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12:27-47, 13:1-31
깨끗하게 하는 느헤미야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느 13:30)
느헤미야 12장은 성벽재건의 봉헌식, 그리고 13장은 세속화된 성전과 개인과 가정을 깨끗하게 하는 느헤미야가 나옵니다. 우리는 성벽 재건의 봉헌식에서 그들의 찬양과 그 기쁨을 통해 기쁨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전과 개인과 가정을 깨끗하게 하는 느헤미야를 통해 거룩한 교회, 행복한 가정, 건강한 사회를 이루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기쁨으로 성벽 봉헌식을 드리는 백성들(느 12:27-47)
그들은 드디어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되어 봉헌식을 갖게 되었습니다(느 12:27). 그들은 많은 위험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성벽을 재건했기 때문에 기쁨 또한 컸습니다. 그런데 이 봉헌식은 단순히 성벽에 대한 봉헌식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봉헌식은 바벨론에 빼앗겨 폐허로 변한 도시를 새롭게 재건하여 예루살렘 성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식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다른 도시와 달리 거룩한 성, 큰 왕의 성이었습니다(시 48:2).
느헤미야는 먼저 레위 사람들을 불러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래하는 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찬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들에게 먼저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도록 명했습니다(느 12:28-30).
느헤미야는 두 떼로 나누어서 에스라를 중심한 한 떼는 오른쪽을 향해 두 줄로 성벽 위에 올라 대오를 지어 전진하게 하고, 다른 한 무리는 왼쪽을 향해 대오를 지어 전진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성벽을 쌓을 때 산발랏이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겠다.”고 조롱하던 말을 기억하며 성을 힘차게 밟으며 전진했습니다. 그들은 솟아오르는 그 감격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앞장을 서서 성을 전진하지 않았습니다. 성벽 재건 역사는 느헤미야의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마땅히 봉헌식에 앞장을 서야 옳습니다. 단상에 올라가 VIP대접을 받아야 옳습니다. 그러나 그는 앞장을 서지 않고 학사 에스라를 앞세웠습니다. 그는 주님의 일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일에는 앞장섰지만 영광의 때에는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리고 성벽 재건 명단에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만큼 겸손했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주님의 일을 할 때에는 열심히 일하고 영광을 받을 때에는 뒤로 빠질 줄 아는 사람, 스테이지(무대) 체질이 아닌, 조금 일을 해 놓고 생색을 내고 자기 광을 내는 천박한 사람이 아니라 느헤미야처럼 무익한 종의 자세, 자기를 낮출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느 12:43) 그들은 성벽 봉헌예배를 드릴 때 심히 즐거워했습니다. 이 찬양과 즐거움은 그 어떤 찬양과 즐거움과 달랐습니다. 이 즐거움과 찬양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이요 찬양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주는 기쁨은 불꽃놀이처럼 잠깐 타오르다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허무합니다. 그래서 프랑스 심리학자인 자크 라캉은 “욕망이란 본질상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 손에 넣는 순간 마음에 큰 구멍이 생긴다. 욕망은 현실의 대상이 아니라 환상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환상이라는 욕망을 좇지 말고 기쁨의 대상인 주님을 좇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심령에서 샘물처럼 기쁨과 찬양이 솟아나고 흘러넘치게 됩니다.
그들은 얼마나 심령을 다해 불렀는지 그 어떤 악기의 소리보다 더 커서 멀리멀리 퍼져나갔습니다. 그들의 찬양은 기교와 세련미가 없었지만 심령을 다해 불렀기 때문에 그 어떤 찬양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은 입술 찬양보다 심령을 다해 부르는 이런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느헤미야는 봉헌식을 끝내고 율법에 정한 대로 충성스러운 청지기를 세웠습니다(느 12:44-47). 그리고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리도록 하여 하나님의 곳간을 가득 채우도록 했습니다. 이는 봉헌식을 거행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는 이들이 얼마나 귀하고 필요한 것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렇게 힘썼습니다. ‘힘썼다’는 것은 마지못해 적당히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힘을 다해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섬겼습니다. 이 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날마다 쓸 몫으로 섬겼습니다.
2. 느헤미야의 개혁 신앙(느 13:1-31)
느헤미야는 12년(B.C. 444-432) 동안 유다 총독으로 재직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아름답고 평화롭고 행복하고 번영을 누리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잠시 바사로 간 사이에 이스라엘의 신앙은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져 성전과 안식일법과 가정이 파괴되어 갔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소식을 듣고 근심하여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느 13:6-7).
그는 돌아와서 세속화된 성전과 가정, 그리고 안식일법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하여 개인의 거룩과 경건을 회복시켰습니다. 성전과 가정과 개인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입니다. 성전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게 되고, 믿는 개인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됩니다. 이 중에 어느 하나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언제나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이를 안 느헤미야는 성전과 가정과 개인을 과감하게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첫째, 느헤미야는 성전에서 도비야를 내쫓았습니다(느 13:1-14).
백성들은 모세의 모세 5경을 통하여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들은 하나님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거할 수도 없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모압과 암몬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의 두 딸과 근친상간하여 낳은 자손들이었습니다(창 19:30-38).
이스라엘은 그들을 선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통과할 때 길을 비켜 달라고 요청했지만 비켜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압왕 발락은 브올에 사는 발람을 초청하여 금은을 주며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했습니다(민 22-24장). 그들은 이 말씀을 읽고 그들과 섞여 있는 모압과 암몬 족속들을 골라내어 내쫓았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하나님의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느 13:1-3).
그런대 느헤미야가 잠깐 바사에 가서 없는 사이에 제사장 엘리아십은 모압의 도비야와 연락을 했습니다(느 13:4). ‘연락했다’는 것은 동맹을 맺었다는 뜻입니다. 도비야는 성벽을 쌓을 때 산발랏과 함께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겠다.”며 조롱했고(느 4장), 느헤미야를 광야로 끌어내어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아십은 도비야를 위하여 큰 방 하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방은 원래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을 위하여 십일조를 보관하는 곳간이었고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었습니다.
율법은 그들과 연합은 물론 함께 거하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아십은 도비야를 성전 안으로 끌어다가 아예 방을 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망하게 하려고 했던 그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제사장이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방을 내어줄 수 있습니까?
아마 엘리아십은 큰 세력을 형성했던 암몬 족속과 좋은 관계를 맺고 안전을 보장받고자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의 친척 하나가 산발랏의 딸과 결혼하였고 산발랏과 도비야는 친구지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지도 모릅니다(느 13:28). 아니면 다양성을 내세워서 그들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을 어긴 큰 죄입니다.
여기에서 도비야는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시기하여 넘어지게 하는 세속주의를 말합니다. 세속주의는 하나님의 역사를 할 수만 있으면 방해하려고 합니다. 세속주의가 교회에 침투할 때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세속주의는 이단도 포함합니다. 신천지가 7월 초에 서울 광장에서 대집회를 갖는다고 합니다. 인천대학교에도 신천지가 침투했다가 들통 났습니다. 우리는 이단을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 이단과 세속적인 가치관과 물량주의가 침투하여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찬송가를 가장한 팝송과 랩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세속주의 철학과 대중문화가 교회 안에 들어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영합될 때 교회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합니까? 교회는 세속 안에 있지만 세속적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6, 18)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속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교회의 위치가 이러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속해 있지만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하는 도피주의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세상 속에 속하지 않는 말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말하겠습니다. 한국 외교관이 미국에 대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미국에 거주하지만 미국 정부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한국 정부에 속한 한국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 정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주미 한국 대사가 미국과 짝하여 미국의 유익을 위해 산다면 이는 한국의 이적행위자요 미국 첩자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부는 그 사람을 파면하고 다른 사람을 대사로 파견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 파송 받은 하나님 나라의 전권대사입니다. 그런데 세상과 짝하여 세상의 유익을 위해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전권대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속에서 살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맛과 빛과 향기를 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위치요 성도의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전권대사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이적행위자입니까?
느헤미야는 도비야의 방에 있는 모든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내어던졌습니다. 그리고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옮겨놓았습니다(느 13:8-9). 이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세속화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성전은 일절 깨끗해야 합니다.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는 성전이 세속화된 근거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종들을 잘 돕지 않는데 있음을 보았습니다.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느 13:10). 그들이 세속에 빠지자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속에 빠지게 되니 실입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으니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으니 생활비에 대해 관심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먹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찾아 흩어졌습니다.
그러자 성전을 섬길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성전을 섬길 사람이 없으니 도비야와 그 일당들이 성전의 주인 행세를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모습을 보고 민장들을 꾸짖고 레위 사람들을 다시 불러 각기 처소에 세웠습니다(느 13:11).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게 하여 곳간을 채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군들이 먹을 것이 없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했습니다.
믿음의 척도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일군들을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고 얼마나 섬기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들의 생활비에 대해 절대성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들을 돕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군을 돕지 않을 때 교회가 깨지고 교회가 깨지면 결국 자기 자신도 망가지게 됩니다. 교회가 튼튼하고 건강해야 개인과 가정도 건강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잘 드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와 주님의 종들을 잘 섬기면 복을 받습니다.
둘째, 안식일을 잘 지키도록 했습니다(느 13:15-22).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안식일에 일을 하였습니다(느 13:15). 인간은 영과 육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영, 육간에 쉼을 가져야 합니다. 주일은 영, 육간에 쉼을 갖는 거룩한 날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사람이 쉼이 없이 살면 잘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북극을 탐험했습니다. 한 사람은 안식 없이 계속적으로 줄기차게 개를 몰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크리스천이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휴식을 취하며 갔습니다. 누가 먼저 북극에 갔을까요? 일주일에 한 번씩 쉬며 간 사람이 북극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육체적으로도 쉼을 가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쉼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쉼은 예배를 통해 가질 수 있습니다. 영적인 생활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주일을 어떻게 지내는가를 보면 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예배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이 잠잠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호수처럼 잠잠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영혼 속에 있는 모든 진상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안식일은 십계명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식일법은 십계명보다 앞선 창조법입니다. 이는 구속법보다 앞섭니다.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에서 주셨지만 안식일은 이미 16장에서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십계명에서 1-4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5-10계명은 이웃과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1-3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5-7계명까지는 이웃과의 관계, 8-10계명은 사물과의 관계, 제 4계명의 안식일법은 ‘관계회복법’이라고도 합니다. 안식일에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성도들과의 사귐을 통해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안식일에 모두 쉬기 때문에 사물과의 관계도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이 경건의 척도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안식일, 주일을 잘 지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습니다.
셋째, 가정을 바로 세웠습니다(느 13:23-27).
가정의 경건과 거룩성은 신앙과 선교의 기초가 됩니다. 가정은 안식일법과 더불어 창조법입니다. 가정의 기초는 순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과 결혼하여 가정이 세속화가 되고 이방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 자녀들은 아스돗말은 절반쯤 하면서도 모국어인 유다말은 전혀 못했습니다. 유다말을 못하니 성경을 읽고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배에 참석하여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경건한 자녀로 양육될 수 없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모습을 보고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리고 몇 사람을 데려다가 종아리를 때리고 머리털을 뽑았습니다(느 13:25). 자녀들을 다시는 불신자와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시켰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솔로몬의 역사적인 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솔로몬이 역대왕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하게 했음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크리스천의 결혼관은 성인된 남녀의 믿음의 사람과 하는 것입 합니다. 아무리 사람 좋고 돈이 많고 권세와 명예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게 크리스천 결혼관입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해서 다들 알 것입니다. 18세기 미국에 죠나단 에드워드와 맥스 쥬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죠나단 에드워드는 믿음의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반면에 맥스 쥬크는 믿음이 없는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는 점차 믿음을 잃고 당시에 가장 유명한 깡패가 되었습니다. 후에 두 가문을 5대까지 비교해 보니 에드워드는 873명, 맥스 쥬크는 1,292명의 자손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에드워드의 후손 중에는 대학총장이 12명, 교수가 65명, 의사 60, 성직자 100명, 장교 75명, 저술가 80명, 변호사 100명, 판사 30명, 공무원 80명, 하원의원 3명, 상원의원 1명, 부통령 1명 등이 배출되었습니다. 반면 맥스 쥬크는 유아 사망 309명, 거지 310명, 불구자 440명, 매춘부 50명, 도둑 60명, 살인자 70명, 실업자 53명 등 변변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일지 모르지만 믿음이 있는 여인과 결혼할 때 경건하고 사랑이 풍성하고 믿음이 풍성한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여러분은 믿음 없는 자와 결혼할 생각 마시고 믿음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럴 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넘치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주의와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안식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잘 드리고 믿음과 사람과 결혼하여 경건한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때 거룩한 교회, 건강한 가정, 그리고 행복한 사회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