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1:1-8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시니 기록하라 하시고”(계 21:5).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습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겪습니다. 사업 실패나 혹은 입시 실패로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믿지 않는 부모님과 친구들로부터 핍박을 통한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때로 남들이 가지는 것을 포기하고, 남들이 누리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남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하는 데서 오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끝나게 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됩니다. 그러나 최후에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최고의 기쁨과 최고의 존귀와 최고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영광은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여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하여 재림을 통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기를 기도합니다.
1.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계 21:1)
사람은 누구나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누구도 때 묻고 낡은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 옷을 사 입고, 삶을 바꾸어 보기도 합니다. 머리를 잘라보기도 하고, 파마를 해 보기도 하고, 물을 들여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순간적으로 기분을 새롭게 할 뿐 본질적으로 새롭게 해주지 못합니다. 또 이런 것들은 언젠가 낡아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1:1절을 보겠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졌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완벽하고 아름답고 조화롭게 창조하셨습니다(창 1:1-31).
그런데 이곳은 마귀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첫째 사람 아담은 사탄의 미혹을 받아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에덴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땅도 함께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였습니다(창 3:19). 인간은 이런 저주받은 땅에서 종신토록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겨우 소산을 먹고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창 3:17-18).
이런 저주받은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은 낡은 것을 수리하여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 질서로의 창조입니다(벧후 3:13). 이사야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이곳에는 바다가 없었습니다. 바다는 이별의 상징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이별의 슬픔이 없습니다. 이별이 없다는 것은 죽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 앞에서 슬퍼합니다. 세월호 유족들은 일 년이 지나가도 자녀를 잃은 슬픔을 멈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비극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임종예배를 드리며 슬퍼합니다. 이는 이제 불러도 대답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입관예배를 드리며 또 다시 슬퍼합니다. 이는 얼굴을 영원히 볼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슬픔입니다. 그리고 하관예배를 드리며 오열합니다. 이는 형체를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음에서 오는 슬픔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한 이별인 죽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다는 악과 연관되어 있고(사 57:20), 사탄과 죽은 자들이 있는 곳입니다(계 13:1, 20:13). 또한 바다는 세상을 뜻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강물이 흘러 바다로 모이듯이, 바다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들이 모인 집단을 뜻합니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부패한 세상의 모든 가치관과 세상에서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만이 남게 됩니다.
2.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계 21:2)
2절을 보겠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여기에서 새예루살렘은 눈에 보이는 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성은 교회를 뜻합니다(계 21:9). 이 때 국가와 인간이 자랑하던 모든 조직과 제도들이 사라지고 교회만 남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혼인예식을 앞두고 신랑을 위해 단장한 신부와 같이 아름다웠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세상에서의 고난과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조그만 죄를 내버려두지 않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혈기를 여러모로 훈련하여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탐욕스러움을 훈련하여 나눔의 기쁨을 갖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악한 행실을 연단하여 바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쾌락을 훈련하여 순결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여러모로 연단하여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백합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만드십니다. 신부의 생명은 거룩함과 순결입니다.
신부의 단장은 외모가 아니라 속사람의 아름다움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단장은 헬라어로 ‘κοσμοζ’로 질서 있는 우주를 뜻합니다. 여기에서 cosmetic이란 화장품의 단어가 나왔습니다. 자매들은 질서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야 합니다. 화장을 하더라도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무질서하게 그리고 붙이고 바르면 안 됩니다. 단장은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꾸밈입니다.
내적인 단장의 첫 번째는 인격의 온유입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이란 인격을 가리킵니다. ‘온유’란 야생마를 길들여 유용하게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본성대로, 성질대로, 자기 멋대로 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삶이 온유입니다. 남편이 성질낸다고 함께 성질내고, 이야기를 하면 되받아 치는 것은 온유한 삶이 아닙니다. 온유는 참고 섬기는 것입니다. 온유는 예수님의 성품 중의 하나입니다.
내적인 단장의 둘째는 안정한 심령입니다. ‘안정한 심령’이란 고요한 모습과 고요한 영성입니다. 고요한 영성은 고요하게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기도하는 여인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밀레의 만종을 보면 저녁노을에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들립니다. 이 종소리에 일손을 멈추고 부부가 머리 숙여 기도합니다. 이 기도하는 모습은 숭엄하고 경건함이 묻어 있습니다.
외모는 일시적으로 사람을 유혹시킬 수 있어도 사람을 감동시키고 매력을 주지는 못합니다. 사람을 감동시키고 매료시키는 것은 단아한 인격에 있습니다. 믿는 이들의 단아한 인격은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 매력을 줍니다. 믿는 이들의 내적인 단아한 모습은 저런 사람이 믿는 예수라면 나도 한 번 믿어보고 싶고, 저들이 다니는 교회에 가보고 싶도록 합니다. 매력과 단아함은 기도하는 모습 속에 있습니다.
3.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계시니(계 21:3-4)
요한 계시록 21: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수 없었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실존을 상실하고 방황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과 함께 거함으로 잃어버린 인간의 실존이 회복되어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 되셔서 그 백성들을 다스리십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이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21:4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고통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마음의 상처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내면의 아픔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낮은 자존감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지난날의 회오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경쟁에서 낙오되어 눈물을 흘립니다. 한 때는 경찰이 쏘아대는 최루탄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사망이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픔이 다시는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으면 고난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장차 받을 영광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고난 중에 낙심하지 않고 참으면 영광이 있다고 했습니다. 고난 후에 영광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을 받을 때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병상의 은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과 시련은 기도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눈물을 많이 흘릴수록 복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병에 모두 담으십니다. 그리고 친히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이 때 세상에서 흘렸던 눈물은 기쁨이 되고, 주와 복음을 위해 흘렸던 눈물은 환희가 됩니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를 기도합니다.
4.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6).
요한계시록 21:5절을 보겠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시니 기록하라 하시고” 성경은 첫 말씀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로 시작했습니다. 이제 인류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서 또 한 번 선언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I am making everything new).”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최상의 표현입니다. ‘새롭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이노스’(καινὀ)입니다. 시간이란 단어에 헬라어로 크로노스(χρὀνος)와 카이노스가 있는데, ‘크로노스’는 시간을 뜻하고 ‘카이노스’는 질적 변화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만드십니다. ‘새롭게 만드시는 것’은 주님의 최종 목표요 뜻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옛 언약은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입니다. 우리는 이 언약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내가 다 이루어 놓았다. 이제 너희가 믿으면 살리라”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롭게 됩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사람은 옛사람과 전혀 다릅니다. 옛사람의 본성은 보상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나 새사람은 새로운 원리, 사랑에 지배를 받습니다. 새로운 본성은 과거 그렇게 미워하던 사람이 지금은 사랑하게 됩니다. 전에는 쾌락을 즐겼지만 이제는 쾌락이 불나방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에는 힘들게 느꼈던 십자가가 이제는 천국의 희락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멀리 있었지만 이제는 그 소리를 기뻐하게 됩니다. 전에는 소원했던 하늘나라의 소망이 이제는 참된 소망으로 닦아오게 됩니다. 전에는 진노의 자녀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전에는 종이었지만 이제는 자유인입니다. 전에는 구름 아래서 놀았지만 이제는 저 높고 넓은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비전과 소명, 그리고 사명에 불타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하나님께서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부드러운 새 마음을 주십니다. 간은 아주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간이 굳어지는 간경화증에 걸리게 되는데, 간은 아파도 통증이 없습니다. 사람이 간에 이상이 있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늦었습니다. 그래서 병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간경화입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심경화증(心硬化症)입니다. 본래 마음도 간처럼 아주 부드럽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짓다보면 마음이 굳어져 딱딱하다 못해 완악해집니다. 마음이 완악해지면 회개하지 않습니다. 굳어져 배태적인 NIH증후군(not invented here syndrome)을 앓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최고로 여기고, 자기를 의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여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심연화하십니다. 교만한 마음을 제하시고 겸손한 마음을 주십니다. 복잡한 마음을 제하시고 단순한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의 병든 몸과 마음을 치료하시고 강건하게 하여 주십니다. 찐조기 같은 얼굴을 밝고 맑고 기쁨의 얼굴로 만들어주십니다. 심각한 얼굴을 미소로 만들어주십니다. 사랑과 평화, 그리고 온유, 소망으로 충만하게 만드십니다.
요한계시록 21:6절을 보겠습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의 첫 자요 마지막 철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시작이요, 모든 만물의 기원이고, 모든 것의 마침이 되십니다. 하나님 외에 누구도 역사를 열고 닫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미국이 세계 역사를 열고 닫는 것처럼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흥하면 언젠가는 망하는 것이 인류역사의 변하지 않는 이치입니다. 로마 제국이 그러했고 대영제국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인류 역사를 닫고 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생명수를 주십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합니다.
5. 이기는 자는 상속을 받으리라(계 21:7-9).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런 복을 누리게 됩니까?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 믿는 자가 아니고 이기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이란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이기는 자만이 복을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이단들과 세상의 재미있는 것들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혈과 육이 아니라 사탄이요, 악이요, 죄요, 내 안에 있는 탐욕입니다.
우리가 이것들과 싸워서 이길 때 우리가 이런 세력에 무릎을 꿇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싸워 이길 때 누구든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승자는 하나뿐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승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첫째,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
믿음이란 믿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 되게 믿는’ 것을 말합니다. 사냥개가 백두산 호랑이를 끝까지 추적하여 바위구멍까지 몰아 부칠 수 있습니다. 산야를 뒤흔드는 으르렁거리는 소리, 불타는 듯한 눈동자나, 그 거대한 송곳니, 무서운 앞발을 막 휘두르고 있지만 사냥개의 당돌함에는 호랑이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감히 개가 호랑이에게 대들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뒤에 어떤 맹수라도 제압할 수 있는 포수가 총을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데가 있기 때문에 사냥개가 호랑이에게 대드는 것입니다. 사실 일대 일로 붙으면 사냥개는 호랑이에게 적수가 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빠가 뒤에 있으면 큰 아이들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행동합니다. 왜냐하면 믿는 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뒤에는 누가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때 어떤 사탄의 미혹도 이길 수 있습니다. 힘이란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데에 있습니다. 상황이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에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면 진 것이고, 믿음을 지키면 이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용사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때 어떤 시련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사랑이 이길 수 있다.
사람이 사랑을 느낄 때와 공포를 느낄 때에 그 능력의 차이는 10배가 된다고 합니다. 사람이 보통 때에는 그 사람의 잠재력을 다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큰사랑을 느끼게 되면 놀라운 능력이 솟아올라 병마도 이기고, 지혜도 생기고, 능력도 생기게 됩니다. 큰사랑에 감격할 때 자기가 가진 잠재력의 모든 능력을 10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공포에 떨고 의심하게 되고, 낙심하게 되면 자기 힘이 다 소진되어 자기가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초라한 존재가 됩니다.
사랑이 이깁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이미 진 것이고 사랑하면 이긴 것입니다. 정죄하고 비방하면 진 것이고 사랑하면 이긴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생길 때 서로 사랑하기보다는 비방하고 정죄하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이것은 이미 사단에게 진 것입니다.
반면에 어려울 때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여 여행할 때 우리 삶이 새로워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4:9하).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살면서 사랑의 눈으로 보고, 사랑의 귀로 듣고, 사랑의 입으로 말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소망이 이길 수 있다.
일이 어려워지고, 힘들고 점점 어두워질 때 새벽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을 바라봄으로 이기게 됩니다.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 환란은 우리의 소망을 순수하게 하고, 하나님의 약속과 소망이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반면에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두려움과 보상의 원리에서 새로운 원리인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참된 소망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하나님의 유업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송 가운데 서신 주님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 하늘 아버지 우릴 새롭게 하사 열방 중에서 주를 섬기게 하소서 모든 나라 일어나 찬송 부르며 영광의 주님을 보게 하소서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복음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