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성탄 2강 누가복음 1:26-38
진정한 은혜란 무엇인가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눅 1:28)
대개 사람들은 성탄하면 성탄 카드나 선물을 주고받는 것으로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하여 가장 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귀한 선물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죽음으로 고통하는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아기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최고 선물인 아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독생성자,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약속하신 메시아, 왕의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을 빌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리아는 예루살렘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유대의 갈릴리 나사렛 한 시골 처녀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성모 마리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은혜 받은 마리아와 마리아의 몸을 빌어 탄생하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를 통해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1. 은혜 받은 자여(눅 1:26-30)
천사 가브리엘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메시아 선구자 세례 요한의 탄생을 예고했습니다. 천사가 예고한 대로 엘리사벳이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엘라사벳이 잉태한지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갈릴리 나사렛의 동네에 사는 마리아를 찾아갔습니다. 갈릴리는 성경에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으로 묘사되었습니다(사 9:1-2). 그리고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릴 만큼 이스라엘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던 곳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나사렛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였고 토질은 모래땅으로 척박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전했을 때에 나다나엘은 빌립에게 무슨 나사렛과 같은 시골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정도로 시골 강촌이었습니다(요 1:46).
이곳에서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약혼과 정혼의 절차를 밟아 결혼하였습니다. 약혼은 어린 시절에 양가 부모들이 정했습니다. 그리고 결혼 1년 전에 정혼을 했습니다. 정혼은 법적으로 부부와 다를 바 없지만 반드시 별거하여 순결을 지켜야 했습니다. 만일 순결을 지키지 않고 부정을 저지르게 되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요셉은 비록 가난한 목수였지만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요셉은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신실한 뼈대 있는 가문에서 자란 청년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시대 청년들과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이런 청년 요셉과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여인들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결혼식을 앞둔 시기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하얀 면사포를 쓰고 웨딩마치를 할 그날을 생각하며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 마리아에게 생겼습니다. 하루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이런 인사를 했습니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눅 1:28). 천사는 마리아에게 찾아와 ‘은혜를 받은 자’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리고 ‘평안할지어다.’라고 인사했습니다. ‘평안하다’는 말은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이런 인사가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천사는 놀라 무서워하는 마리아에게 다시 한 번 은혜를 받은 자임을 상기시켰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눅 1:30) 은혜란 은총, 자비, 인자, 인애 등으로 표현됩니다. 구약성경에 헤세드(chesed)와 헨(chen)을 은혜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헤세드’는 불변의 사랑, 인자란 뜻으로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헨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를 뜻합니다(렘 31:2).
우리는 보통 자기에게 유익한 일이 생기면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판단기준은 보통 가격과 가치입니다. 가격은 수량으로 환산할 수 있고, 가치는 의미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거의 가격으로 판단하고 수량으로 계산합니다. 가치나 의미보다 가격이나 수량으로 그 사람을 자리 매김합니다. 연봉이 얼마냐?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 그리고 금수저냐, 흙수저냐로 판단합니다. 대학생들은 1호선을 타느냐, 2호선을 타느냐로 판단합니다. 얼마짜리 아파트에 사느냐? 몇 평 아파트에 사느냐? 얼마짜리 옷을 입었느냐? 자동차는 무엇을 타느냐?로 판단합니다.
신랑감을 구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장이 얼마냐? 연봉이 얼마냐? 직장과 직업이 무엇이냐? 물론 신부를 구할 때에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형제가 자매를 만나자마자 연봉이 얼마냐 물었다가 자매가 당신의 연봉은 얼마요? 되물으며 당신의 눈에는 돈밖에 보이는 것이 없군요? 하며 그 자리에서 딱지를 맞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여자들에게 얼굴이 좋아졌다면 그것은 치욕이라고 한답니다. 그 말은 살쪘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수량적인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는 가격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격을 매기는 일에 익숙해져서 사람조차도 수량과 가격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가격이 아니라 가치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줄 만큼 인간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보셨습니다.
우리는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살 때에 한 근에 얼마요? 묻지, 돼지고기의 가치와 의미를 묻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을 가격과 수량으로 판단하면 이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의미와 가치 있는 존재로 보십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을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난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지금 경제가 어렵습니다. 저는 그 원인을 모든 것을 수량으로 판단하는데서 온다고 봅니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를 짓고 목사가 되는 것은 수량적인 개념으로 볼 때에 어리석은 것처럼 보입니다. 십일조와 주일헌금, 감사헌금 등을 드리는 것은 산술적인 면에서 보면 어리석어 보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 또한 어리석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헌금하는 돈을 가지고 저축하고, 맛있는 음식을 사먹고, 비싼 옷을 사 입고, 대형차를 굴리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일 예배에 드리는 시간에 자기 개발과 인생을 즐기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의미와 가치 있는 일보다 수치로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미국 대학신입생은 1968년에 인생의 목표가 돈이 41%, 83%는 철학과 의미있는 삶이라고 답했습니다. 30년 후에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의 답은 75%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이고 41%는 의미있는 철학적인 삶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10년 후에 세계금융위기를 만났습니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보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나라는 다 망했습니다. 미국이 19세기 초에는 선교사를 세계로 파송하는데 전념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부터 선교사를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미국은 서서히 병들어갔고 이제는 전쟁무기를 수출하고 각종 죄악을 수출하는 나라로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고등실업자가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입니다. 고등실업자들이 믿음을 가지고 선교사로 나가고 캠퍼스 선교사로 활동하면 한국은 몇 년 안가서 영적인 강국이 될 것입니다. 영적인 강국이 되면 물질적인 강국도 됩니다. 한국의 기독교 증가와 한국 경제의 증가는 정비례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가장 의미와 가치있게 여기는 복음역사에 귀하에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은혜란 하나님 구속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노동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은 삯과 비례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누구에게나 평등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구원받습니다. 노동은 산수지만 은혜는 고등수학입니다.
그래서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은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은혜란 받을 준비가 필요 없다. 은혜란 그냥 받기만 하면 된다. 은혜란 경쟁과 수고의 대가로 주어지는 차원이 아니다. 은혜란 색다른 계산법으로 점수를 매긴다. 하나님의 은혜는 산수가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면 그 역할이 비록 악하든지 선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이 됩니다(딤후 2:20-21, 롬 6:12-13, 9:21-23, 행 9:15). 귀하게 쓰는 그릇이든, 천하게 쓰는 그릇이든, 의의 종이든, 불의의 종이든, 진노의 그릇이든, 긍휼의 그릇이든 어떤 모양으로 쓰임을 받습니다. 악에게 쓰임을 받으면 불의 종, 진노의 그릇이 되어 죄의 삯을 받습니다. 그 후에는 사망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면 의의 종이요 긍휼의 그릇이 되어 영생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바울은 전에는 불의 종이요 진노의 그릇이 되어 하나님께 대적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긍휼의 그릇이요 의의 종이 되어 사람을 살리는 복음역사에 귀하게 쓰임을 받아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가 더욱 값지게 되기 위해서는 구속역사에 쓰임 받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것 자체로 끝나게 됩니다. 구원 받은 것 자체로 끝나게 되면 구원의 은혜를 헛되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5절을 보면 바울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뒤에는 반드시 직분이 있음을 상기켰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그것으로 끝나게 되면 신앙생활의 방향을 잃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구원역사에 쓰임 받는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성모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아픔이 있었고 슬픔이 있었습니다. 처녀가 메시아를 잉태하고 키우는 아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때의 고통을 시므온은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 2:35)고 했습니다. 부모는 자기를 희생하여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사랑하는 예수님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라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때의 고통과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 역사에 쓰임 받음으로 만세에 복이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믿는 모든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를 흠모하고 있습니다. 예술가들이 미술, 조각, 음악으로 예수님과 함께 마리아를 기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탄식하는 ‘피에타’는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쓰임 받음으로 남모르는 슬픔과 아픔이 있었지만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 받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요즘 유행어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금수저를 물고 생애를 마쳤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주시고 성경말씀으로 세상을 바꾸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학교문화와 직장문화, 그리고 가정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아픔과 고통이 따릅니다. 무엇보다도 소박한 꿈을 깨는 아픔이 있습니다. 큰 꿈을 깨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박한 꿈, 그림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임과 함께 한 백년 살고자 하는 소박한 꿈을 깬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요즘 작은 것이 아름답고, 소박한 것을 진리로 여기는 우리들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현재의 고통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이 큰 은혜임을 깨닫고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학교와 직장과 가정에 복음을 전해 내년에는 한명씩 전도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2.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37)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눅 1:31-32). 예수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크고 지극히 높으신 분입니다. 크고 지극히 높다는 것은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격 면에서 위대하십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십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십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섬기시기 위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십니다. 예수님은 문제 많은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셔서 그 여인의 목마름을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수량으로 계산하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며 누워있는 중풍병자를 찾아가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 면에서 위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위대하심은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고통과 저주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고자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의 죄 사함을 인치기 위해 능력으로 사흘 만에 부활시키셨습니다. 이로 인해 죄와 사망을 지배하는 사탄의 머리통이 박살나고 주님이 영원히 왕노릇하시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위대하심은 공의의 왕에 있습니다.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3) 다윗은 백성을 사랑과 평강, 그리고 공평과 의로, 은혜와 진리로 다스렸습니다. 또한 그의 나라는 강성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세상은 음모와 술수, 불의와 불공평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평강과 공평과 의로, 은혜와 진리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영원무궁합니다. 아기 예수님에 대해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마리아가 이런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낳고 기르는 성모가 되다니 얼마나 복된 여인입니까? 그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축복은 좋지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
이에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인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피를 이어받지 않고 순결하게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천사는 본래 잉태하지 못한다 하던 그녀의 친족 엘리사벳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수태된 지 이미 여섯 달이 되었음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능하지 못함이 없음을 말해주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하나님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3. 주의 여종이오니(눅 1:38)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핸드폰은 꺼내 요셉에게 전화를 걸어 “요셉, 자기야! 나 잉태해도 돼?”하고 물어보았습니까? 아니면 부모님께 상의하고 결단하겠다고 했습니까?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38) 이 고백은 마리아의 신앙의 고백이요, 마리아의 기도요, 마리아의 순종입니다. 마리아는 요셉의 정혼녀로서 한번쯤은 요셉과 상의해보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여종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자신을 드리고자 결단했습니다.
물론 그녀에게 요셉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하나님만큼 중요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임했을 때 마리아는 그녀는 오직 주의 여종일 뿐이었습니다. 그랬을 때 그녀는 바로 그 자리에서 “Yes, Lord”하며 성탄역사에 자신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평강과 사랑으로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은 것은 큰 은혜입니다. 거기다가 주님의 구원 역사에 쓰임을 받은 것은 더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귀히 여겨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학교와 직장과 가정을 변화시키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