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고린도전서 16:1-24
깨어 믿음에 굳게 서라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 16:13)
고린도 사회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이요, 고린도교회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쾌락주의와 물질주의가 팽배해 있습니다. 이 시대는 절대적인 가치관과 도덕이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거기다가 인간은 거대한 물질문명과 기계문명으로 소외당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이 유린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런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우리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자신을 이기고, 이 시대를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연보의 바른 자세(고전 16:1-4)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전 16:1)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연보에 관하여 질문했습니다. 바울은 연보에 관해서는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연보(λογιας)’는 헬라어로 모은다는 뜻입니다. 연보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은혜(고전 16:3), 섬김(롬 15:26), 봉사(고후 9:12), 구제(행 24:17) 등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연보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말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았습니다(행 2:45). 거기에다가 팔레스타인 전역을 휩쓴 기근으로 더욱 더 가난했습니다(행 11:28).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박해와 수탈로 인해 일자리를 빼앗긴 자들도 있었습니다(히 10:34).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구제 헌금을 거두어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했습니다(행 11:29-30). 그리고 바울은 이미 갈라디아 여러 교회 뿐 아니라 마게도냐, 아가야 여러 교회에 명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힘써 연보를 하도록 권면했습니다(고후 8:1-5,9:2, 롬 15:25-28, 행 20:4).
첫째,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의 이유
첫째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구제를 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마 6:1-4). 예수님께서는 가장 부요한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장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이 마땅합니다(고후 8:8-9). 사도 요한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권면했습니다(요일 3:18).
둘째는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5장 27절에서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영적인 것을 나눠가졌으면 물질로 그들을 돕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함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와 이방교회는 지역이 다르고 문화가 달랐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서로 도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요, 한 형제임을 깨우쳐 주고자 했습니다.
둘째, 연보에 대한 자세
첫째로 연보는 각 사람의 수입을 따라서 해야 합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그리고 각 사람이 마음에 정한 대로 하되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힘에 지나도록 기쁨으로 자원해서 드려야 합니다(고후 8:1-6). 그렇지 않은 연보는 자선사업에 불과합니다.
둘째로 연보의 시기는 매주일 첫 날에 해야 합니다. 매주 첫 날은 현재 주일을 말합니다. 첫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요, 성령께서 강림하신 오순절이기도 합니다. 첫 날에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먼저 드린다는 삶의 표현입니다.
셋째로 연보의 의미는 삶의 전체를 하나님을 위해 드리겠다는 결단이요, 고백이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연보는 단순히 소유의 일부분을 드리는 의식이 아니라 삶의 전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리빙스턴은 하나님께 드릴 헌금이 없자 자기 몸 전체를 헌금 주머니에 들어가려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그의 전적인 헌신의 표현입니다.
넷째로 연보는 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김상복 목사님의 자서전을 보면 유년 시절에 평양 산정현 교회에 다닐 때 주일이면 어머니께서 늘 깨끗한 옷을 입혀 토요일에 새 돈을 마련하든지 아니면 헌 돈이면 다리미질을 하여 봉투에 넣어 주일에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헌금은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주님께 드려야 됩니다.
다섯째로 연보는 교회에서 인정하는 사람이 관리해야 합니다.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고전 16:3-4) 이는 물질로 인해 오해를 받지 않고자 함이었습니다(고후 8:20).
바울이 연보를 관리하는 사람에 대해 여러 번 시험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집사를 세울 때 칭찬 듣는 사람을 세웠습니다. 연보 관리하는 자는 자기도 모르게 시험에 들기 쉽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에 보낼 때 두 명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고 헌물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한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을 위해 드릴 때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흔들어 채워주십니다(엡 4:19). 하나님은 시험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말 3:10). 연보를 드리는 것은 하늘에 복을 쌓는 것이요, 하나님께 저축하는 것입니다. 잠언은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다.”(잠 19:17)라고 했습니다.
탈무드에 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고민이요 하나는 불화요 또 하나는 돈지갑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돈만큼 큰 위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돈지갑이 회개해야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돈은 하나님께 드려지고 주님 안에서 쓰일 때에 큰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복된 것입니다. 그리고 돈은 하나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우리가 물질을 주님께 드림으로 하나님 사역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2. 고린도를 심방하고자 하는 바울의 여정(고전 16:5-12)
바울의 전도여행 계획은 고린도교회를 두 번 방문할 계획이었습니다(고후 1:15-16). 바울은 고린도를 들렸다가 마게도냐를 다녀 돌아올 때에 고린도를 다시 들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좀 더 머물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고전 16:8-9)
첫째는 바울에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문은 늘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닫힐지 모릅니다. 이 사실을 안 바울은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을 때에 온 힘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지금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이 시기를 놓치지 말도록 힘써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둘째는 에베소에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소동으로 에베소교회에 많은 핍박이 예상되었습니다(행 19:23-41).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예루살렘까지 따라와서 그를 괴롭혔습니다(행 24:18-21). 바울은 자신을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볼 때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탄의 역사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핍박이 있다면 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이 있을 때에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돕고자 디모데를 에라스도와 함께 마게도냐를 통해 고린도로 보냈습니다(고전 16:10-11, 행 19:22, 고전 4:7). 디모데는 에베소를 개척하는 데에 둘도 없는 동역자였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못가면 양을 보내서라도 돕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어떤 성도가 아볼로를 고린도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고전 16:12) 바울은 아볼로에게 고린도교회로 돌아가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돌볼 것을 여러 번 권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이를 거절하고 바울과 동역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아볼로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장이 되고자 합니다. 아볼로도 바울 밑에서 일하기보다는 고린도에 가서 고린도교회의 책임자가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 거기에는 자신을 따르는 양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이를 거절하고 바울과 동역하여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에베소 역사를 돕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아볼로보다 바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보다 아볼로 같은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고전 16:13-14)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깨어 있으라, 굳게 서라, 남자다워라, 강건하여라’는 말은 모두가 군사 용어입니다. 이는 병사와 같은 자세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인본주의 학문이 발달했습니다. 인본주의 학문은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고 상대적이며, 죄를 합리화하고 미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가 성행하였고 도덕적으로 문란했습니다. 신전은 쾌락의 장이요, 신전을 섬기는 여사제는 창기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한 후에 뒤풀이로 여사제들과 정욕을 즐겼습니다. 이런 시대에 믿음의 중심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권면했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파수꾼처럼 적의 침입에 대해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삶은 영적인 긴장을 풀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전술학 중에 작전에 실패한 장군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장군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계에 실패했다는 것은 깨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적과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깨어 있는 삶은 겸손히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며 무시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는 사탄이 틈 탈수 없습니다.
‘굳게 서라’는 것은 적의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는 군인들의 임전무퇴의 자세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적의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고 굳게 서있는 충성된 군인의 자세를 뜻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만들고 짜증스럽게 합니다. 또 각종 사상과 이단들이 우리를 미혹합니다. 이 때 굳게 서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굳게 주 안에서 서 있을 때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남자답다’는 것은 책임성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요즘 무책임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 안에서 맡는 일을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강건하라’는 용감한 병사처럼 믿음을 가지고 세상의 그릇된 것들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용장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고 권면했습니다(고전 16:14). 성도들은 세상의 악에 대해서는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물 없는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사랑은 바로 섬기는 삶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깨어 믿음에 굳게 서는 삶의 자세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0-12)
역사 이래 전쟁은 끝날 날이 없습니다. 어떤 역사학자는 “인류역사는 전쟁의 역사다.”라고 말했습니다. 전쟁은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래로 개인과 개인의 다툼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정과 가정,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크고 작은 싸움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떤 전쟁이든 2등은 없고 오직 1등만이 존재합니다. 인천 자유공원에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 동상에 유명한 문구가 있습니다. “승리에는 대체물이 없다(There is no substitute for victory).” 승리는 오직 승리일 뿐, 승리에 대체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승리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와의 싸움에서의 패배는 오직 죽음뿐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와의 싸움에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 흘리기까지 마귀와 싸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를 이기려면 먼저 마귀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강력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 다음의 권세가 있습니다.
마귀란 참소자(계 12:9)입니다. 이는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이란 적대자란 뜻입니다. 마귀는 대적하고 적대하고 유혹하고 갈라놓고 파멸시키고 단절시킵니다. 마귀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부부사이를 갈라놓고,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가정을 파괴시키고, 사회질서를 교란시킵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그리고 마귀에게는 간계가 있습니다. 마귀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괴시킵니다.
마귀는 고립된 세력이 아니라 사악한 대리인과 기관과 조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는 일사분란하게 인간의 세계에 침투합니다. 마귀는 아주 힘이 있고, 간계가 있고, 아주 똑똑합니다. 마귀는 인간의 심리를 기가 막히게 이잘 알고 이를 이용합니다. 마귀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입니다. 마귀는 주로 어두운 세상에서 일합니다. 또 마귀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 마귀는 시도 때도 없이 종횡 무진합니다. 그렇지만 전지하거나 전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전지전능하십니다.
이런 마귀와 싸워 이기기 위해 먼저 ‘주 안에서’ 강해야 합니다(Be strong in the Lord).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주님 안에서 생각하고, 주님 행하고, 주님 안에서 찬양하고, 주님 안에서 공부하고, 주님 안에서 사귀고, 주님 안에서 봉사해야 합니다.
‘주 안’의 반대는 ‘주 밖’입니다. 예수 밖에는 허약과 좌절, 실패와 고통, 파괴와 분열이요, 예수님 안에는 건강과 회복, 영광과 기쁨 그리고 승리와 찬양입니다. 주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3:5). 우리가 주님의 힘의 능력으로 강하게 될 때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물질주의와 육신주의가 성행하여 도덕과 윤리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정신적인 힘과 도덕적인 힘, 영적인 소망 같은 것은 저울에 달아보아도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며 오직 눈에 보이는 물질과 쾌락만을 찾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길 것인가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점점 복음 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점점 인간성은 고갈되어 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허무에 시달립니다. 우울증으로 고생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해야 합니다. 이 때에 나를 이기고, 시대를 이기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4. 바울의 마지막 권면(고전 16:14-24)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고전 16:15-16) 스데바나 가정은 아가야의 첫 열매였습니다. 스데바나는 고린도 교회의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직접 세례를 주었습니다(고전 1:1).
이제 그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전도하고 바울을 동역하여 고린도교회를 섬겼습니다. 이는 고린도 성도들이 잘 아는 바였습니다. 그 외에도 그와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와 함께 수고하는 모든 자들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영적인 질서가 서게 되고, 인본주의 자들이 발붙일 틈이 없어지게 됩니다.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심방하고 돌아갔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통해 고린도교회의 자세한 소식을 들었고, 또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들을 통해 바울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고전 16:17-18). 그래서 나와 너희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시원하다(refresh)’는 ‘영을 새롭게 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깊이 인정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고전 16:19-20) 바울은 아시아의 교회들의 문안을 전하고, 특히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간절히 문안한다고 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때 동역한 동역자들이었습니다(행 18:1-4). 그들은 로마에서 난 유대인으로 글라우디오 황제 때 유대인 추방령으로 고린도에 와서 바울을 직장에서 만나 복음을 영접하고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그들도 동행하여 에베소로 갔습니다(행 18:18,26). 그는 에베소에서 아굴라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바울을 동역하여 에베소 개척 역사에 큰 몫을 담당했습니다. 아굴라는 바울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을 만큼 헌신적으로 바울을 동역했습니다(롬 16:3,4). 얼마 후에 아굴라는 로마로 돌아갔으며, 로마에서도 가정교회를 이루고 바울을 동역했습니다(롬 16:5).
에베소에는 여러 가정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가정 교회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가정교회였습니다. 그 가정은 훌륭한 평신도 목자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동역자들에게 그들의 문안을 세세히 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친필로 문안했습니다(고전 16:21-24).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곧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교회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마음으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도덕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고,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저주를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딤후 4:18). 우리가 재림하실 예수님을 사모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분명한 물질관을 가져야 합니다. 광대하고 유효의 문이 열릴 때에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에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