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제 4과 (고전 3:1-23)
누가 지혜로운 건축자인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0-11)
바울은 고린도에서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임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 말씀 그 자체만을 전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본문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지도자로 받드는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밭에서 일하는 사역자들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어떤 시련에도 견딜 수 있는 믿음의 집을 짓도록 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터 위에 정금보다 더 귀한 믿음의 집을 짓기를 기도합니다.
1. 어린 아이들과 같은 고린도 성도들(고전 3:1-4)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바울은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를 대조시켜 고린도 성도들은 어린아이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육신에 속한 자’는 거듭나서 구원을 받았지만 영적으로 미숙한 신자를 가리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아이들이 밥을 소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젖이나 우유를 먹입니다. 그러다가 생후 1년쯤 되면 이유식을 하다가 더 자라면 밥을 먹입니다. 이처럼 바울도 고린도 성도들을 단계적으로 양육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2)
여기에서 젖이란 초보적인 구원의 진리를 말합니다(히 5:12-14, 벧전 2:2).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영적 수준이 낮기 때문에 단순한 구원의 진리만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단순한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어리기 때문에 성경에 감추어진 신비로운 비밀을 가르쳐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젖만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도 그들이 젖을 먹는 어린아이들 같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육신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고전 3:4)
그들은 시기적으로 보면 마땅히 밥을 먹고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성숙하고 spiritual한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육신에 속해 옛날에 행했던 죄악의 습성과 육욕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육신에 속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시기와 분쟁이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란 말이 있듯이, 인간은 본능적으로 시기심이 있습니다.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픕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시기심이 많습니다. 누가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 싶으면 뺏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서로 싸웁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특징은 자기 아버지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 성도들도 모이기만 하면 ‘자기 목자가 최고다’라며 자랑하고 남을 헐뜯고 비방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분쟁했습니다.
시기심은 비교의식에서 옵니다. 시기심은 원초적인 감정입니다. 열등감은 바로 시기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시기심은 용서나 대화가 없습니다. 시기심은 사람이나 공동체를 망가뜨리고 해체시키고 더 나아가서 죽이고 소멸시키고 파괴시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기하는 사람은 육체의 일을 하는 자들이라며 경고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하고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과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우리가 어떻게 시기심을 버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배우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배우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은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시기하는 마음을 버리고 감사하고 배우는 마음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스트레스의 연구로 노벨 의학을 수상한 한스 셀리에는 하버드대학 고별강의에서 스트레스를 이기는 법은 Appreciation, 감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스트레스가 많은 이 시대에 남을 시기하지 말고 감사하며 서로 배우는 마음을 가져 살리고 살아나는 아름다움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2. 하나님의 종의 사역자(고전 3:5-9)
그들은 서로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하면서 피터지게 분쟁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자기를 사역자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전 3:5) ‘사역자’란 식탁에서 주인을 시중드는 종을 뜻합니다. 바울은 모두가 주님께서 각각 시키신 대로 성도들을 섬겨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종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헬라의 철학과 사상과 각종 우상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땅을 갈아엎어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심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고전 2:3).
아볼로는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에 고린도에 와서 해박한 성경지식과 구변과 폭넓은 학문을 가지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분은 아볼로나 바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분파를 만들어 사람을 자랑하고, 사람을 높이고, 사람을 받들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과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섬김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는 농부가 가을에 추수하기까지에는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땀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도하여 데리고 온 사람도 있고, 그를 말씀으로 섬긴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으로 품어 준 사람도 있고, 친구가 되어 준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따끔하게 책망을 해 준 사람도 있습니다. 저를 보더라도 많은 분들의 섬김과 사랑과 상담과 기도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주시고, 하나님의 종으로 키우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혼자 예수님 믿고 자란 줄로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예수님을 믿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로 세운 줄로 알고 광을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혼자 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아볼로파다’, ‘바울파다’하며 패거리를 지어 분열하고 분쟁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 장로교는 수십 개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는 신학적인 사상 때문에 갈라진 것도 있겠지만 대개가 사람과 지역중심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서로 정통이라고 싸웁니다.
우리는 모두가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지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5-16)
하나님은 심는 이나 물주는 이들의 수고를 각각 어떻게 갚아 주십니까?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사역이 각기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동일하게 보십니다. 다만 일한 만큼 상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므나를 가지고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는 다섯 고을을 맡기시고,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는 열 고을을 맡긴다고 하셨습니다(눅 19:11-21).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전 4:1-2)
우리와 우리와의 관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밭과 집에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 중에 어느 한 몫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패거리를 만들어 시기하고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밥에는 바울과 같은 사람, 아볼로와 같은 사람, 게바와 같은 사람, 도마와 같은 사람 등 여러 종류의 여러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밭에 이단을 빼놓고는 모두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밭에서 서로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하나님께 풍성한 열매를 맺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3.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고전 3:10-17)
바울은 이제 주님의 종들을 집을 짓는 건축자로 비유합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집을 짓기 전에 어디에다가 집을 지을 것인가부터 생각합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반석이 나올 때까지 땅을 파서 그 반석 위에다가 집을 짓습니다. 만일 기초공사를 어설프게 하면 집을 지을 수도 짓게 되면 얼마 못가 무너집니다. 70년대 유명한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상태에서 집을 졌기 때문입니다. 와우 아파트 붕괴는 보여주기 위한 전시행정의 표본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디에다가 터를 잡았습니까? 그는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히브리 사상과 율법에 능통했습니다(행 22:3). 뿐만 아니라 헬라철학을 섭렵한 대사상가요 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학과 율법, 학문과 사상에다가 기초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0-1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위에다가 집을 지었습니다(고전 2:2). 바울은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 15:2). ‘내가 전한 그 말’은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이었습니다(고전 15:3-4). 이 터는 어느 누구도 다시 닦을 수 없는 유일한 터였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구원을 받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행 4:11-12).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 14:6).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신앙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철학이나 사상 위에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또 사명 위에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교제 위에 집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이상 위에 집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또 인간 위에다가 집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 위에 기초를 놓을 수도 있습니다. 조직에 기초를 놓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 위에 기초를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가 그림자요 허상입니다. 이런 것을 기초로 신앙생활하는 분들은 언젠가는 와우 아파트와 같이 와우 하고 무너집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지 않을 때 군에 간다든지, 혼자 멀리 떨어져 있게 되면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질 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 터를 닦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과 인격적인 사귐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개인 신앙이라고 합니다. 개인 신앙이 투철한 사람은 천지가 변하고 요동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인생의 비바람이 몰아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다음은 지혜로운 건축자는 그 기초 위에 어떤 재료로 집을 지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2-13) 바울은 두 종류를 비교하여 지혜로운 건축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말씀하였습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습니다. 사람들이 금과 은, 보석으로 짓기보다 나무나 짚이나 풀로 짓는 것은 구하기 쉽고, 또 쉽게 집을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구하기도 힘들고, 많은 노력과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요즘처럼 대량 생산 시대와 속성재배 시대에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짓는 것이 훨씬 현명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불 시련을 만날 때입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불 시련을 만날 때 타 없어집니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은 타지 않습니다. 당시에 고린도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다 타고,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만이 남았다고 합니다. 시카고에도 1871년 10월 8일 에 대화재가 나서 전시가가 다 불에 탔습니다. 그런데 돌로 지은 두 집만이 유일하게 남았습니다. 지금 그곳은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불에 타지 않는 금과 은, 보석은 무엇을 의미하며, 불에 타 버린 나무나 풀이나 짚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금과 은, 보석은 몇 백도 이상의 용광로에다가 제련한 것입니다. 용광로에서 제련된 보석은 불순물이 제거되어 순도가 높습니다. 이처럼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었다는 것은 많은 시련과 연단을 받아 육신의 본성이 녹고 깨지고 부서져서 순도 높은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을 뜻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라.”(벧전 1:7)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과 훈련을 통해 순수하게 되고 견고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죄악되고 혼탁합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점점 퇴색되어 상대적입니다. 음란하고 물질적이고 탐욕적입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이런 것들의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광로 훈련을 통해 이런 죄악된 생각과 사상들이 다 녹아나고 순수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많은 용광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깨지고 부서져 믿음이 순수하게 됩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주님께 순종하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역경의 열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경을 받은 사람은 불 시련을 받을 때에 금과 은과 보석류로 공력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나 나무, 풀, 짚 같은 것으로 집을 지은 주님의 일군은 그 지은 것이 다 타 없어지고, 그는 그슬린 상태로 겨우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는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다가 금과 은과 보석으로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합니까? 이는 우리는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에베소서 2장 20-22절을 보면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벽돌과 같이 머릿돌 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거룩한 성전을 이루어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분쟁하고 시기하는 것은 거룩한 성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장이나 교회에서나 시기하고 분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멸하십니다. 그들이 서로 분쟁하는 것은 지혜를 자랑하고 사람을 자랑하기 때문입니다(고전 3:18-23). 우리는 사람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단점을 가진 역사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지혜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지혜는 모두 헛것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다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을 돕는 자들이요, 그들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복음의 일꾼들입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건축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터 위에 불과 시련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재료로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전입니다. 전을 더럽혀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많은 고난을 통한 신실한 역경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