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2:1-17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지식의 95%는 시각을 통해 습득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무엇을 평소에 보고 자라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사상과 철학이 형성되어 갑니다. 그 사람의 눈의 초점은 그 사람의 사상과 가치관과 관심도의 측정이 됩니다. 평소 세상에 관심을 갖게 되면 세상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평소에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예수님을 닮은 작은 예수가 됩니다. 우리는 2015년 한 해 동안 예수님을 바라보고 왔습니다. 2016년에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1. 우리가 달려가야 할 길을 달려가자(히 12:1).
성경은 성도를 가리켜 군인, 경기하는 자, 나그네, 농부 등으로 표현했습니다(딤후 2:3-6, 벧전 1:1-4). 본문에는 신앙생활을 경주하는 자로 비유했습니다. 다시 말해 신앙생활이란 유유자적하며 산책하는 나들이가 아니라 경주하는 자요, 아침에 출발해서 밤에 숙소로 돌아오는 관광객이 아니라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순례자라는 것입니다.
경주에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경주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경주에는 패배와 승리가 있습니다. 패배자에게는 쓰라린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반면에 승리자에게는 승리의 면류관과 기쁨이 있습니다. 성도의 목적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닮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향하여 전력 질주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하는 진실한 성도라면 한해를 보내면서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목적으로 정하고 향해 달려갔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어디인가를 향해 달려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을 향해 달려갑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향해 달려갑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향해 달려갑니다. 어떤 사람은 대권을 향해 달려갑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 자기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도 모르고 옆 사람이 달려가니까 달려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을 줄도 모르고 달라가는 불나방과 같은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목표 지점이 많은 것 같지만 두 목표입니다. 불신자들은 사망과 영원한 심판을 향하여 달려가고, 거룩한 성도는 구원과 영생, 생명의 면류관을 향해 달려갑니다. 어떤 경주든 누가 대신해서 달려갈 수 없고, 교대해서 달려갈 수도 없습니다. 성도의 경주는 천로역정에서 장망성을 떠난 기독도가 천성을 향해 가는 거룩한 믿음의 경주입니다. 이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습니다(마 7:14). 그래서 이 길은 고독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가는 길은 조금도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허다한 증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히 12:1상). ‘이러므로’란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을 말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어떤 환난과 핍박과 유혹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고 영광의 면류관을 썼습니다. 또 그들은 손해와 불이익이 있다고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앞을 향해 믿음으로 완주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썼습니다. 그들은 세상과 타협하거나 눕지 않고 완주한 역전의 용사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증인들은 11장에 나오는 증인들 외에 구름 같이 수 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주기철, 손양원 순교자들의 증인들도 있습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산 믿음의 증인들도 수 없이 많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승리의 면류관을 쓴 영적인 거장들이었습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많은 핍박과 환난과 매 맞음을 당하며 믿음의 경주를 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부모님으로부터 머리카락이 깎여 가발을 쓰고 뛰는 자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부모님으로부터 핍박을 받다 얼굴에는 반창고를 붙이고 온 몸에 파스를 붙이고 절뚝절뚝거리며 뛰는 형제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힘들어 피곤한 선과 연약한 무릎과 저는 다리로 뛰는 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그만 주저앉고 싶은 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수많은 역전의 챔피언들이 그들을 향해 열심히 응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혼자 뛰는 것 같지만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지금 열심히 응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경주는 주님이 지켜보시고 있고 믿음의 선진들이 응원하는 홈 경기장에서의 경주였습니다. 홈 경기장에서의 응원은 심리적으로 안정감과 엔톨핀을 돌게 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들은 응원에 힘을 얻어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 힘을 내어 앞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경주를 해야 합니까?
첫째,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려라.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히 12:1중) 경주를 하는 사람들 중에 무거운 외투나 신발을 신고 뛰는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는 할 수 있는 대로 가볍게 하고 뜁니다. 수영 선수는 0.001초를 단축하기 위하여 몸에 난 솜털까지도 민다고 합니다. 이처럼 믿음의 경주를 하려면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무거운 것은 헬라어로 옹콘(ὄγχον)으로 체중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체중이 느는 것은 대체적으로 식탐에서 비롯됩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큰 장애는 탐욕입니다. 탐욕은 부를 사랑하는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과 자녀에 대한 지나친 애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적인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율법적인 생각은 우리에게 자유와 기쁨을 앗아갑니다. 율법적인 생각은 자기 잣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면 정죄하고 판단하는 만큼 내 안에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 잣대로 남을 판단하게 되면 마음이 높아져서 교만하거나 불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기쁨이 없고 무겁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율법의 짐을 벗게 되면 마음이 넉넉합니다. 가시와 같은 마음이 사라지고 내 안에 은혜가 생깁니다. 내 안에 은혜가 있으니 생활에 여유가 있고, 신앙생활이 즐겁고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이 겸손하게 되고 사람을 편안하게 합니다. 마음에 찬송과 감사가 생깁니다. 그러니 교회에서의 봉사와 섬김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거운 탐욕과 율법적인 생각을 벗어 버리고 은혜의 옷을 입고 경주를 해야 합니다.
둘째,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죄의 특징은 얽매이게 합니다. 사람이 죄를 한 번 짓게 되면 좀처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원망과 불평이 따라 붙게 되면 입을 열었다 하면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옵니다. 사람이 시기심이 따라 붙게 되면 좀처럼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이 허무와 절망이 따라 붙게 되면 삶이 우울하고 그러다가 죽음의 병을 앓게 됩니다. 미움의 죄가 따라 붙게 되면 모든 것이 밉게 보입니다. 사람이 정욕의 죄가 따라 붙게 되면 사람이 순수해질 수 없습니다. 열등감은 낮은 자존감을 갖도록 하여 패기가 없게 합니다. 비교의식은 교만과 열등감이 혼재하게 만듭니다. 근심과 염려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나쁜 습관, 오락, 드라마, 게임, 좋지 못한 인간관계는 삶을 황폐하고 피폐하게 만듭니다. 이런 것들은 믿음의 경주를 못하게 합니다. 이런 것들을 벗어 버려야 믿음이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벗어 버린다’는 것은 집어치우다, 벗어 던지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게 되면 납덩어리처럼 누르던 무거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했습니다.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죄 짐에 짓눌려 신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침상이 젖기까지 회개했을 때에 그의 마음에 참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앞에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1-4)
우리에게 얽매이기 쉬운 죄가 무엇입니까? 얽매이기 쉬운 죄를 과감하게 떨치고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쓰기를 바랍니다.
셋째, 인내하라.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하) ‘인내’란 헬라어로 휘포모네(ὐπομονἠ)로, 전진하는 결의, 극복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장애물이 있더라도 지연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실의에도 좌절하지 않고 목적지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실패와 승리는 얼마나 참고 인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의욕을 가지고 출발합니다. 뛰다가 힘이 들고 어려우면 상이고 무엇이고 다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습니다. 문제는 초반에 의욕적으로 아무리 잘 뛰어도 끝까지 달리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달린 사람만이 승리의 면류관을 쓸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순간마다 고비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권태감이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이 있습니다. 안일하게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고갈되어 내면에 기쁨이 없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도에 포기하기 쉽습니다. 성경은 이런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막 13:13)
인내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내는 연단의 결정체입니다. 인내는 역경을 이길 수 있는 내적인 힘입니다. 인내는 마치 용광로에서 금광석을 제련하여 정금을 얻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정금과 같은 믿음은 바로 환난과 고난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3-4)
2.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3).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바울은 ‘나 바울’을 바라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사람이나 교회를 보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매사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과 삶의 가치를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현재 히브리 성도들은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핍박과 환난 중에 있었기 때문에 배교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은 자기 자신과 현실을 바라보기 쉬웠습니다. 이 때 세상과 타협하기 쉬웠습니다. 그리고 배교하기 쉬웠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슨 문제가 있을 때 사람을 바라보다가 상처를 많이 받기 쉽습니다. 불의한 세상을 바라보다가 분노하기 쉽습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세상을 바라보다가 두려움에 빠지기 쉽습니다. 물질을 바라보다가 욕심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나는 당신을 보고 실망했다. 목사님을 보고 실망했다. 교회를 보고 실망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약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함께 여행을 해보면 약점이 보입니다. 교회 또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약점이 있습니다. 목사도 목사이기 전에 사람입니다. 지상에 완전한 교회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완전하십니다. 완전하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첫째,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십니다.
‘믿음의 주’란 믿음의 창시자란 뜻입니다.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믿음을 완성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이시오 주관자요 완성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믿음은 예수님께로부터 시작되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았고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떠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앞서서 믿음의 경주를 하셨고, 우리가 그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올 수 있도록 친히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영광을 버리고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리셨습니다. 십자가의 형틀은 중죄인들만이 지는 형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 형틀에 매달리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멸시의 상징, 비방의 표적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얼마나 굴욕스러웠겠습니까?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비방의 표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허물 때문에 많은 수모와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끝까지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를 못 박는 무리들을 향해 저주 대신에 기도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상)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 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에 내 죄가 사함을 받습니다. 이 예수님을 바라볼 때 사람들에게 향한 미움, 시기심, 질투, 원망, 불신 등이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됩니다. 더럽고 흉악한 죄가 양털처럼 하얗게 됩니다.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참으신 우리 주님을 늘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참으실 수 있었던 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후에 부활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희망의 역사, 믿음의 역사, 영광의 역사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슬픔의 주, 고난의 주가 되셨지만 부활을 통해 영광의 주, 승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 고난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고난 속에 부활의 영광, 승리의 영광, 승리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 영광은 고난과는 족히 비교가 안됩니다. 고난 중에 승리의 면류관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넷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 승천시키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왕의 왕, 대제사장,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체면이나 다른 어떤 것을 보고 신앙생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때 비전을 따라 신앙생활을 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꿈이 이루어지면 이루어져서 떠나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아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가 피곤하여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5분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끝까지 십자가에서 참으신 주님을 바라보아 최후의 승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한 때 유비에프를 최고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2000년도에 이런 환상이 깨졌습니다. 그때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예수님만이 내가 바라보고 좇아야 할 것임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예수님만이 내가 바라보아야 할 분입니다.
우리에게 2015년 한해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에게도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십자가에서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 나를 구원하여 주님의 구원역사에 쓰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힘을 얻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은 나 혼자만이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곤 했습니다. 나를 위해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열렬히 응원하고 있음을 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생명을 함께 나눈 믿음의 동역자들의 기도의 응원을 듣곤 합니다. 목사님, 우리 목사님 힘내세요! 우리가 2015년을 보내고 2016년을 맞으면서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승리의 주 예수님! 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이 경주에서 믿음의 승리를 갖기를 기도합니다.
3.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십니다(히 12:4-17).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 12:4) 성도들은 죄와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정도까지 싸워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겼습니다. 아마 성도는 이만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했습니다. 죄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죄와 싸워서 지면 끝장막장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온전히 흘리심으로 인해 승리하셨습니다. 죄와 싸워서 진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헛되게 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는 봐 줄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죄는 죽느냐 사느냐, 심판이냐 멸망이냐, 사망이냐 영생이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싸움은 이미 승리한 싸움입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5-6)
성경은 잠언을 인용하여 징계에 대한 자세와 징계의 의미를 가르쳤습니다. ‘징계’(discipline)란 훈련을 뜻합니다. 훈련을 받을 때 쓴 뿌리를 품거나 가볍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훈련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이것이 무슨 뜻이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훈련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요(히 12:8), 징계는 거룩하심의 참예와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히 12:10-11).
히브리서 12장 14-17절을 보면 교회에서 살필 사람이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둘째는 쓴 뿌리를 품고 있는 자가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셋째는 음행하는 자가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넷째는 망령된 자가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십자가에서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2016년에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