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6편 1-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부터 395년 전,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은 오직 하나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신대륙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당시 바다 위를 항해하는 기술은 매우 취약했습니다. 준비된 메이플라워호는 146명의 가족을 태우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파도의 위험, 추위와 기아, 질병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렵게 신대륙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착한 계절이 겨울이었습니다. 그 해 겨울 추위와 식량부족으로 인하여 영양실조, 그리고 풍토병으로 무려 44명이 죽었고, 그나마 다음해 농사를 지었는데 흉작이었습니다. 영국에서 가져온 씨앗도 농사기술도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마음착한 인디언 원주민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농사기술을 배웠고, 인디언 원주민들이 씨앗을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지어 그 해 가을에 얼마의 옥수수와 감자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자기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준 인디언 원주민들을 초대해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 최대명절인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감사절에 드렸던 감사 제목은 일곱 가지였습니다.
첫째, 비록 작지만 배를 주셔서 항해를 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둘째, 한없이 느리지만 끝까지 항해를 할 수 있었으니 감사합니다. 셋째, 항해 중에 두 사람이 죽었지만 한 아기가 태어났으니 감사합니다. 넷째, 항해 중에 큰 돛이 부러졌지만 파선하지 않았으니 감사합니다. 다섯째, 여인들이 파도에 휩쓸렸지만 한 사람도 떠내려가지 않았으니 감사합니다. 여섯째, 원주민들의 호의가 감사합니다. 일곱째, 그 어려운 항해 여정 속에서도 돌아가자고 하는 가족이 한명도 없었으니 감사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 나타난 초막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막절(수장절, 장막절)은 히브리인들이 출애굽해서 시내광야 생활을 할 때 생긴 큰 날입니다. 초막절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더 이상 광야에서 방황하지 않게 하였음을 감사드리며, 거두어들인 수확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추수감사절이 지켜지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11년 전, 1904년부터 지켜졌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추석이란 명절이 있지만 추석 때는 농작물을 수확하기에는 시기적으로 이르므로 11월 셋째 주에 추수감사절을 지킨 것입니다.
본문은 히브리인들이 바벨론포로에서 해방된 기쁨을 노래하는 시였습니다. 이 시에는 히브리인들의 기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누가 정말 기뻐할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기쁘도다(시 126:1-3)
히브리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시온으로 돌아올 때의 기쁨이 어떠했습니까?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도다 하였도다.”(시 126:1-2) 히브리인들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너무 기쁘면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하며 자기 몸을 꼬집어봅니다. 그들도 자기들의 볼을 꼬집어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B.C. 568년에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금과 모든 그릇들은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당시 왕인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백성의 고관들과 귀족들, 그리고 쓸 만한 사람들은 모두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은 쓸모가 없는 비루들뿐이었습니다.
그들은 70년간 나라를 잃고 바벨론에 끌려가 노예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때의 슬픔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입니다. 그들은 시온을 기억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쁘게 해드려야 할 노래가 이방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불리는 것을 한탄하며 서러움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제국을 일으키셔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고레스 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이때 기쁨은 마치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해방될 때의 기쁨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고난과 슬픔이 컸던 만큼 기쁨도 컸습니다. 그들이 해방되어 고국을 향해 돌아올 때에 입에서는 웃음이 가득하고, 혀에는 찬양이 가득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Songs of Joy’, ‘기쁨의 노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얼굴 근육이 약 80개입니다. 사람이 웃으면 50개가 움직이기 때문에 주름살이 안 생기고, 사람이 웃을 때 엔도르핀과 면역성이 증가하여 에어로빅 5분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웃음은 만병을 치료하는 능력이요, 모든 문제 해결의 키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웃으면 혈액순환과 신진대사가 활발하여 노화가 방지됩니다. 그래서 一怒一老, 一笑一少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 윌리엄 프라이교수는 “약으로서의 웃음”이란 책을 썼는데, 웃음이 건강에 유익한 점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어린아이는 하루에 400번씩 웃는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자면서도 웃는데 우리는 이것을 배내 짓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이들이 많이 웃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은 하루에 10번밖에 웃지 않으며, 그나마 잘 웃지 않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번밖에 웃지 않아 어린아이들보다 병이 많다고 했습니다. 웃음은 실패자에게는 없습니다. 웃음은 오직 승리한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행복에는 3S가 있습니다. “항상 웃어라(Smile always). 언제나 긍정적으로 대답하라(Say yes).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아라(Serve another).” 행복의 비결중 하나가 언제나 웃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웃을 수 있는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웃음은 하나님이 사람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입니다. 동물에게는 웃음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개가 웃는 것을 보셨습니까? 돼지가 웃는 것을 보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제사상에 올린 돼지의 모습이 웃은 모습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웃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만이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인들의 기쁨의 원천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 126:3) 큰 일은 죄에 대한 속량함입니다. 기쁨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속량함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도다.”(사 35:10) 하나님께서 죄를 속량하시니 기쁨과 희락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 라고 했습니다. 또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만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했어도 구원의 기쁨이 없으면 그것은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어도 구원의 기쁨이 없으면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구원의 기쁨만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 받은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첫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둘째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참된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기쁨은 얼굴에 웃음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거울로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인상파입니까? 아니면 조이파입니까? 우거지상입니까? 아니면 해피상입니까?
아브라함 링컨은 40대 이전은 주어진 미인이고 40대 이후는 만들어지는 미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형수술을 한다고 미인이 아닙니다. 진정한 미인은 이목구비에 있지 않고 기쁨이 가득하여 항상 웃는 스마일파입니다. 우리가 매일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인상파가 아니라 해피파, 우거지상이 아니라 기쁨의 상으로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2.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시 126:4)
이스라엘이 귀환할 때 히브리인 모두가 귀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이유로 인해 많은 동족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시 126:4) 남방은 메마르고 황폐한 지역으로, 평상시에는 전혀 물이 흐르지 않는 건조한 지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땅도 가을이 되면 많은 비가 내려 말랐던 시내가 불어나 생명의 땅으로 변하였습니다. 시인은 마치 남방의 시내처럼 메마르고 황폐해버린 히브리인들에게 은혜의 단비를 내리어 남은 백성들도 함께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만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 받고 슬퍼하는 이웃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남한은 너무 먹어서 문제입니다. 너무 많이 먹어 비만증으로 인해 살을 빼다가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지금 먹지 못해 영양 결핍증에 걸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혹자는 북한이 지도자를 잘 만나지 못해 그렇다며 외면합니다. 그리고 북한을 도와주어봐야 김정은과 군부가 다 먹는다며 한사코 북한을 돕는 것을 반대합니다.
굶어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 동포를 돕는 것은 이데올로기나 좌와 우의 진영 논리를 넘어선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아프리카를 도우면서도 단지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고 굶어가는 동족을 외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한 달에 천불을 후원하면 북한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피폐된 북한을 위해 기도합시다.
3.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 126:5-6)
히브리인들이 해방이 되어 기쁨으로 고국에 돌아왔지만 고국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그들은 큰 희망과 비전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엄연한 현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성은 파괴되었고 농토는 황폐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짓고 먹고살기 위해 황무지가 되어버린 땅을 일구고 씨를 뿌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은 돌이 많고 척박한 땅입니다. 이런 황무지에서 가을에 수확하기 위해서는 땅을 파서 일구고 씨를 뿌리고 곡식이 자라도록 피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이러기 위해 그들의 각오가 어떠해야 했습니까?
첫째, 수고해야 합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땅은 정직하다는 말입니다. 땅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땅은 대가를 지불한 만큼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농부들은 이런 확신과 소망이 있기 때문에 힘들지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땀 흘려 농사를 짓습니다.
게으른 농부의 논에는 수확량이 적고, 부지런한 농부의 논에는 많은 씨를 뿌렸기 때문에 가을에 아름다운 황금물결을 이룹니다. 이때 농부는 지난날의 땀 흘려 고생하고 수고한 시름이 말끔히 씻겨 지고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게 됩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든지 요행은 금물입니다. 쉽게 얻으려는 easy going 또한 금물입니다. 행운과 행복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행운은 수고 없이 우연히 거저 얻어지는 것이고, 행복은 애쓰고 수고하고 눈물을 흘리는 데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한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약 4:9).
이것은 매사가 다 그러합니다. 2주일 후면 고3학생들이 수능을 봅니다. 그간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은 수능 성적이 좋을 것이고, 열심히 하지 않은 학생들은 수능 성적이 별로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에 은혜에 감동하여 열심히 전도하고 또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한 사람들에게는 많은 영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딤후 2:6)고 하였습니다.
“No cross, no crown, No pain, No Gain”이란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와 고통이 없이는 영광과 얻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갈 6:7). 우리 속담에 콩 심은 곳에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고 했습니다.
열매는 그 씨를 심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불행의 씨를 심어 불행을 거두고, 행복의 씨를 심어 행복의 결실을 거둡니다. 과거의 모든 행동이 지금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으리라.”(갈 6:8)고 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심는 자는 정욕의 열매를 맺습니다. 원망과 미움, 불평 등을 품으면 그런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위엣 것을 사모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에 심은 것은 오늘 거두게 되고, 오늘 심는 것은 내일 거두게 되고, 이생에 심는 것은 내세에서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종자를 잘 심어야 합니다. 종자가 나쁘면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영국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생각을 심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어 성결을 거두고, 성결을 심어 운명을 거둔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전-6).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일의 총량이 있습니다. 일의 총량을 하지 않으면 늙어서 개고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노년에 행복한 삶을 살려면 젊었을 때 피땀 흘려야 합니다. 남들이 놀고 잘 때에 함께 놀고 자면 노년에 고생합니다. 우리가 소망과 비전은 크게 갖되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No cross, no crown, No pain, No Gain”
둘째,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이 울며 씨를 뿌릴 때 얼마나 낙심이 많았겠습니까? 씨를 열심히 뿌리지만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에 해도 안 된다는 불신에 사로잡혀 포기하기 쉬웠습니다. 그들은 절망하기 쉬웠습니다. 그들은 낙심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금은 싹이 나지 않아 열매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늘 긍정적이었고 희망적이었습니다.
성경은 낙심치 않고 선을 행할 때 언젠가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했습니다(갈 6:9-10). 그리고 고어에 “德不孤 必有隣-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고 했습니다.
요즘 헬 조선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는 지옥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됩니다. 언어는 그 당시의 사회상을 나타나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한국의 현재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일 것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는 청년실업, 고령화, 성장 동력을 잃은 경제, 국사 국정화 논란으로 방향을 못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일수록 낙심은 금물입니다. 절망은 금물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희망의 단어를 써야 합니다. 긍정의 단어를 써야 합니다. 부정으로 부정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부정은 긍정으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절망은 희망으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지옥은 지옥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지옥은 천국으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핼 조선은 천국조선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헬 조선이라는 단어는 지상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천국 조선은 천상의 언어입니다. 지상의 언어로 지상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천국 언어를 통해서만이 지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비관, 절망, 자학, 자조석인 말, 패배, 원망, 불평은 지상의 언어입니다. 지상의 언어는 전염병과 같아서 순식간에 공동체를 전염시킵니다. 그래서 지상의 언어는 나도 죽고 너도 죽고 우리 모두가 죽고 공동체가 파멸합니다. 그러나 희망, 감사, 칭찬, 소망, 위로, 격려, 믿음, 기쁨, 기도, 사랑은 천상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언어로 지상의 언어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들수록 서로 위로하고 소망과 사랑과 믿음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헬 조선이라는 조소적이고 절망적인 지상의 언어를 버리고 희망이 넘치고 밝고 맑은 천국 조선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우리 모두가 낙심하지 말고 눈물로 씨를 뿌리면 반드시 때가 되면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는 비밀을 깊이 받아들이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캠퍼스는 영적으로 황무합니다. 가정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직장 또한 황무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또한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황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눈물로 씨를 뿌리면 됩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 대한 기도의 눈물, 전도의 눈물, 성경 묵상의 눈물, 그리고 사랑의 눈물을 흘릴 때 반드시 희망으로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 당장 무엇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끝까지 참고 내일을 위해 복음의 씨, 전도의 씨를 뿌리어 기쁨으로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