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이사야서 32:1-35:10
대로를 내신 하나님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다니지 못할 것이며 ”(사 35:8).
우리가 살다 보면 여러 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두 길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 길은 좁은 길과 넓은 길, 의의 길과 불의의 길, 거룩한 길과 음란의 길입니다. 좁은 길은 생명의 길이요 넓은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거룩한 길은 하나님 나라의 길이요, 음란의 길은 심판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 생명의 길, 거룩한 대로를 내셨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구원의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의로 통치하시는 예수님(사 32:1-33:24).
이사야서 31장 4-9절을 보면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침공하였던 앗수르를 멸망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장차 이 도성에서 이루실 메시아의 ‘의’의 통치입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사 32:1).
이사야는 이 사실에 감격하여 ‘보라’고 외쳤습니다. ‘장차 한 왕’은 히스기야 왕을 말합니다. 히스기야는 종교개혁을 통해 우상을 타파하고 여호와 신앙을 새롭게 한 유다의 3대 성왕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형이었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는 어떻게 통치하십니까? 공의로 통치합니다.
동양의 최대 정치 덕목은 덕치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최고 정치 덕목은 공의입니다. 세상 나라는 불의로 다스리기 때문에 불공평합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공의로 다스리기 때문에 공평합니다.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요 메시아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의로 다스리기 때문에 원망이나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의로 통치하시는 메시아는 피난처가 되십니다.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사 32:2). 악한 자가 통치하는 곳은 광풍, 폭우, 마른 땅, 곤비한 땅과 같이 불의와 폭정과 삭막하고 과부의 열굴에 맷돌질합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통치하는 곳은 피하고, 가리고, 냇물과 큰 바위의 그늘과 같습니다. 중동의 내린 쬐는 태양 아래 피하고 가리고 냇물과 큰 바울의 그늘을 생각해보십시오. 폭염의 사막의 오아시스를 생각해보십시오.
메시아는 모든 환난과 고난과 역경에서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더 나아가 메시아가 통치하는 곳에는 내면에 변화의 역사가 있습니다(사 32:3-8).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않습니다(사 32:3). 과거 성경 말씀을 보기만 하면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 왔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최고의 수면제라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메시아가 통치할 때 성경을 보는 눈이 생겨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 메시지는 자장가로 들려 하품만 하고 잠을 보충하는 시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통치할 때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말씀을 경청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조급하고 초조하여 시간과 젊음을 헛된 것에 다 허비했습니다(사 32:4상). 삶은 찰라적이고 감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지배하게 되면 삶에 대해 진진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깊고 넓고 높은 세계에 대한 지식을 깨닫게 됩니다. 이 지식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하게 됩니다(사 32:4하). 과거 우리의 혀는 진리에 대해 어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경 진리가 분명하여 구원의 진리를 담대하게 전하게 됩니다. 분명하게 구원의 진리를 전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과거에는 어리석고 우둔하고 불의하고 패역한 말을 사람들이 판을 쳤습니다(사 32:5-7). 그러나 이제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는 존귀한 사람들이 인정을 받게 됩니다. 존귀한 자는 진실한 사람, 성경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주목하십니다.
이사야서 32장 9-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메시아의 ‘의’의 통치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여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사 32:9). 현재 예루살렘은 앗수르의 위협 앞에 있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이 앗수르에게 먹히느냐, 먹히지 않느냐의 순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은 안일에 빠져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전 내내 화장을 하고 오후에는 밖에 나가 계꾼들과 어울려 사우나니 고급 식당에 몰려다니는 유한마담들이 즐비했습니다. 그들은 염려가 없었습니다. 염려가 없다는 것은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시대에 대해, 민족의 장래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먹고 마시고 즐기고 인생을 즐길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에 있습니까? 제 어머니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제 어머니의 손은 너무 많은 일을 하셔서 지문이 달아 없어지고 손가락이 악마디가 지고, 손바닥은 바위처럼 두꺼웠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그 손을 볼 때마다 어머니를 존경하곤 했습니다. 그 손은 열심히 일한 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밀레의 만종의 그림을 좋아합니다. 부부가 들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노을이 지자 일손을 멈추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숭엄합니다. 여인들은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여인이란 꼭 여인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안일이 몸에 배었습니다. 이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요 또 인간 전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싫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십자가 지기를 싫어합니다. 한편 사람들은 빚을 얻어서라도 레저 활동을 즐깁니다. 10원 벌어 100원을 쓰고자 합니다. 그러니 앗수르의 침략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IMF의 금융위기보다 더 어렵다고 합니다. 2015년 5에 총 가계부채가 1천293조2천억 원으로 1,200조를 넘어섰습니다. 사회안전망은 제로에 가까워 메리스가 걷잡을 수없이 확산되고 있고 중국에까지 퍼뜨렸습니다. 이것은 미개국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경제 10위권의 나라라는 우라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가 안일함에서 기인됩니다. 안일은 반드시 쾌락으로 연결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술집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놀 때입니까? 이런 기사를 읽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20년 동안 행운이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중국이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난 20년 동안 일본이 잠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13억의 중국이 잠에서 깨어나 찬란한 중국 역사를 재현하겠다고 웅비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지금 무섭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미국을 따라잡을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깨어나자 스스로 잃어버린 20년이라고 자책하던 일본이 ‘아름다운 일본’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에서 벗어나 강한 일본이 되어 닛케이지수가 사상 최대가 되었고, 일본 대학생들의 취업률이 90%라고 합니다. 원하는 기업을 골라서 간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주위에 이렇게 무섭게 변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자나 깨나 술판입니다. 젊은이들은 여자와 남자와 거리에서 팔짱이나 끼고 대명천지에 같은 짓을 합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노숙하며 사회단체가 주는 밥이나 얻어먹으며 소일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창조경제나 외치고 있습니다. 정치꾼들은 나라는 곁전이요 오직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급급합니다. 이렇게 되다간 다시 중국과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그런 징후가 지금 발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할머니 세대들은 35년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위안부로 끌려갔고 할아버지들은 징용에 끌려가 죽도록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속국으로 있던 조선 시대에는 동지날에 50명이 사절달이 50일 걸려 중국에 50일 동안 머물었습니다. 그때 조공으로 바치는 물품을 보니 호피로 시작하여 좋은 것은 다 가지고 갔습니다. ㅇ
이제 우리는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며 즐기고자 하는 안일한 생각을 버리고 시대와 민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육신은 언젠가 반드시 쇠하고 없어집니다. 쇠하고 없어질 육신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아름답겠습니까? 죠지 휫트필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녹슬어 없어지는 것보다는 닳아 없어지는 것이 훨씬 낫다.” 우리는 안일을 깨고 열심히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기도하는 몇 분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을 볼 때마다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희망을 봅니다. 우리가 안일을 극복하고 기도의 십자가, 복음 전파의 십자가를 힘써서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안일을 깨고 기도합시다.
장차 의로운 왕이 오셔서 통치하실 때 하나님께서 영을 부어 주셔서 회복의 역사를 이루십니다(사 32:15-20).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사 32:15). 하나님의 영이 위로부터 임합니다. 하나님이 영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됩니다.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게 됩니다.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정입니다(사 32:16-20).
2. 기도하는 이사야(사 33:1-24, 34:1-17)
이사야서 33장 1-6절을 보면 앗수르의 침략 앞에서도 기도하고 여호와를 앙망하는 이사야의 모습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사 33:2). 이사야는 여호와를 앙망하였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환난의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그가 왜 하나님을 앙망했습니까?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사 33:6). 세상 사람들은 물질과 세상의 권력과 세상 명예를 큰 보배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이를 얻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합니다.
베드로는 세상 영광을 위해 피나는 투쟁을 했습니다. 그는 거꾸로 가더라도 세상 영광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말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진정한 보배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진정한 보배가 됩니까? 여호와를 경외할 때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셨습니다. 번제는 각을 떠서 불에 태워드리는 헌신의 제물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삭을 절대로 번제로 드릴 수 없다고 반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기 사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명예가 될 수 있고, 그것이 돈이 될 수 있고, 그것이 세상 권세가 될 수 있고, 그것이 자식이 될 수 있고, 그것이 자기 전공이 될 수 있고, 그것이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여기에서 이 사람들은 영어로 these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입니다.
유명한 스탠버그 심리학자는 사랑의 삼각원리를 얘기했습니다. 그것은 친밀함과 헌신과 열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친밀함과 열정과 헌신이 깊어져야 합니다. 주님께 더 기도하고 더 말씀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더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성경 말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말씀을 더 가까이 합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한 형제가 한 자매를 좋아했습니다. 그 자매는 순대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는 그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자매가 좋아하기 때문에 순대 먹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면 달라집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성경 말씀공부보다 티브이를 즐기고 게임을 즐기고 3류 영화와 드라마를 더 즐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보배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구원의 지식과 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34:1-17절은 만유의 심판과 에돔의 심판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방 세계까지 통치하시는 만유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사 34:8).
그 심판의 기준은 시온을 대적느냐, 사모하는가에 있습니다(사 34:8). 시온은 하나님의 집, 교회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는 자를 복주십니다. 반면에 교회를 대적하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대개 교회를 지을 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잘 되는 사람 못 봤습니다. 성경은 그 예로 에돔을 들고 있습니다. 에돔은 시온인 예루살렘과 적대 관계였습니다. 이 때 에돔은 철저하게 심판당했습니다.
3. 대로를 내신 하나님(사 35:1-10)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사 35:1-2).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합니다.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고,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게 됩니다. 레바논은 향기로운 백향목으로, 갈멜은 웅장한 상수리 나무로, 사론은 꽃들과 비옥한 목초지로 유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사 35:3-4). 그 때 백성들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6). 그들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에서 눈멀고, 귀먹고, 벙어리로 표현할 때에는 영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당시 영적인 상태는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부패했습니다.
이사야서 1장을 보면 온 머리가 병들었습니다. 머리가 병들었다는 것은 정신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성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미쳐 있었습니다. 모두 돈에 미쳤고, 정욕과 음란에 미쳤고, 탐욕에 미쳤고, 유행에 미쳤습니다. 전신이 성한 곳이 하나도 없어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모두 병들었습니다. 그것을 짜고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상처를 내버려두면 결국 부패하여 희망이 없게 됩니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길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방황하게 됩니다. 요한복은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이 왜 그토록 방황했고, 니고데모가 밤에 왜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까? 왜 제자들이 근심했습니까? 현대인들이 왜 그토록 우울증에 시달립니까? 2020년에는 심장병 환자보다 우울증 환자가 더 많아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까? 왜 여학생들이 술에 취한 채 업혀 다녀야 합니까? 왜 남학생들이 술에 찌들어 있는 것입니까? 열심히 공부해도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방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대로를 내셨습니다.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사 35:8). 하나님은 대로, 하이웨이를 내셨습니다. 독일의 아우토반을 가보면 속도가 무제한입니다. 옆에 달리는 자동차를 보면 비행기가 가는 것 같은 굉음을 내며 달립니다. 시원시원합니다. 여기에서 대로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면 누가 그 길을 갈 수 있습니까?
첫째, 거룩한 자만이 갈 수 있습니다.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사 사 35:8전). 이 길은 거룩한 길입니다. 거룩한 길이기 때문에 조금만 흠이 있어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입혀 주시는 거룩의 옷을 통해서만이 걸을 수 있습니다. 제 아무리 좋은 옷이라 해도 그 옷을 벗고 예수님께서 입혀주신 옷을 입어야 갈 수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2-14).
둘째, 우매한 자는 걸을 수 없습니다.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사 35:8후).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그 길은 정확하기 때문에 우매한 자도 실수 없이 갈 수 있다는 뜻이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진리를 고의로 거부하는 자는 결코 그 길을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우매한 사람은 세속적인 사람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은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무엇이 가치가 있고 소중한가를 모릅니다. 마치 돼지처럼 진주의 가치를 알지 못해 진주를 발로 밟고 구정물에 집어넣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만이 갈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옵니다.
셋째, 구속함을 얻은 자만이 걸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사 35:9).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를 사함 받은 사람만이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회개하여야 함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하나님은 대로를 내셨습니다. 이 대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대로가 되셔서 죄인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셨습니다. 대로는 보배를 피를 통해 정결함을 받은 자만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한 자만이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 중 하나도 거룩한 백성을 삼고자 함입니다(출 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