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40:1-31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이사야서 40-66장은 성경의 핵심인 하나님의 구속계획과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40-48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시는 전능하시고 유일한 주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49-57장은 메시야의 고난을 통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구원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58-66장은 여호와의 구원을 통해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사역을 여는 서론입니다. 하나님은 40장에서 참 위로는 죄로부터의 구원이요, 힘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데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참된 위로는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앙망하여 메리스와 가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를 기도합니다.
1.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2).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이 말씀은 유명한 헨델의 메시야의 서곡에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 말씀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에 대한 예고의 말씀입니다.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각종 우상을 숭배하다가 멸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은 반드시 어떤 형상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소유물이나 사람 등을 하나님보다 더 높게 취급할 때 바로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우상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보다 내 마음이 쏠려 있고 의지하는 것은 우상이다.” 그들은 각종 우상을 숭배함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70년간 바벨론에서 종살이 시키셨습니다. 말이 70년이지 70년간 바벨론에서 노예생활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은 35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했습니까? 우리의 선조들은 징병에 끌려가고 정신대에 끌려가 헤아릴 수 없는 고초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70년 동안 바벨론으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해야 했으니 그 고통과 그 서러움이 어떠했겠습니까? 시편 137편을 보면 바벨론 포로생활의 비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사 40:1-4). 이런 비극적인 삶의 원인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철저하게 심판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때가 이르자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에서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쓸모없는 그들을 버리지 않고 당신의 백성으로 영접하셨습니다. 가끔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쓸모없는 자라 할지라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배은망덕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셔서 위로하셨습니다.
인간은 위로를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갓난아기가 부모의 위로를 받아야 할 존재인 것처럼 우리가 험악한 세상에서 살다 보면 위로해 줄자를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자식이 커도 때로 부모의 위로를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피곤한 직장에서 돌아왔을 때 시원한 냉수라도 한 컵 따라주며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위로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퇴근하여 더운 날씨에 아기를 키우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느냐며 손을 잡아줄 때 큰 위로가 됩니다. 양들은 목자의 위로를 받고 싶습니다. 목자 또한 위로를 받고 싶습니다.
사람으로부터의 위로도 어느 정도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위로는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엉뚱한 데서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술에서 위로를 받고자 술을 마십니다.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정욕으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방에서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불신자들은 고목나무나 돼지 대가리에서 위로를 얻고자 열심히 그런 것에다가 절을 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조차 각종 우상에서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손 없는 날을 택하여 이사하고 택일을 잡아 결혼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위로해 주지는 못합니다. 설령 위로하여 준다 할지라도 그 위로는 일시적입니다. 이런 데서 위로를 구하는 자는 언젠가는 낙심하여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나무를 깎아 만든 우상에게 위로를 구하는 자는 자기도 모르게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세상의 쾌락과 정욕에서 위로를 얻고자 하는 자는 쾌락과 정욕으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아내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되자 자기도 아내를 따라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로하여 주실 분은 진정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하나님은 슬픔과 고통과 아픔이 있는 인생을 향해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찬송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이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 힘쓰고 애씀이 없을지라도 이 샘에 오면 다 마시겠네(찬526).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예루살렘 백성들의 마음에 닿도록 외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의 해방의 감격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죄악의 사함이 포로생활로부터의 해방보다 더욱 큰 위로임을 말씀했습니다. “그 죄악의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는 사람을 짓누릅니다. 죄는 사람의 뼈를 상하게 합니다. 죄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죄는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는다 할지라도 죄의 사슬에 매인 사람은 행복이 없습니다. 죄수가 좋은 환경에서 지낸다 할지라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위로는 죄 사함으로부터 옵니다. 그것도 아무 대가 없이 죄를 사함 받았을 때 그 감격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죄를 사함 받았을 때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1-5).
2후절을 보십시오.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죄로 인해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공로 없이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용서를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들의 포로생활이 죄 사함의 근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인류의 대속을 미리 예표로 제시한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시고 고난 받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에게 조건 없이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위로가 많다 할지라도 아무 공로 없이 죄를 사함 받은 이 위로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조건 없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2.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사 40:3-5).
3절을 보십시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로하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려면 여호와 하나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까?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해야 합니다.
광야와 사막의 공통점은 길이 없는 것입니다. 광야는 가시나무가 우거져 있습니다. 찔레와 가시덩굴이 얽혀 있습니다. 광야는 악한 짐승과 독사가 우글거립니다. 그래서 광야는 외롭고 무섭고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광야는 위험하여 안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사막은 황량합니다. 먼지만 날립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허허벌판입니다. 바로 바벨론에서의 생활이 광야와 같고 사막과 같았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무슨 자유와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이런 그들에게 무슨 위로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외치라 했습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사람들은 환경이 좋아야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뭄과 메리스의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수 없고, 형편이 좋아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고 대로를 평탄하게 해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수 있습니까? 4절을 보겠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하나님을 맞이하려면 골짜기를 돋우어야 합니다. 골짜기는 패인 곳입니다. 마음이 패인 사람은 돋우어야 합니다. 욕심에 패이고, 질투심으로 패이고, 쾌락과 허무와 원망에 패인 마음을 돋우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덕을 낮추어야 합니다. 교만의 언덕을 낮추어야 합니다. 거만의 언덕을 낮추어야 합니다. 오만의 언덕을 낮추어야 합니다. 교만은뽐내는 것을 말하고, 거만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자기를 뽐내는 것을 말하며, 오만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고르지 않은 곳을 평탄하게 해야 합니다. 고르지 않은 곳은 꼬불꼬불한 길을 말합니다. 사람이 뱀처럼 비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간사한 사람이요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중심이 없으니 꼬불꼬불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중심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험한 곳을 평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험한 곳은 노하기를 잘하고 신경질을 잘 부리고 혈기가 많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습니다(요 1:14,히 1:3). 이런 영광을 모든 사람이 보게 됩니다. 이는 여호와의 입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 40:6-8).
외치는 자가 전해야 할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사야서 40장 6-8절을 보십시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세상의 위로는 일시적입니다. 사람들은 인간들로부터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풀과 같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세와 부와 외모에서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언젠가 시들어 떨어져 사람들에게 밟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로야말로 진정한 위로가 됩니다. 외롭고 고통스럽고 슬플 때 하나님께 나와 위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하여 주실 것입니다.
4. 하나님을 보라(사 40:9-26).
그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해방 자체에 빠져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그들을 위로하여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은 강한 자로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하나님은 복음의 원수들을 멸절 시킬 수 있는 강한 분이십니다. 강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자는 안전합니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강한 자로 임하셔서 그 크신 능력으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 크신 팔로 바벨론의 사슬에서 풀어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목자 없는 양은 비에 젖고 길을 잃고 헤맵니다. 포로된 이스라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품에 안으시고 푸른 초장과 시원한 시냇가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12-26).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사 40:26). 하나님은 세상을 섭리하십니다(사 40:12). 하나님은 심판주이십니다(사 40:13-14). 전능하신 하나님은 다른 것들과 비교하루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사 40:25). 전능하신 하나님을 물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사 40:16).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상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사 40:19-20). 전능하신 하나님을 사람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사 40:15-24).
5.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라(사 40:27-31).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이방 땅으로 붙잡혀 가고, 그들의 손에 맞아 죽기도 하고, 굶고 헐벗고 조롱 받고 병들었는데도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우리의 사정을 몰라주시는가 원망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송사를 아신다면 길을 열어 주셔야 하는데 길을 열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신앙생활도 잘 하고, 십일조도 잘하고, 헌신과 봉사를 많이 하는데 왜 나에게 탁 트인 길을 열어주시지 않느냐고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왜 나의 송사를 외면하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그들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8절을 보십시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하나님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씀하셨는데도 원망하는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셧습니다. 너는 영의 눈이 없어 보지 못하고, 영의 귀가 없어 듣지 못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다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을 피곤하지 않고 곤비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명철이 한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피곤하고 무능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9절을 보십시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어떤 사람에게 이런 힘을 더하여 주십니까? 사람이 젊다고 피곤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집니다(사 40:30).
그러나 31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습니다. 앙망한다는 것은 우러러보며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hope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희망의 존재입니다. 요즘 대부분이 희망이 없는 살아갑니다. 희망이 없으니 방향이 있을 리 없습니다. 방향이 없으니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앙망합니까? 무엇을 희망합니까? 여호와를 앙망할 때 새 힘을 얻습니다. 새 힘은 깨끗한 힘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새 힘이 없습니다.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죄로 오염된 힘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도전할 수 없습니다. 앞을 향하여 달려갈 수 없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여 새 힘을 덧입을 때 위기를 극복하고, 도전하고,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은 미국을 처다 봅니다. 그러나 미국을 앙망할 때 미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앙망합니다. 그러나 돈을 앙망할 때 돌게 됩니다. 사람을 앙망하면 반드시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독일은 불란서의 침략을 받아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때 피이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서 “물리적 힘으로 패한 국가를 정신적인 힘으로 재건하자”고 역설하며 대학을 세우고 인재를 키웠습니다. 그 때 독일은 일어섰습니다. 어떻게 한국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를 앙망하여 신앙적인 힘을 덧입을 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여 새 힘을 덧입을 때 독수리가 날개 치며 창공을 힘차게 오르듯 힘찬 삶을 살게 됩니다. 달음질해도 곤비하지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도 요동하지 않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도 절망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앙망하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할 때 새 힘을 얻어 슬픔을 이기고,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할 때 하나님의 위로를 얻게 됩니다. 이 때 벅찬 감격으로 하루하루를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여 새 힘을 덧입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