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전서 12:1-30

성령의 은사의 역할, 다양성과 통일성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고린도 교인들은 오랫동안 우상숭배와 미신을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그런 우상숭배와 미신을 섬기던 데서 해방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러자 그들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욕구가 분출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샴페인을 흔들어 마개를 여는 순간 그 안에 있던 샴페인이 솟구쳐 나오는 것과 같았습니다. 미신과 우상숭배에 억압에서 행방되었으니 하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들은 의욕이 넘쳐났습니다.

거기에다가 고린도교회에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가 아주 풍성했습니다. 특별한 성령의 체험과 특별한 능력이 넘쳐났습니다. 우리로서는 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우리 중에는 수년을 믿어도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데 고린도교회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능력이 많은 교회에도 속일 수 없는 것은 신앙의 연륜이었습니다.

대개 교회가 어려워지는 것은 의욕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의욕만을 앞세운 나머지 조화와 질서를 지키지 않는데서 비롯됩니다.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가 그러합니다. 의욕은 내용이라면 조화와 질서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과 형식은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인식론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형상과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내용과 형상 중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반드시 기형적이고 파행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즉 내용만 있고 형식을 갖추지 않게 되면 무질서를 가져오게 되고, 내용이 없고 형식만 갖추게 되면 빛 좋은 개살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은사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1. 은사의 역할과 목적(고전 12:1-11)

고린도 교회 내의 문제 중의 하나는 은사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마탄(χαρισμτων)으로 카리스(χαρισ)의 복수형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각종 재능 사명 직무 역량 등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 안에서 누리고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칭으로, 개별적이고 구체적입니다. 다시 말하여 은사란 하나님이 오직 그 사람에게만 주신 재능을 말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은사라고 하지 않고 신령의 은사(Spiritual gifts), 성령의 은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는 은사 그 자체를 하나님의 사랑이나 성령의 크기로 삼았습니다. 즉 많은 은사를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을 많이 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은사가 미미하거나 특별하지 못하면 자신에게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로 인해 열등감과 회의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은사로 자기 광을 내고, 자기 자랑과 권위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교회를 분열시키고 어린 신자들에게 불신과 회의를 심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영적인 무지와 교만을 깨우치기 위해 은사를 여러 모양으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성령의 역할(고전 12: 1-3)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여 깨우쳐주었습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나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2-3)

과거에 그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밖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약속은 메시아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아무 소망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저주의 말 중에 하나가 소망이 없는 사람이다.”입니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지옥의 입구에 이곳으로 들어오는 자는 일체의 희망을 버리라.”는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아무 희망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힘들지만 내일의 희망이 있기 때문에 오늘을 살아갑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즐겨 쓰는 용어가 이것도 지나가리라(This will pass away, too).”입니다. 이는 어떤 극한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치의 참혹한 핍박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그 자체가 성령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본질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은 그 자체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저는 철저한 유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삼강오륜이 몸에 배이기까지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5대 봉손, 5때까지 제사를 지내는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일 년에 8번의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제사를 약식으로 지내는 법이 없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매일 새벽에 상복을 입고 2년 동안 산소에 가셨습니다. 이런 가문에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예수님을 믿었으니 핍박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제가 예수님을 믿은 그 자체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러분들도 똑같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예수님을 믿은 그 자체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성령의 역사를 다른 외적인 표적에서 찾지 말고 저나 여러분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 것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은사의 목적(고전 12:4-11)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은사를 주신 분은 한 성령이십니다. 또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직분, 즉 교회에서 봉사하는 여러 직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직분을 주신 분도 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다양하나 모든 사람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십니다. 성령은 주의 영이시요, 주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신령한 은사들을 주신 분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각양각색의 은사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28-11절을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혜의 말씀과 다른 하나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입니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의 차이에 대해 명확하지는 않지만 지식의 말씀은 구약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말합니다. 반면에 지혜의 말씀은 지식을 어떻게 삶에 적용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교리를 말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능력의 은사인 믿음의 은사와 병 고치는 은사입니다. 당시 병 고치는 은사는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많은 의사들이 무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병 고치는 은사가 필요했습니다. 처음 복음이 들어갈 때 의료봉사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도 언더우드나 아펜셀러 선교사가 1885년에 들어오기 전에 알렌이 한국에 들어와 세례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요즘 정신과 환자들이 갈수록 많아집니다. 이들을 돕기 위해 예수님을 바로 믿는 의사들이 필요합니다.

능력 행함, 영들 분별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어의 은사인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가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의 은사로 인해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를 알게 된 바울은 14장에서 방언의 은사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말하는 방언은 엑스타시 상태에서 중얼거림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만트라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은 언어입니다. 언어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2장의 방언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언어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단이 서식하기 아주 좋은 환경을 갖춰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종교성이 강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인의 종교성은 샤머니즘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의 심층에는 무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교는 수천 년 동안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으며 종교적 토양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이성적인 은사 집회들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그릇된 환상을 심고 집회 중에 쓰러지거나 깔깔거리고 웃는 집회, 이상한 집회들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릇된 종말론으로 개인과 가정을 파괴시킵니다. 각종 이단과 신사도 운동에 현혹되어 넘어갑니다. 이런 것을 분별할 분별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양한 은사를 각기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은 각 사람과 교회 전체에 유익을 주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12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4:12) 첫째는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도록 함입니다. ‘온전하게 한다는 말은 외과 의사들이 부러진 팔을 맞추어 다시 제자리를 찾아 주는 것을 말합니다. 교인들이 교인답게 살도록 교육하고, 도와주고, 인도하고, 돌봐주는 것은 교회의 직분을 맡은 이들의 사명입니다.

둘째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봉사란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는 할 일이 많고 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편하신 분들을 차로 픽업하는 것도 봉사입니다. 봉사란 구체적으로 이러한 교회의 일들을 섬기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몸을 세운다(build up)’는 뜻은 집을 짓듯이 세워나간다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세워진 집은 없습니다. 처음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지만 기초를 잡고 골조를 세우고 단계대로 세워져 갑니다. 이처럼 교회도 처음부터 완전하고 강성한 교회는 없습니다. 점점 세워져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바로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많은 기도와 눈물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믿음도 성장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는 하늘나라에 상급이 쌓는 것입니다. 세상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는 일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구원받고 부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사와 직분을 활용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아름답게 세워가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은사를 가지고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업신여기고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혔습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판단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여러 모양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덕과 유익을 끼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은사의 근원은 성령이요,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은사는 질서 있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주장하고 내세우기보다 다른 사람을 돌보고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속 역사에 쓰실 사람을 택하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2.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고전 12:12-30)

바울은 몸과 지체의 비유를 들어 은사에 대해 더 깊이 설명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우리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지체가 몸에서 떨어져나가면 더 이상 그 지체는 산 것이 아닙니다. 지체는 몸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그 가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은사는 그리스도께 붙어야 합니다. 지체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당시 신자들 중에는 유대인도 있었고 헬라인도 있었고 종도 있었고 자유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고전 12:13). 그러면 그리스도께 붙은 각 지체들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까?

첫째, 열등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14-16절을 보면 우리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몸에는 얼굴이 붙어 있고, 얼굴에는 눈, , , 입이 붙어있습니다. 또 몸에는 팔과 다리가 붙어 있습니다. 이런 각 지체는 각기 그 역할이 다릅니다. 손의 역할과 발의 역할이 다르고, 눈의 역할과 귀의 역할이 각기 다릅니다. 그런데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았다,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았다, 발은 손에 비해 자신이 열등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는 이런 비교의식과 열등의식을 이기지 못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발은 손이 하는 섬세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역사에 발이 얼마나 귀합니까? 발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아름답도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10:15)라고 노래했습니다. 또 귀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까? 이처럼 발과 귀 모두가 소중합니다.

바울은 이들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고린도전서 1217-20절에서 온 몸이 눈이면 어떻게 들을 수 있으며, 냄새는 어떻게 맡느냐고 반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해야 합니다. 왜 나에게는 이런 직분을 안주셨느냐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대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등감을 버리고 자기의 역할을 알아야 합니다. 발은 발로서의 역할을 알고, 그 일이 자기 몸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발의 사명을 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몸에 봉사하는 길이요, 자기가 사는 길입니다.

성경에 보면 20가지의 은사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초청의 은사, 어떤 사람에게는 제자양성의 은사, 어떤 사람에게는 일대일의 은사, 카운셀링의 은사, 어떤 사람에게는 찬양의 은사, 어떤 사람에게는 격려의 은사, 어떤 사람에게는 일하는 은사,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은사, 어떤 사람에게는 화평케 하는 은사, 그리고 놀아주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전도의 은사는 없습니다. 이는 전도는 은사가 아니라 모두가 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사를 불일듯이 일으켜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둘째,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눈이 교만하여 손더러 너는 쓸 데 없다고 하고, 이가 입술더러 너는 내게 쓸 데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 은사만 최고라며 다른 사람의 은사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힙니다. 아름답지 못한 지체가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입힙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고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시고, 몸에 분쟁이 없게 하셨습니다. 여러 지체가 서로를 같이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자기 지체가 귀하다면 다른 지체도 귀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손과 눈이 누가 더 중요한 일을 하는가를 놓고 싸웠습니다. 화가 난 눈이 일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음식물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에는 손이 일을 거부했습니다. 음식물을 보고도 집을 수 없었습니다. 이틀을 굶은 뒤에야 손과 눈은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에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예쁘고 하얀 이를 드러내고 싶지만 입술로 인해 자기의 멋진 이를 드러낼 수 없다며 입술이 없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입술이 없어지자 겨울에 이가 시렸습니다. 입술이 없으면 예쁘고 하얀 이를 드러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겨울에 이가 시린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그 사람이 없어지면, 저 사람이 없어지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데 그가 문제야 하며 그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입니다.

셋째, 지체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 26-27) 우리는 모두가 지체들입니다. 우리 몸에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아픕니다. 눈이 발에게 너는 쓸 데 없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발가락에 가시가 박혔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온 몸이 쑤시고 아펐습니다. 또 손이 피아노 연주를 잘 하여 세계 정상의 무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손만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온 몸이 영광을 받습니다.

지체의식이란 다른 지체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느끼며, 다른 지체의 영광을 자기의 영광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입니다. 한 지체가 범죄하고 고통을 당할 때 비웃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또 한 지체가 칭찬을 듣고 영광을 얻을 때 시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몸은 조직(organization)으로 이루어진 아니라 유기적(organism)입니다. 교회도 조직(organization)이 아니라 유기적(organism)입니다. 우리는 지체의식을 가지고, 자기 역할을 다 할 뿐더러 서로 돌아보고, 함께 동고동락하는 형제자매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임들을 세우셨습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은사요, 그리고 서로 돕는 은사와 각종 방언의 은사입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는 말씀을 맡은 직분들입니다. 이들은 지혜와 지식의 말씀, 예언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돕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 다음은 능력 행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의 은사와 신유,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직임입니다. 서로 돕고 다스리는 은사입니다. 그 다음은 방언의 은사입니다. 바울이 첫째, 둘째, 셋째, 그 다음, 그 다음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는 목적에 따라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며 봉사하며 덕을 세우는 순서대로 열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반문했습니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다 눈이 되고, 다 머리가 될 수 없고, 다 입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더욱 큰 은사란 더욱 많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고, 봉사할 수 있는 은사를 말합니다. 이 은사는 사랑의 은사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다양합니다. 하나님은 각기 필요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신 은사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고 또 질서 있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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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말씀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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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말씀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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