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1-25
누가 복을 받는가?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3-4)
이삭은 3대 조상 중 가장 평화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처럼 동서를 가로지르는 여정을 밟지도 않았고, 야곱처럼 분투적인 삶을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브엘세바를 중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사색하며, 맛있는 고기를 먹으며, 아내를 사랑하며 여생을 마쳤습니다. 그는 겉으로 볼 때에 그다지 위대한 일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며 이를 야곱에게 잘 계승했습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누가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끝까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창 25:1-26)
아브라함은 175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죽자 이삭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삭은 리브가와 40세에 결혼하여 브엘라해로이 근처에서 살았습니다(창 25:20).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복형인 이스마엘은 열두 명이나 낳았는데 이삭은 결혼한 지 20년이 지나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당시 자녀, 특히 아들이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때 이삭은 당시 풍습대로 첩을 얻어 소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내 리브가와 함께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창 25:21상). 아브라함은 10년을 참지 못하고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20년간 그는 기도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20년 동안 기도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불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하나님 믿는다고 유난스럽게 결혼하더니 그렇게 되었군. 믿어도 별수 없어!”하는 조소와 조롱을 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때가 되면 반드시 자식을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감사함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시되 한 번에 쌍둥이를 주셨습니다(창 25:21하).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200% 축복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태중 요절까지 주셨습니다(창 25:23).
예수님은 친구의 간청을 비유로 끝까지 간청할 때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1:5-8). 한 친구가 여행 중에 먹을 것이 떨어져 한 밤 중에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먹을 떡이 없었습니다. 그는 친구를 돕고자 한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벨을 눌렀습니다. 그는 친한 친구가 여행 중에 찾아 왔는데 내가 먹일 것이 없다며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찾아간 친구는 문을 닫고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줄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계속 인터폰을 눌렀습니다. 그는 도저히 벨소리로 잠을 잘 수 없어 문을 열고 빵을 주었습니다. 그는 떡을 주면서 친구에게 ‘내가 친구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줄 수 없지만 그 간청 때문에 일어나 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에 기도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낙망치 아니하는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눅 18:1-8). 한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과부가 그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과부는 자신의 원통함을 재판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포학한 재판관은 과부의 한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과부는 낙망치 않고 계속 한을 풀어달라고 외쳤습니다. 포학한 재판관은 그녀의 성화에 결국 간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조지 뮬러는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뮬러는 1805년 9월 27일 프러시아(현 독일) 출생으로 1835년 할레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의 선교사로 건너가 브리스톨 애슐리 다운에 고아원을 세워 2,000명이 넘는 고아들을 기도로 돌보았습니다. 그는 15만 명의 고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까지 ‘고아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는 특별한 기도의 응답을 5만 번 이상이나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하지 않는 것은 곧 생명줄을 놓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까지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복을 받을 때까지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고 복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기도를 쉬는 것을 멈추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은 기도를 쉬는 것을 죄라고 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창 26:1-15).
아브라함은 흉년이 들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갔습니다. 이삭 때에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창 26:1). 기근은 이삭에게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자 그랄로 갔다가 일자리가 많은 애굽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이삭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창 26:2)
흉년이 들어 처자식이 굶고 있는데 양식이 풍부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이 먹이를 찾아다니는 철새와 같은 신앙생활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철새는 번식지와 월동지의 사이를 해마다 왕래하면서 더우면 찾고 추우면 떠나 버립니다. 철새는 한 곳에 애착을 두지 않습니다. 철새는 장기간 사랑을 주고받지 않습니다. 철새는 태양 빛의 온기에 따라 살기 때문에 대지의 온갖 아름다움을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철새의 삶의 모습이 교회에도 있습니다. 이를 철새 교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철새 교인이 되는 원인 중의 첫째는 성경 진리의 무지에서 옵니다. 성경은 바른 창조관과 구원관, 교회관을 말씀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엡 1:22-23). 그리고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의 가지라고 하셨습니다(요 15:1-4). 지체는 몸에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종말관을 말씀하였습니다. 주님의 택함을 받은 자는 교회를 통하여 양육 받고 성장하다가 주님께로 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성경의 기본 원리를 정립하지 못하게 되면 철새처럼 유익을 따라 날아다니는 철새 교인이 됩니다.
둘째는 부담 없이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철새 교인이 됩니다. 현대 사회는 복잡하고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시달림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이로 인해 교회를 삶의 피곤과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 문화공관, 교육기관, 휴식장소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강단에서 죄를 말하고, 죄를 지적하고, 죄를 회개하라고 하면 부담스러워합니다. 그저 사람들은 좋은 자기개발서 이야기와 부담이 없는 복 받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교회는 상담치유 센터가 아니라 개인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영혼구원의 기관입니다.
셋째는 교회에서의 헌신이 부담이 되어 철새교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 주일 성수, 교회의 여러 기관에서의 섬김과 봉사, 그리고 연보, 헌금에 부담이 되어 희생과 섬김이 없는 교회, 연보에 부담 없는 교회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 시간과 물질과 삶을 어디에다 썼습니까? 허랑 방탕으로 허비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의 열매가 무엇이었습니까? 또한 연보는 구원 받은 자에게 주시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성경에 보면 철새 교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떡을 주실 때에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요 6: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7)고 하시자 모두 떠나고 오직 12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12명 중에도 가룟 유다가 떠나 11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적과 세상의 부귀와 권력 앞에서는 흥분했습니다((요 6:2,5. 마 21:1-17).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가 철새 신자, 가나안 신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우면 오고, 추우면 떠나는 철새 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순종하고 뿌리를 내려 주의 일을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아 영원한 기업을 얻게 됩니다(행 20:32, 고전 15:58).
하나님은 이삭에게 순종만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순종 뒤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3-4)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삭에게도 동일하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모두 지키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삭을 축복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창 26:5).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살면 당대는 물론 후손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삭이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에 거주했을 때 흉년 중에도 백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창 26:12). 그는 마침내 창성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흉년 중에도 풍년을 이루게 하시고, 불황 중에도 호황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의 이성과 생각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여 축복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온유한 사람입니다(창 26:16-36).
이삭이 거부가 되자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이삭의 우물을 흙으로 메웠습니다. 아비멜렉은 공개적으로 이삭에게 이곳을 떠날 것을 요구했습니다(창 26:16하). 그러자 이삭은 그들과 싸우지 않고 떠나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습니다. 그는 그들과 싸우지 않고 양보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자기 우물이라고 생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곳 이름을 ‘에섹’, 즉 다툼이라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이삭은 또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그들이 자기 것이라고 하여 다시 옮겼습니다. 그곳의 이름은 ‘싯나’, 즉 대적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다시 옮겨 우물을 팠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더 이상 생트집을 잡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그 이름을 ‘르호봇’, 즉 넓은 우물이라고 했습니다.
물은 언제나 생존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한 번도 싸워보지 않고 양보만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이삭을 보면 좀 남자다운 기백과 용사다운 모습도 없어 보입니다. 이삭은 치열한 생존경쟁 사회에서는 살아남기 힘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이삭이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이삭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축복해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창 26:22하) 이삭은 흉년과 불황 중에도 풍년과 호황을 누리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삭은 복의 근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100배의 복을 주셨습니다(창 26:24-25).
우리는 이삭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는 법과 주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도 사람이기 때문에 우물을 뺏길 때 감정이 일어나지 않을 리 없었습니다. 이때 감정대로 싸우기는 쉬워도 감정을 억제하며 다른 우물을 파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그의 내면은 우물처럼 깊고 신선했으며, 대양처럼 넓고 양처럼 온유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우리는 보통 생각하면 땅을 얻으려면 히틀러처럼 포악하고 권모술수가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총과 칼로 쟁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란 노여움과 폭력과 잔인의 반대로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을 말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랑이 많은 인자하신 어머니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은 비단결처럼 부드럽습니다.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깊어 어떤 사람도 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때에도 쉽게 노하거나 보복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적하지 않고, 사람에 대한 쓴 뿌리를 품지 않습니다. 그런데 체질적으로 온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 잔인합니다. 돌도 안지난 애들도 자기보다 어린 애를 보면 얼굴을 할큅니다. 그러나 훈련을 받으면 누구나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헬라어로 ‘온유함’이란 길들여진 말이란 뜻입니다. 쓸모없는 야생마가 훈련을 받으면 온순해져 유용한 말이 되듯이 훈련만 받으면 누구든지 인격이 다듬어져서 온유해집니다.
모세는 혈기가 많고 감정적이고 욱하는 성격이었습니다. 한 번은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을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애굽 사람을 죽여 모래밭에 묻어 버렸습니다. 또한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광야에서 40년간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는 광야 훈련을 통해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그를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민 12:3).
베드로는 거칠고 혈기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온유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3-25)
토인비는 “무력을 쓴 나라는 망하고 온유의 법칙을 쓴 나라는 승리했다”고 했습니다. 전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은 세인트 헤레나 섬에서 “나는 칼로 전 유럽을 정복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전 인류를 정복했다.”고 했습니다. 이솝의 우화처럼 광풍은 행인의 외투를 벗길 수 없지만, 따뜻한 햇살은 행인의 외투를 벗깁니다. 옳은 말만 하고 가시 같고 계모 같은 분들은 사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온유한 이만이 많은 사람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이삭이 우물을 양보했을 때 아비멜렉이 군대장관 비골, 보좌관인 아훗삿을 대동하고 화친을 맺으러 왔습니다(창 26:26-33).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삭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았습니다. 이삭은 삶으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향기를 나타냈습니다. 이처럼 불신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말에 있지 않고 행동에 있습니다.
오늘날 불신자들이 신자들을 보고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만 잘하지 실생활에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향력은 힘이나 말에서 오지 않습니다. 영향력은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삶으로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써 가정, 학교, 직장과 사회에서 좋은 영향력을 끼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자가 복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