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사순절4 요한복음 15:1-27
그 안에 거하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남북 간의 갈등, 여야 간의 갈등 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모두가 관계성 문제입니다. 이 관계성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창세기 2,3장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의 생명나무를 비롯하여 모든 열매는 원대로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먹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상실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담과 하와의 관계성도 파괴되어 상호간의 불신과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 상호간의 관계 회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농부와 포도나무, 그리고 포도나무 가지의 비유를 들어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 제자들 상호관계, 제자들과 세상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여 모든 관계가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1.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요 15:1-8)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1,5전) 예수님은 하나님이 농부요 예수님은 포도나무, 그리고 제자들은 포도나무의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에는 들포도나무도 있지만 예수님은 참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농부와 포도나무, 그리고 가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농부 없이 포도나무가 있을 수 없고, 포도나무 없이 가지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를 설명하기에 앞서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 의식과 무의식의 죄까지도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는 순간 나의 자아, 아담 안에 있는 생명이 동시에 죽습니다. 이 아담 생명은 철저한 자기중심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을 때 새로운 생명, 부활생명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이 생명은 자기밖에 모르는 아담 안에 있는 생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새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나의 영적 생명과는 떼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여 설명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고(고후 5:17), 로마서에서는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로 비유하였습니다(롬 11:17).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돌감람나무이었습니다. 그런데 돌감람나무가지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었습니다.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된 돌감람나무는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받아 참감람나무가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하)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면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과 일치된 존재가 됩니다. 과거 나는 아담 안에서 자기중심으로 살았고, 모든 것을 자기기준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때에 우리가 맺은 열매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의 공급받아 영생의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롬 6.23).
따라서 우리가 영생을 얻은 것은 내 행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우리가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믿음으로 인한 은혜입니다. 이를 안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내가 나 된 것은 예수님의 은혜요, 나의 사랑은 예수님이 주신 사랑이요, 나의 지혜는 예수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갖게 될 때 겸손하게 되고, 나이가 먹을수록 성숙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가룟 유다와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해 버리시고”(요 15:2전)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늘 함께 있었기 때문에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 같았지만 실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는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고 자기중심이었고, 하나님 기준이 아니라 자기기준으로 살았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예수님을 판단하였고, 자기기준으로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랬을 때 결국 그는 예수님을 은 30에 파는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열매를 맺으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첫째, 가지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요 15:2후-3)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가지치기를 말합니다. 포도나무는 다른 나무와 달리 꽃도 아름답지 못하고, 벌레도 많이 끼어 관상용으로는 심지 않고 오직 열매를 얻기 위해 심습니다. 포도나무는 심은 후 보통 3년 후에 수확합니다. 가지는 보통 4m 이상 웃자랍니다.
특히 포도나무의 특징은 작년에 아무리 열매를 많이 맺었다 할지라도 그 가지에서는 열매가 맺히지 않고 1년 산 새 가지에서만 열립니다. 그래서 농부는 11월에서 1월경에 포도나무 가지에서 두개의 눈만 남기고 모두 전정하고 껍질을 벗깁니다.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었다 할지라도 더 좋은 열매를 맺도록 잔가지를 제거합니다.
제자들은 가룟 유다와 달리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새 생명, 예수 생명, 부활 생명,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뿌리가 예수님께 있지만 제자들은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이래 끊임없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란 세 축으로 인간을 유혹해 왔습니다. 이런 유혹들은 우리의 힘으로 끊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달콤하고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치명적인 독을 품은 것일수록 아름답게 보입니다. 몸에 좋은 송이버섯은 볼품이 없지만 독버섯은 얼마나 아름답고 예쁩니까? 우리를 죄로 유혹하는 마귀 역시 흉악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마귀는 빛의 천사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을 감춥니다(고후 11:14). 그래서 사람들은 마귀의 정체를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요즘 대학 주변에 미인계를 쓰는 사이비 이단들이 곳곳에서 스마트 폰으로 무슨 검사를 해준다며 접근하여 유혹하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합니다.
마귀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과 마음을 통해 접근하고 미혹합니다. 가장 치열한 전쟁터는 바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아름답던 에덴동산이 인간의 죄로 망가진 것도 사탄이 하와의 마음에 의심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이 거룩한 삶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라고 했습니다.
둘째, 예수님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요한복음 15:1-11절에서 거한다는 단어가 무려 11번이나 반복합니다. 거한다는 말은 계속적인(continue) 뜻과 머무르다(remain)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계속 거해야 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회개하는 삶을 뜻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넘어집니다. 이때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이를 계속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죄를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인격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반복하게 되면 습관이 생기고, 습관을 반복하게 되면 인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한다는 것은 성경 말씀 안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 6-7절에서 “그 안에 뿌리를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릴 때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때를 따라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온전하게 행하게 합니다(딤후 3:15-17). 성경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혼과 영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히 4:12-13).
성경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하게 합니다. 성경은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슬픈 자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시 19:7-8). 성경은 하늘나라의 소망을 심어주며,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헤쳐 나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 그리고 운명을 극복하고 희망찬 인생을 살 수 있게 합니다. 성경은 생의 의미와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성경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2:3). 그래서 다윗은 새벽을 깨워 성경을 읽었습니다(시 119:123,147,148). 그때 그의 영혼은 시와 찬미와 기쁨으로 넘쳤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여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결국 불쏘시개가 되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요 15:6). 예수님의 심판의 기준은 열매입니다. 열매를 보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무는 속일 수 있지만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내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외적으로는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셋째,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예수님 안에 거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대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조용히 예수님께 나아가 무거운 죄 짐을 내려놓고 주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들어주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마다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그러나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습니다(약 4:3).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됩니다(요 15:8). 하나님의 역사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열매에 있습니다. 특히 포도열매는 풍성합니다. 그리고 향내가 아름답고 그 빛깔도 아름답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될 때 말에 있어서 삶에 있어서 행동에 있어서 아름다운 향내가 나게 됩니다.
2. 제자들 상호간의 관계(요 15:9-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랑으로 새 사람이 되었고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의 사랑 안에 거하신 것 같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게 되면 기쁨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할 때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친구 사이에는 약점과 허물을 다 압니다. 그래서 친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또 친구는 사랑의 대상보다는 경쟁, 라이벌의 대상으로 대하기 쉽습니다. 일찍이 토마스 홉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경쟁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허물과 약점을 다 아시고도 제자들을 친구로 삼으시고 바로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여기에서 ‘목숨’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목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정신과 목숨까지 합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믿음의 친구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제자들이 예수님을 택했다고 할 때 언제든지 스스로 버릴 수 있습니다. 이때 부르심은 상황에 따라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 가운데 부르셨음을 알 때 부르심은 변개할 수 없고 후회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셔서 택하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나를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어 복된 삶을 살도록 함에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 절제입니다(갈 5:22-23).
3. 제자들과 세상과의 관계(요 15:18-27)
이제 예수님은 제자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박해합니다. 이는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요 15:18-19).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들은 세상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의의 종이요, 순종의 자녀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불의의 종이요, 불순종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별된 삶을 삽니다. 그때 그들은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그런데 명목상의 신자들은 고난을 받지도 않고 박해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자는 박해가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부모님들로부터 박해를 받습니다. 친구들로부터 조롱을 받습니다. 이때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잘못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마음속에 회의와 불신이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계속 믿을 것인가, 아니면 세상으로 떠날 것인가” 고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환난과 박해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 15:20) 우리가 박해를 이길 때에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박해는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합니다(롬 5:3-4).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는다고 했습니다(딤후 3:12). 박해를 받을 때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막 13:13)
그리고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성령으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요 15:26). 제자들도 예수님을 증언하게 됩니다(요 15:27).
사람이 어디에 거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향내가 달라집니다.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가 아무리 목욕하고 향수를 바르고 외출을 해도 생선 냄새가 납니다. 몸에서 생선냄새가 나지 않으면 말속에서 냄새가 납니다. 사람이 돈 안에 거하면 돈 냄새가 나고, 세상에 살면 세상 냄새가 나고, 자기 꿈속에 살면 왕자병과 공주병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거하면 예수님의 향내가 나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일체감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뜻에 맞춰 살게 될 때 말에 있어서, 행함에 있어서, 삶에 있어서, 얼굴의 표정에 있어서 예수님의 향내가 나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