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1-42
다 이루었다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인생에 마지막 한마디는 그 사람의 삶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그대 가슴 안에 있는 마지막 한마디”를 보면 세계사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의 마지막 한 마디들이 있습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의 마지막 한 마디는 “나에게 빛을” 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한마디로 빛이 없는 어두운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모어집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도박중독자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이 넘어갈 듯 하더니 갑자기 한손을 위로 올리고 화투짝을 쥐는 흉내를 하고는 “비광에 사꾸라 광이 있어야 치제”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에서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일곱 마디를 남기셨습니다. 용서의 말씀으로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구원의 말씀으로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애정의 말씀으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고통의 말씀으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의 말씀으로 “내가 목마르다!” 승리의 말씀으로 “다 이루었다!” 그리고 부탁의 말씀으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입니다. 이를 일컬어 가상칠언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가상칠언 중에서 승리의 말씀인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말씀으로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눅 23:34)
십자가상의 일곱 마디 중에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용서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죄로 인해 인간 상호간에도 높은 벽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도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인간 사이에 심각한 문제는 용서입니다. 인간은 서로 용서가 없기 때문에 서로간의 갈등, 국가 간의 분쟁, 남북 간의 냉전과 계층 간의 갈등 등이 생깁니다. 조금만 용서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 용서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나를 배반하고, 나를 미워하고, 나의 자존심을 짓밟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그만 두고 비석에 새겨 후손들에게 대물림을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저들 속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남을 정죄합니다.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언젠가는 복수를 하고자 합니다.
이 시간에 주님의 용서의 기도를 듣고 나의 죄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습니다. 내 죄를 고백합니다. 내 마음 속에 용서하지 못하는 억울함과 원망스러움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 그를 용서합니다. 나의 병든 마음을 치료하여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으로 자유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용서의 기쁨과 즐거움을 주옵소서.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주님, 탕자 같이 헤매고 방황하고 있었을 때에 나를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주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주님, 제가 주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크오니 사랑과 용서로 저를 품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둘째, 행위보다 믿음을 보시는 예수님(눅 23:43)
예수님의 좌우에 두 행악자가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나타내었습니다. 한 사람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하며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에게 비친 예수님은 그리스도라 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 너무 무력하게만 보였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면서까지 예수님을 비방한 것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않을 때 완악하게 됩니다.
반면에 다른 행악자는 그 행악자를 책망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0-41) 그는 자신의 죄를 깊이 알고 뉘우쳤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이를 것을 믿었습니다. 자신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예수님은 이 행악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그는 십자가에 처형을 받을 만큼 행악자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으로 구하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낙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신약의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행위를 보고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믿음만을 보고 구원하십니다. 믿음을 보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은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믿음을 보고 구원하시는 주님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죄를 자백하면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요일 1:8-9). 이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믿음의 선한 행실을 나타내야 합니다. 믿음의 행위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은혜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받은 은혜가 크면 클수록 선한 행실이 나타나게 됩니다.
셋째, 어머니를 사랑하신 예수님(요 19:26-27)
예수님은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어머니께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하)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를 잊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면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잘 모시도록 부탁하셨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모시는 것은 천륜입니다. 그리고 효는 교육과 학문의 근본이고, 덕과 경의 근원입니다. 십계명의 인간에 대한 첫 계명도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여기에서 ‘공경하라’는 뜻은 히브리어로 ‘카베드’인데, 이 뜻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로(잠 3:9, 사 43:23, 말 1:6),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단순한 효를 넘어 삼가 섬김을 다하고 무겁게 대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물질로도 봉양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동물 중에 양은 어린 양이 어미 양의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고 젖을 먹습니다. 그리고 어미양이 늙고 병들면 새끼 양이 어미 양에게 젖으로 봉양합니다. 이처럼 동물의 세계에도 부모를 공경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비금류에게도 효가 있습니다. 반포지효(反哺之孝)란 고사성어가 있는데, 이는 새끼 까마귀가 병든 어미 까마귀에게 봉양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부탁을 받고 일생동안 마리아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습니다. 에베소에 가면 요한이 마리아를 섬겼다는 장소가 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단순히 자기 부모님뿐만 아니라 섬길 분을 마땅히 섬기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육신의 부모님이 계시고, 또한 나에게 은혜를 베푼 spiritual father와 social father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분들을 잘 섬길 때 이 땅에서 장수하게 됩니다.
넷째, 절규하신 예수님(마 27:46)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을 향해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예수님의 고통은 육신과 정신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이었습니다.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버림받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일생 버림받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들에게 밀리고 밀려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받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섬긴 제자들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버림받은 것 때문에 고민하시거나 고통하시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에도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 절규하셨습니다. 그런 중에도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나를 돌아보지 않으신다고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예수님은 극한 시련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중에도 주님께 대한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다섯째, 끝까지 성경 말씀에 순종하시는 예수님(요 19: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 19:28)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습니다(요한 7:37-38). 그런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목마르심으로 우리의 갈한 목을 채워주셨고, 영생의 시냇가에서 참 만족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까지 성경 말씀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여섯째, 승리의 예수님(요 19:30).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빌라도가 쓴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히브리말과 로마어,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비록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렸지만 만왕의 왕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빌라도가 가이사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죽으면서 마지막 말은 그 사람의 삶의 결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 헬라어도 테테레스타이(Τετέλεσται),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예언의 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
구약성경의 주제는 메시아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예언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입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다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죄와는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인간을 공의대로 심판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인간들을 심판하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범죄한 인간들을 묵인하고 봐 줄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사랑하는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심으로서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창 3:15).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흘리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대가를 다 치루셨습니다(갈 3:13).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완성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구속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본래 인간은 율법을 행함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행할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인간을 가리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롬 3:23). ‘영광’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지독하여 생명, 피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양을 잡아 피를 흘리고 짐승을 태워야 했습니다. 이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피비린내와 고기 타는 냄새, 털 타는 냄새는 역겹기 그지없습니다. 특히 비오는 날의 피비린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양이라고 다 제물로 드릴 수 없고 깨끗한 것만이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짐승의 피는 그 효력이 일회적이기 때문에 연약하여 죄를 반복하는 인간들은 날마다 피비린내 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위해 흠이 없고 점 없으신 예수님을 속죄양으로 삼으셔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히 9:12).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해 양을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과 행위가 개입될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고행이나 수련이나 학위나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다 이루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은혜와 긍휼과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입니다.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영광과 승리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고 수치스럽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광과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18, 23-24) 십자가는 승리요 영광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때 승리와 영광스러운 삶이 됩니다.
왕의 고명이 효력이 있듯이 만왕의 왕 예수님의 마지막 한 마디는 온 인류에게 영원한 효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그 누구도 나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일곱째, 아버지 손에 의탁하신 예수님(눅 23:46)
예수님이 운명하시기 직전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는 커튼입니다. 본래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는 새롭고 살 길이 열렸습니다(히 10:19-20).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혼을 맡기고 운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 지시니라.”(눅 23:46)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 은총의 십자가입니다. 우리 중에 마음이 상해 있고, 낙심해 있고,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과 좌절에 빠져 있습니다. 승리의 주 예수님, 구원의 주님, 용서의 주님,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주님, 못 자국 난 승리의 주님께서 깨끗하게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