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1-6
근심하지 말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세 가지 진리를 깨닫습니다. 첫째, 이 세상은 사랑이 없는 것 같지만 나의 처지와 환경과 상관없이 돕고 돕는 아름다움이 있다. 둘째, 사람은 죽을 날을 모르는 나약함과 무지함을 인정하는 겸손함이다. 셋째, 사람은 자신의 사람들의 수고, 능력, 재능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에게 많은 근심 걱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근심하고 염려하는 그들에게 두 문장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근심하지 말라.” “믿어라.” 근심의 원인은 믿지 못하기 때문이요, 그 근심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귀중한 선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모든 근심 염려를 날려 보내기를 바랍니다.
1.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우리가 살아가면서 근심하고 염려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람이 염려를 하게 되면 머리가 아프고 혈압이 올라갑니다. 이런 염려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두 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을 보면 하나는 모르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모르게 됩니다. 그리고 모르기 때문에 또 걱정합니다. 사람이 알면 걱정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확실한 보장을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불안하니 걱정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문제들이 산더미와 같은 파도가 몰아친다 할지라도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면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나의 장래가 확실하게 보장된다면 나는 거꾸로도 예수님을 믿겠다.” 모든 근심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것이고, 장래에 대한 보장(security)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장래에 대해 조금도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들의 장래를 보장해 주시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고 하셨습니다(요 13:36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그물과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마태는 돈벌이가 좋은 세리직장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줄로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조국이 해방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그리고 각 장관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론가 가신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근심 걱정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염려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미래가 확실히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택문제, 자녀문제, 노후문제, 건강문제, 결혼문제 등이 염려가 됩니다. 특히 세상이 험악하기 때문에 자녀를 둔 부모들은 매순간 염려가 됩니다. 학생들은 학자금문제, 취업문제에 대한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저는 제 딸 조은이의 갑상선 정밀 검사를 앞두고 좀 염려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염려와 근심과 불안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제일 먼저 찾아온 내면의 현상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고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맡기고 신뢰하고 삶 전체를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요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피조물이요 그분의 자녀라는 고백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위해 어떤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지혜가 무한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근심 걱정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예수님 곁에는 열두 제자들 밖에 없었습니다(눅 12:32). 그것도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고자 밖으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옷차림은 남루합니다. 예수님 주머니에는 한 푼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몇 시간 후면 권세 잡은 자들에게 잡혀서 심문 받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 처절하게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상황 앞에서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 “나를 본받으라.”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첫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십자가에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한 사람을 구원하는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조용히 겨자씨 하나가 땅속으로 들어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히게 하는 능력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진이 나서 도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나 이보다 놀라운 것은 한 사람이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고전 1:23-24).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셋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 소원을 이루어 주세요. 내가 결혼하고 싶은 저 여자와, 저 남자와 결혼하게 해 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로 알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보라. 내가 너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노라.”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십자가를 높이 들고 그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잊지 마라. 네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말라. 이것을 믿어라. 내가 못주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이고, 때로는 너를 어려운 시련에 내버려두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믿는다면 장래를 맡길 수 있습니까? 결혼을 맡길 수 있고, 자녀를 맡길 수 있습니까? 나의 모든 삶을 맡길 수 있습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고 맡기고 순종하는 순간 산더미와 같이 밀려오는 모든 염려와 근심의 파도가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요 14:2-4).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2) 아버지 집은 한 마디로 천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새 하늘, 새 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착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부자가 되기도 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것들이 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d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 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그러면 우리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아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천국 가는 것, 새 하늘, 새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가 살아야 할 궁극적인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가 살 궁극적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천국이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이란 현재를 포함하여 미래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천국에 두어야 합니다. 물론 기독교는 이 땅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세상과 현실을 중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좋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늘 넉넉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이 세상은 열심히 침노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침노만 하면 언제나 내 것이 됩니다. 세상은 동록이 많아 나의 소유를 갉아 먹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축복은 빼앗아 갈 자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에 다 놓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고 영원합니다(벧전 1:3,4).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로 가는 여정 속에 잠시 머물렀다가 가는 정거장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내가 영원히 안식할 안식처입니다. 그곳은 공해도 없고, 질병도 없고, 분쟁도 없고, 상함도 없고,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습니다(사11:9). 그곳에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맛있는 과실을 먹을 수 있습니다(계 22장). 그곳은 의와 사랑, 자유와 평화, 생명과 빛이 충만합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계 22:5)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하늘나라의 문을 여시고 제자들을 그 곳으로 인도하여 그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요 14:3).
토마스 에디슨은 1931년, 8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평생 천 가지 이상을 발명한 발명왕입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노인이 되어서도 왕성하게 일할 수 있습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믿음입니다. 영원에 대한 믿음이 저로 하여금 이렇게 현재의 삶을 더 충실하고 만족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에게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믿고 있습니다. 죽음은 현재에서의 출구요, 영원으로 향한 입구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고 믿는 사람만이 현재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믿는 사람만이 오늘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아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예비해 놓으신 천국을 믿고 소유하기를 기도합니다.
3.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5-6).
예수님께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말씀하시자 도마가 물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 14:5) 그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눈으로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보아야 믿는 실증주의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길은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통로로 목적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길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좋은 집터라도 길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이를 일컬어 맹지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천국이라 할지라도 길이 없으면 이는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길이 보이지 않거나 길이 아예 없을 때 우리는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위험을 맞게 됩니다. 길이 없으면 실패와 좌절을 반복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가짜 길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바른 길로 인도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빛입니다. 빛은 목표와 함께 길을 보여주는 희망입니다. 나침반이면서도 항구에 이르게 하는 힘이 됩니다. 주님은 길이 험난할 때 함께 동행해주는 동행자이십니다. 고난을 함께 하시는 동고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안전하게 동행해 주시는 길벗이 되십니다. 절망에 사로잡혀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에 제자들과 동행해 주시면서 희망과 용기를 주셨던 길벗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길이라고 고백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길이라는 것입니다. 길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갑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길로 가게 하기 위해 밟히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는 것 같지만 두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의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악의 길입니다. 악의 길은 굽은 길이요(잠 1:15-16,10:9), 허무한 길이요(욥 6:18), 어둠의 길이요, 죄의 길입니다(욥 24:13, 호 2:6). 이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사 59:7, 잠 14:12).
그러나 의의 길은 진리의 길이요 거룩한 길이요, 평탄한 길입니다(시 23:3, 25:10, 27:11, 사35:8). 부요한 길이요 정직한 길입니다(시 65:11, 잠 2:13). 생명의 길이요 평강의 길이요 좁은 길입니다(잠 2:19, 3:17, 마 7:14). 이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그 갈등 또한 길 문제입니다. “이 길이 진리의 길인가? 가다가 진리의 길이 아니면 어떻게 하지? 그 때 누가 내 인생을 보상해주지?”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염려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일한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망한 사람 한 명도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을 때, 빈손으로 가지만 우리는 천국 보화를 한 아름 안고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놓고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갈 수가 있습니다.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예수님은 길이 되실 뿐 아니라 진리이십니다. 세상 지식이 진리에 이르지 못할 때는 오히려 그것이 위험합니다. 이러한 세상 진리에 대해서 가르치는 교사들은 많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하면 그것은 가짜요, 사이비입니다. 비록 길이 험하고 위태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때 참 길이요, 영생으로 인도할 때 참 진리입니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믿는다면 장래를 맡길 수 있습니까? 나의 모든 삶을 맡길 수 있습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전폭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폭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고 맡기고 순종하는 순간 산더미와 같이 밀려오는 근심의 파도가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