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사야서 13:1-23:25
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사 13:11).
모든 국가나 사회는 발생성장절정쇠퇴를 겪습니다. 전도서 3장 2-8절을 보면 때가 28번 나옵니다. 14가지는 긍정적인 사건들이고, 14가지는 부정적인 사건들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들이 서로 상반되어서 나옵니다. 우리에게 춤추는 즐거움, 소유의 기쁨, 창조와 생산의 기쁨, 사랑의 추억과 평화의 즐거움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혼의 단 꿈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젊음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에는 생로병사와 상실과 이별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무슨 일이 잘 될 때에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부자 3대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재벌도 망할 수도 있습니다. 대마불사가 아니라 대마도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쇠퇴하지 않고 성장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본문을 통해 열강들의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앞에서 겸손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바벨론, 앗수르, 블레셋, 모압에 대한 경고(13:1-16:14)
이사야서 13-23장을 보면 ‘경고’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13:1, 14:28, 15:1,17:1, 21:1,11,13, 22:1, 23:1, 30:6). ‘경고’란 짐이란 뜻입니다. 이는 ‘없애다’, ‘옮기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를 볼 때 심판의 메시지는 굉장히 부담이 되는 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축복의 말씀을 좋아하지 심판의 말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심판의 메시지가 큰 부담이 되었지만 그대로 전했습니다.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되 벗은 발, 벗은 몸으로 온 마음을 다해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사 20:2). 구스와 애굽이 앗수르에 끌려가 젊은 자나 늙은 자나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날 애굽을 의지하는 유대를 바라볼 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의식을 깨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는 온몸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진정 자유인이었습니다. 자유는 사명을 따라 사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이사야서 13장 1-22절을 보면 먼저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나옵니다. 바벨론은 일찍부터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대적했습니다(창 11:1-9). 수세기 동안 여러 왕조가 그 도시를 지배했는데 그 때마다 이곳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바벨론을 음녀라 했습니다. 동방의 좋지 못한 풍습은 모두 바벨론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사야서 13장 2-5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런 바벨론을 심판하시기 위해 먼 나라에서, 하늘 끝에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의 병기로 바벨론을 멸하려 함이었습니다.
이사야서 13장 6-8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을 때 바벨론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제국을 건설하신 이유는 말씀을 불순종하는 유다를 징계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따라서 바벨론은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각 열방을 선하게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자기 위치를 벗어나서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죄를 범했습니다. 바벨론은 교만하고 거만했습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이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3-14). 그들은 스스로 하늘에 오를 수 있고, 뭇별 위에 자리를 만들고, 그들이 북극 집회의 산위에 앉고,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교만의 극치입니다. 다니엘서 4장에 보면 바벨론의 교만한 느부갓네살 왕이 나옵니다. 그는 왕궁 지붕에서 거닐면서 ‘이 큰 바벨론은 나의 능력과 권세로 건설한 것이라’고 자랑을 하다가 쫓겨나서 7년 동안 들짐승과 함께 살게 되었고, 그에게서 모든 영광이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제일 미워하십니다. 교만은 죄악의 뿌리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타락한 것도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잠 16:18). 하나님은 이런 교만한 바벨론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사 13:12). 오빌은 양질의 금을 생산하는 유명한 금산지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금은 귀한 것으로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교만한 바벨론을 심판하셔서 오빌의 금처럼 사람들이 희귀한 도시로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레온사인이 호화찬란하던 도시가 황폐하게 되어 으리으리한 궁에는 승량이가 부르짖고 아름답고 화려한 전에는 들개들이 울부짖게 됩니다(사 13:22).
바벨론은 B.C. 612년에 메대와 연합하여 앗수르를 쳐서 열강 중의 열강 super nation이 되었습니다. 이런 바벨론이 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B.C. 538년에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당시 연합군의 지휘관은 바사의 왕 고레스였습니다. 이처럼 초강국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본래의 그 목적과 위치를 벗어나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1980년의 구소련은 막강했습니다. 그리고 맑스 레닌주의는 강력한 불길로 타올라 세계를 지배할 것 같았습니다. 남미와 아프리카는 거의 맑스 레닌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80년대 한국 캠퍼스 또한 맑스 레닌주의가 불길처럼 번져 있었습니다. 그 거대한 힘을 가진 구소련이 붕괴되고 맑스 레닌주의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구소련이 산산이 조각났고 구소련을 뒷받침 했던 맑스 레닌주의 사상이 힘을 잃고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이론은 좋지만 현실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론 그 자체도 안 좋습니다. 그들의 이론 중에 ‘동지가 아니면 모두가 적이다’라는 혁명 이론이 있습니다. 어떻게 동지가 아니면 모두가 적이 될 수 있습니까? 사람은 각기 인격이 있고, 자란 환경과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이 다를 수 있고, 사상이 다를 수 있고, 삶의 방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 뜻에 맞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동지가 아니면 모두가 적이라고 단정합니다. 우리나라가 모든 것을 2분법으로 보는 사고 구조가 있습니다. 맑스 레린주의를 배격하면서도 자기 뜻과 맞지 않는다 싶으면 종북이니 좌빨이니 보수꼴통이라고 단죄합니다. 정치권과 찌라시같은 언론에서 그렇게 나누어 미움과 갈등, 분열을 조장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맑스 레닌사상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에 기초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 사상은 언젠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구소련이 사라지자 이제는 미국이 Super nation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미국의 위상을 보면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미국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본래의 목적대로 살지 않을 때 미국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국을 세우심은 세계에 대한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나라로 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언덕 위에 도시를 세워 만백성들에게 빛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함이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제일 먼저 언덕에 교회의 교육관과 교회를 세우고 그 다음에 각기 집을 마련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절대적인 삶의 우선순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대학을 세워 크리스천 리더들을 키웠습니다. 미국의 아이비리그는 모두가 크리스천들이 세운 대학들입니다. 그리고 각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기독교를 이용하여 제국주의를 건설하고자 선교사들을 파송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주의에 기초한 선교사들을 각국에 파송했습니다. 우리나라 선교사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 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승리하자 제국주의로 변모하여 가난한 나라들에게 고통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나라 무기를 팔아 주지 않으면 가차 없어 보복하였습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을 일으켜 얻은 것이 무엇이며,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얻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라크 침공은 오히려 과격한 IS가 출현하는 계기로 만들어 세계평화를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위배된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보다 온갖 죄악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융을 통해 돈 장사하고, 방산 업체를 통해 무기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샤드 배치 문제도 한반도를 보호하기 위한 것보다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미국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천년 로마제국이 무너질 줄을 누가 알았습니까? 그들은 고트족으로 인해 망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도 무너졌습니다. 지금 영국은 속빈강정이 되었습니다. 미국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실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이 세계에 대한 목자의 나라 제사장 나라, 복음을 수출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1997년에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칠 줄은 누구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1997년에 외환위기로 200만 명의 실업자가 생겼습니다. 그 가족까지 합하면 약 1,0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를 통해 뼈아픈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허영심과 허세였습니다. 88서울 올림픽을 통해 돈이 좀 모아지자 OECD에 가입을 하고 무엇이 있는 양 허세를 부렸습니다. 소위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습니다. 허세나 허영심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영심인 속빈강정과 교만을 철저히 심판하셨습니다.
이제 지금 좀 살만하자 또다시 허영심에 눈이 멀고 안일을 사랑하고 한방에 인생역전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단기간 경기부양책으로 싼 이자로 집을 사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가계부채 총규모가 1200조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예산이 380조라면 3.2배가 빚입니다. 금리가 오르면 지금 한국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될 것입니다. 우리는 허영심과 안일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절망을 넘어서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자기 자신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3포니 5포니 이런 단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인구론이란 단어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런 단어들은 젊은이들을 죽이는 용어들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꿈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Boys, be ambitious in Jesus Christ. 이 말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농과 대학장이던 윌리엄 클라크가 1876년 9월, 황무지 삿포로 농림학교의 초대 교장이 한 말입니다. 당시 삿포로 농림학생들은 꿈이 없어 밤새도록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클라크는 1877년, 1년의 기한이 끝나고, 학생들과 작별의 시간이 왔습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나누며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Boys, be ambitious in Jesus Christ.” 그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말을 가슴에 안고 산 젊은이들은 후에 일본 역사를 일으키는 인재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꿈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에게 꿈만 있으면 어떤 절망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꿈은 무엇입니까? 세계를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의 책임입니다. 은혜의 책임은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줍니다. 은혜의 책임은 사람에게 살아야 할 가치와 목적을 줍니다. 은혜의 책임은 삶의 추진력의 근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면 복음 전파의 은혜의 책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은혜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바벨탑을 쌓게 됩니다. 그래서 니체조차도 “사람이 사명을 잃는 순간 온갖 멍청한 일들에 몰두하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몽골반점이 있는 몽골계의 후예들입니다. 몽골계의 특징은 야성, 개방, 관용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푸른 초원과 황야를 달리는 기마민족으로서의 청년다운 기상으로 캠퍼스로 직장으로 세계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사야서 14장 24-32절을 보면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나옵니다. 앗수르는 이미 이사야서 10장 5-6절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본래 목적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변 국가들을 짓밟고 무너뜨리고 삼켰습니다.
이사야서 15장 1-16:14절을 보면 모압의 멸망에 대한 경고입니다. 모압이 멸망하게 된 것은 과장 때문이었습니다. 모압은 거품이 많았습니다. 거품은 허세와 과장에서 옵니다. 허세와 과장은 하나님의 심판의 단초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주신 은혜의 책무를 다 하기를 기도합니다.
2. 다메섹, 구스, 애굽, 애돔, 아라비아, 예루살렘, 두로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17:1-23:25).
17장은 다메섹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입니다. 일찍이 아람은 북이스라엘과 동맹하여 남유다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메섹은 앗수르에 의해서 망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북이스라엘의 장래가 어떠하게 됩니까?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사 17:4). 이는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할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불 시련 가운데서도 남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17:6). 감람나무에 많은 열매가 열렸을지라도 흔들면 병들고, 벌레 먹은 열매들은 다 떨어지지만 실한 열매들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감람나무를 흔들듯이 강대국의 침략을 통해 흔드셨습니다. 그런 중에도 하나님께 붙어있는 자,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는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언제나 어두운 중에 희망의 여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절망과 고통의 순간에도 희망의 여명이 있음을 믿고 끝까지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남은 자의 사상은 이사야서에 면면히 흐르는 사상입니다.
이사야서 18장은 구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스는 에디오피아로 당시 애굽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치고 남유다를 공격하자 두려움을 느낀 구스는 사자를 보내어 유다에게로 보냈습니다. 이 때 이사야는 앗수르가 장차 멸망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사야서 19장과 20장은 장차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이사야서 19장 1-4절을 보면 애굽은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들이 판을 쳤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나라를 잔인한 군주의 손인 앗수르에 맡기신다고 했습니다. 그때 어떻게 됩니까? 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에서는 악취가 나고, 고기나 곡식을 수확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후에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될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멸망의 성이라 칭하리라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사 19:18-19). 이 말씀대로 한 때 애굽은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되어 알렉산드리아는 히브리 성경을 헬라성경으로 변역(70인 성경)한 기독교 문화의 요람이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사야서 20장을 보면 블레셋 아스돗은 이웃 나라들과 연합하여 애굽과 에디오피아를 의지하여 앗수르에 대항했습니다. 결국 블레셋은 B.C. 711년에 앗수르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사야는 유다가 블레셋 아스돗의 유혹에 빠져 연맹하여 앗수르에 대항하지 말 것을 경고했습니다.
이사야서 21장은 에돔, 아랍에 대한 경고입니다. 에돔은 이스마엘의 후예인데 이스마엘은 이스라엘과 혈통적인 관계가 있는 나라인데도 멸망하자 그것을 방관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이사야서 22장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앗수르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사 22:13). 그들은 베옷을 입고 땅을 치며 통곡을 하며 회개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쾌락에 탐닉했습니다. 쾌락은 곧 허무주의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을 셉나 대신에 엘리야김에게 정권을 맡겼습니다. 후에 엘리야김은 족벌정치로 인해 영광에서 탈락되었습니다(사 22:15-24).
이사야서 23장은 두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두로는 항구도시요 상업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부유했습니다(사 23:8).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도시가 음란했습니다. 두로의 멸망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심각한 경종을 주고 있습니다. 현대는 돈이면 최고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세상을 향한 지나친 부와 관심은 시험과 올무가 됩니다. 지나친 탐욕과 물질에 대한 사랑은 경계해야 됩니다. 우리는 가난하지도, 부하지도 않을 만큼 적당한 물질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잠 30:8,9). 돈이 많으면 반드시 쾌락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두로가 돈이 많았을 때 어떻게 됐습니까? 매춘이 성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도시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이 세상은 열강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움직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하기도 하시고 심판도 하십니다. 열방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열방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만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시련과 연단의 때 하나님 안에 거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