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1-5
거듭남과 산 소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의 입구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는 일체의 희망을 버리라.” 일체의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희망이 있는 사람은 산 사람입니다. 사람이 희망이 있을 때 삶의 의욕이 생기고 어떤 역경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면 물댄 동산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는 이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은 우리의 참 된 소망이 되지 못합니다. 세상의 희망은 신기루와 같아서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십니다. 산 소망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건설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참된 소망은 거듭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의 참된 소망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1. 택하심을 입은 흩어진 나그네(벧전 1: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1-2) 베드로는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했습니다.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일컬어 ‘흩어진 나그네’,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히브리인들을 가리켜 ‘디아스포라(흩어진 민족)’라고 부릅니다. 이는 ‘디아(δια)’와 ‘스포라(σπορᾷ)’의 합성어로 흩어져서 씨를 뿌린다는 뜻입니다.
현재 성도들은 네로의 핍박을 통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패배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경륜으로 볼 때 이는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모래알처럼 하나가 되지 못하는 우리에게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창세기 바벨탑 사건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말씀을 잊어버리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옹기종기 모여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그들을 환난과 핍박이란 방법을 사용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흩으셨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복음의 불씨를 들려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여 들불처럼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나그네(stranger)’는 이방인이란 뜻입니다. ‘이방인’은 원주민이 아닌 사람입니다. 이방인은 원주민이 볼 때 이상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원주민에게 비친 이방인은 피부색깔도 다르고, 생활양식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옷차림도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원주민들은 사랑하는 처자식을 고국에 놓고 복음을 전하는 그들이 더욱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비친 성도들의 모습은 이상하게 보입니다. 주일날 세상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삶을 즐기기 위해 벚꽃 구경하기 위해 산과 들로 떠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교회로 발길을 돌려 예배를 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자기를 위해 씁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하나님과 복음역사를 위해 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옷차림이 야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옷차림은 경건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감정과 욕심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삽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말씀을 따라 삽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사명의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섬김 받기 위하여 높아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섬기기 위하여 높아지고자 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천상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성도란 세상 사람들과 무엇인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일 성도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다면 이는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벧전 4:3-4)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받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그네’는 고향을 떠나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여행을 하다가 보면 한 주 지나게 되면 집이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여행을 하게 되면 그 고역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속담에 “여행자는 다리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의 세상은 잠시 머물다가는 정거장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거룩한 나그네로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나 유행가 가사처럼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떠돌다 사라져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돌아갈 곳이 있는 거룩한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줄로 알고 탐욕을 부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이 땅을 떠나 본향인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갑니다. 베드로는 과거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고자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상 메시아가 되기를 원했고, 자신은 영의정이 될 것을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이란 나그네라는 사실을 안 후에는 세상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모든 것이 부질없는 일장춘몽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그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건설된 하나님 나라만이 영원하였습니다.
야곱도 영원히 이 땅에서 살줄을 알고 부, 명예, 사랑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황혼기에 인생을 나그네라고 고백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창 47:9상). 우리가 하늘에 소망을 두고 나그네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눈에 보이는 순간의 것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성도를 ‘택하심을 입은 자들’(벧전 1:2하)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외적으로 볼 때에 나그네로서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 성도는 하나님과 성령, 예수 그리스도의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보배로운 존재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택하신 우리를 끝까지 돌 봐주시고 함께 하심을 믿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 거듭남과 성도의 희망(벧전 1:3-5)
베드로는 고난을 받는 성도들을 나그네,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한 후에 제일 먼저 무슨 말씀을 전했습니까? 베드로는 그들을 동정했습니까? 위로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고난과 환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까?
첫째,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절망적인 존재로 태어납니다.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 2:3).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육만 있을 뿐입니다. 육에는 아름다운 육과 고상한 육이 있을 수 있고 추한 육도 있을 수 있습니다. 육에는 세련된 육도 있을 수 있고 세련되지 않은 육도 있을 수 있습니다. 육에는 문명화된 육도 있고, 미개한 육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은 어디까지나 육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아무리 교육을 시켜 교화를 해도 육일뿐입니다. 육은 아무리 고상하게 보일지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육은 육을 낳을 뿐 결코 영을 낳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죽은 다음에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지만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고(히 9:27), 그 심판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영원히 참예한다고 했습니다(계 21:8). 예수님은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타난다고 말씀했습니다(요 5:29). 여기에서 선악의 개념은 예수님을 믿느냐, 아니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길어야 7, 90년입니다. 그러나 내세는 영원합니다. 내세가 얼마나 긴가를 어떤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 한 마리가 대서양의 물을 부리로 한 모금씩 쪼아서 미국을 건너 태평양으로 다 옮겼다고 해도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영원한 세계에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의 부활로 나타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죄를 지으며 인생을 즐길 것이 아니라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거듭난다’란 ‘위로부터 오다’,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란 뜻으로 영적인 탄생을 의미합니다. 이는 존재의 변화, 새로운 세계로의 변화를 말합니다.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땅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흑암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골 1:13), 어두움의 자녀에서 빛의 자녀로의 변화입니다. 이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고후 5:17).
“꽃들에게 희망”이란 책이 있습니다. 한 마리 애벌레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서 열심히 먹고 살다보니 권태감을 느꼈고 방황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애벌레 기둥을 보았습니다. 그는 기둥의 꼭대기가 구름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희망의 세계가 있을 줄 알고 정상을 향하여 애벌레를 밟으며 필사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마침내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정상에 올라가 보니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가 절망하고 있을 때에 친구인 노랑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나타나서 영광스러운 나비의 세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노랑나비의 인도로 고치를 틀었습니다. 그는 고치 안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어둡고 캄캄한 밤을 지냈습니다. 마침내 그는 영광스러운 나비가 되어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물과 성령으로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물은 요한의 물세례로서 회개를 의미합니다(막 1:4). 또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죄를 사함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순간 거듭나게 됩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우리의 시민권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게 됩니다.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어두움에서 빛의 자녀로, 심판과 진노의 대상에서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됩니다. 사탄의 자식에서 하나님 자녀의 신분으로 바뀝니다.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저 높은 곳을 사모하며 거룩함을 사모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벧후 1:4).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게 됩니다. 그렇다고 세계가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자신이 달라지니 세계가 달리 보이고, 모든 것이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달라지니 가치관과 인생관, 그리고 세계관이 변하고 소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소망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일컬어 “희망의 존재”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무려 ‘소망’이란 단어를 14번이나 썼습니다. “소망을 가지라.” 이것이 베드로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사람이 희망이 있을 때 삶의 의욕이 생기고, 어떤 역경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을 때 병사들에게 “저 너머에는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다.”고 희망을 심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은 힘을 다해 눈 덮인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누구나 공평한 분배와 계급 없는 사회의 희망을 제시했지만 그들의 희망은 거짓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영향을 받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되면 행복의 동산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행복한 동산이 아니라 상대적인 빈곤으로 인한 흑수저라는 단어가 태어났습니다. 또 통일이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희망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희망을 주지 못하고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희망은 신기루와 같습니다. 이룬 사람은 이루어서 실망하고, 이루지 못한 사람은 이루지 못해서 실망합니다.
그런데 소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삶의 질과 방향이 달라집니다. 땅에 소망을 둔 사람은 땅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 나라에 산 소망을 둔 사람은 위의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산 소망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건설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작게는 내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요, 크게는 장차 우리가 가야할 본향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화평과 희락입니다. 이는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값지고 보배로운 것입니다.
또한 산 소망은 재림하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천사장의 호위를 받으며 만유의 주요, 영광과 심판의 주로 오십니다. 이 때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고 불신자들은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상급이 되어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산 소망을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해 간직한신 것이라.”(벧전 1:4) 유업이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영원한 안식처를 말합니다(요 14:1-5). 세상의 모든 유업은 모두 썩고 더럽고 쇠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도 육체의 소멸과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유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습니다. 누가 침략하여 뺏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세에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환난가운데 능력으로 보호하여 주십니다(벧전 1:5). 하나님 나라의 유업은 영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썩어질 소망들을 붙들고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보다 하나님 축복 자체에 매여 삽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세우신 하나님 나라만이 우리의 진정한 희망입니다.
저는 목자고 했고 목사도 됐고 학위도 받았고 교수도 했고 언론에 기고도 했고 티브이에 출연도 했고 책도 냈고 집도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 안개와 같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만이 영원합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진실하게 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나그네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산 소망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럽지 않고 영원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에 목숨을 걸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붙들고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