이 모든 저변에는 인생을 편하게 살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보리 고개란 말을 들어보았습니까? 5,6월을 춘궁기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부모님들은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면서 모든 역경을 이기며 내가 현재 채워야 할 공간을 채웠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이만큼이나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으면 끝이라며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며 즐기자는 그들을 향해 준엄하게 경고했습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아”
다른 하나는 부활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삶의 시작이기 때문에 두렵거나 불안해하거나 육신의 쾌락을 좇아 살지 않습니다. 깨어서 의를 행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3-34).
그들은 영적 긴장을 풀지 않고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살 때 인생 전체가 후회함이 없는 삶이 됩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본 받지 않고 거룩하게 삽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
또 준비된 삶을 삽니다. 영어 속담에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Opportunity comes to those who are ready.)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기회가 와도 기회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준비된 분은 기회가 오면 즉시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좋은 열매를 맺어나갑니다.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게 됩니까?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몸매와 신분에 대해 불만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이런 모습으로 부활한다면 결코 부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윤회설이 등장한 것입니다. 윤회설은 율법을 행하여 구원을 얻고자 하는 한 형태입니다. 내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죽은 이후에 영겁의 시간이 지나면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나 돼지나 소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불자들이 열심히 백배 천배를 올리고 그 많은 시주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씨앗의 비유를 들어 부활의 이치를 설명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 15:36). 바울은 몸이 죽기 때문에 다시 살 수가 없다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씨앗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도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뿌리는 것은 장래 나타날 형체나 장성한 식물이 아니라 씨앗입니다. 분꽃씨를 보면 마치 콩을 간장에 졸인 것처럼 보잘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씨를 심으면 전혀 새로운 꽃으로 태어납니다. 채송화씨는 작아 땅에 떨어져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씨에서 나온 채송화는 한 여름에 그 어느 꽃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번 부활절을 맞아 교회에 많은 꽃들을 화분에 심었습니다. 이 꽃들의 씨는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작고 보잘 것 없는 씨앗들을 심지만 다른 아름다운 식물들로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몸도 현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부활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땅에서 알맞게 살도록 직립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짐승은 땅에서 적합하게 살 수 있도록 기고 달릴 수 있는 네 다리를 주셨습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 수 있도록 지느러미를 주셨습니다. 새는 공중에서 훨훨 살 수 있는 날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수 있도록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2-44). 우리는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고전 15:45-46).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아담은 생령의 존재가 되었습니다(창 2:7). 아담의 인류의 첫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둘째 아담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요 1:4).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요 11:25-26).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고전 15:20).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똑같이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활하여 거할 장소는 어떠합니까? 요즘 전세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서민들의 서러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가 부활하여 살 곳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집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하나님께서도 탄성하실 정도로 완벽하고 아름답고 조화 있게 창조되었습니다(창 1:31).
그런데 이곳은 마귀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첫째 사람 아담은 마귀의 미혹을 받아 타락하여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저주를 받자 땅도 함께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 저주받은 땅에서 종신토록 땀 흘리며 수고하여야 겨우 소산을 먹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창 3:17-19). 이런 저주받은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됩니다. 이것은 낡은 것을 수리하여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새 질서로의 창조입니다(벧후 3:13).
이사야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여기에서 ‘창조’란 히브리어로 ‘바라’인데 이는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와 같은 단어로, 무에서 유를 창조함을 뜻합니다. 이곳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보통 바다는 이별의 장소로 통칭됩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동역자들과 이별하고 밧모섬으로 귀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현재 그는 밧모섬에서 날마다 무서운 파도소리와 울부짖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동역자들과 친구들이 보고 싶지만 바다 때문에 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바다도 있지 않더라’는 말은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이별의 슬픔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는 구약 성경에서 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사 57:20). 요한 계시록에서는 사단과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을 뜻합니다(계 13:1, 20:13). 또한 바다는 세상을 뜻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강물들이 흘러 바다로 모이듯이, 사람들의 생각들이 모여 각종 사상과 이념들이 가치관들이 만들어집니다. 이처럼 바다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들이 모인 거대한 사회를 뜻합니다. 따라서 부패한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에서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만이 남게 됩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내려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예루살렘은 눈에 보이는 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상징합니다(계 21:9). 이 때 국가와 인간이 자랑하던 모든 조직과 제도들이 사라지고 교회만이 남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은 마치 혼인예식을 앞두고 신랑을 위해서 단장한 신부와 같이 아름다웠습니다. 신부의 단장은 외모가 아닌 속 사람의 아름다움입니다.
그곳은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더라”(계 21:4).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고통 때문에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마음의 아픔과 상처 때문에 남모르게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자기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사람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낮은 자존감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지난날의 회오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경쟁에서 낙오되어 눈물을 흘립니다. 이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 살다가 배신당함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저절로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한 마디로 눈물이 많은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여 거할 장소는 사망, 애통, 아픔, 눈물, 한숨,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귀한 보석과 같고 벽옥과 수정처럼 맑습니다(계 21:11).
그리고 달마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달마다 열두 가지 열매를 맺습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첫째,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견실하다’는 내적인 것이고, ‘흔들리지 말라’는 것은 외적인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믿음에서 떠나도록 여러 가지로 유혹합니다. 회의와 의심을 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신앙을 굳게 붙들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일’이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분명한 목적과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왜 살며, 무엇을 위하여 이 땅에 보냄을 받았는가?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대한 삶이란 내가 그것을 위해 살다가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 일에 일생을 걸고 생명을 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밤낮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만 걱정하며 사는 삶이 아닙니다. 한번 밖에 없는 삶을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일생은 거는 삶, 믿음에 목숨 거는 삶, 주님의 뜻이라면 죽을 수 있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축복의 주인공, 역사의 주인공, 세상에 끌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세상을 끌고 가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대학 교정에서 이런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우리는 예배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 순간에 사라질 것들에게 목숨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영원한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예배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아버지께서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내가 찾는 것이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위와 명예를 내놓으라고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빈손도 좋으니 있는 그대로 하나님을 끌어안고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시간관리 전문가 마이클 포티너가 미국 사람들이 평균 72세를 산다고 가정하고 일생 동안의 소모한 시간을 계산해보았습니다. 잠자는데 23년, 직장에서 일하는데 20년, 쉬면서 즐기는데 7년, 먹고 마시는데 6년, 줄서거나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5년, 약속한 사람을 기다리는데 3년, 물건을 찾는데 남자 말고 여자들이 핸드백 뒤지는데 3년, 가사 일에 4년,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시간이 1년이었습니다. 아마 요즈음 전화 거는 시간이 10년 이상 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시간은 일평생 다 합쳐서 1년 6개월이라고 했습니다. 여자들이 핸드백 뒤지는 시간보다 적습니다. 누구나 만남이 소원하고 대화가 뜸하게 되면 친밀감이 떨어집니다. 이게 사랑의 법칙입니다. 72년 생애에 1년 6개월 남짓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깊은 교제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지금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나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주님과 같이 부활합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으로 깨어 의를 행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넉넉히 감당할만한,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능력을 주십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 마음을 모아 예배드리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