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고린도후서 4:1-18
질그릇에 담긴 보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요즘 사회에 크게 회자되는 단어는 흙수저입니다. 나는 본래 흙수저로 태어났기 때문에 크고 위대한 삶을 살 수 없다고 비하합니다. 자신의 인간조건과 형편을 바라보고 위축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이 위대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인간조건이나 형편에 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 보배가 있을 때에 위대하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연약하여 쉽게 좌절하고 쉽게 넘어지고 쉽게 깨지는 질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질그릇은 별로 볼품이 없고 값도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그릇 같은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조건과 형편을 넘어서 아름답고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실 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아름답고 희망이 넘치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질그릇에 두신 보배의 비밀을 깨닫고 보배이신 예수님을 통해 보배로운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 바울의 직분에 대한 자세(고후 4:1-6)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새 언약의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태만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 마디로 꾀를 부리지 않고, 충성을 다하여 이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은밀하고 부끄러운 죄를 버렸습니다. 그는 간사한 행동을 버렸습니다. 그는 말씀을 어렵고 혼잡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진리만을 분명하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 없이 생활했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고후 4:1-2).
그런데도 사람들은 복음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워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신인 사탄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고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 주 되심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위하여 너희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바울의 고린도교회 개척사가 나옵니다. 바울은 말씀에 붙잡혀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언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행 18:5)
사람은 누구에게나 매임 병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디엔가 매여 있어야 편안함을 느낍니다. 매여 있다가 풀리면 허전합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합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자유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TV 드라마에 매여 있습니다. 쇼핑에 매여 있습니다. 인터넷 게임과 술에 매여 있습니다. 커피에 매여 있습니다. 부동산과 돈에 매여 있습니다. 화장과 피부 관리에 매인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민낯으로 다니면 자신감이 없어 불안합니다.
성경은 창조 이래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붙들려 사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사람들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육신의 정욕에 붙들려 삽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가치관을 따라 안목의 정욕에 매여 삽니다. 자기 영광을 좇아 이생의 자랑에 붙잡혀 삽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였습니다. 말씀은 곧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붙잡힌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증언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는가, 안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은 말씀에 붙잡힌 사람입니다. 말씀에 붙잡힌 사람은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말씀에 붙잡힌 사람은 기쁨이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증언하지 않는 사람은 말씀에 붙잡히지 않은 사람이요, 이런 사람은 세상의 썩을 것을 추구하다가 썩어질 삶을 살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은 사망입니다(롬 6:23). 크리스천(christian)이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christ+I am nothing).
바울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목숨을 걸고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어두움 속에서 빛이 비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고후 4:6).
바울은 율법에 눈이 가리어져서 그리스도를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해보다 빛난 빛이 그를 비추었습니다(행 26:13). 바울은 그 때에 복음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보았습니다. 그 빛을 비추신 분이 태초에 빛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이야말로, 약속된 메시아, 천하 만민을 구원할 주가 되심을 확신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 시대이기 때문에 복음이 상대화, 다원화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천지가 변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전할 메시지 내용은 “예수는 주님이시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위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2. 질그릇에 담긴 보배(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바울은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질그릇은 놋그릇이 아닙니다. 은그릇이 아닙니다. 금 그릇이 아닙니다. 진흙으로 빚은 토기입니다. 보배는 보배합에 담아야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바울은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보배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보배의 특징은 희소성에 있습니다. 세상에 흔하고 흔한 것은 보배가 아닙니다. 보배는 강도가 높아야 합니다. 강도가 높아서 깨지지 않아야 합니다. 질이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고온에서나 저온에서나 어떤 환경에서도 그 질이 변하면 보배가 될 수 없습니다. 보배는 시간적으로 영원해야 합니다. 시간에 지남에 따라 보배의 질과 강도와 희소가치가 떨어지면 보배가 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질그릇은 우리 인간을 비유합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성은 질그릇과 같습니다. 아주 약합니다. 상처를 잘 받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손실되기 쉽습니다.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미성숙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육체로나 인간성으로나 질그릇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을 질그릇으로 비유할 때에 바울 자신을 두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바울은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마 바울은 질그릇은 아니고 놋그릇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도 질그릇, 흙수저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우리처럼 몸이 약했습니다. 몸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몸의 가시가 그를 늘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눈이 어두워서 로마서를 더디오에게 더디게 대필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성격상 결함이 없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이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이 심리적으로나 정서면에서 있어서 완전무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서신을 보면 성격이 불같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우리보다 위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에 자기 자신도 질그릇이요 흙수저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야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고 세례 받고 교회에서 각기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 자신을 볼 때에 질그릇과 같습니다. 허약하고 심약합니다. 최스테반 선교사는 강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는 충남대학교에 수석 입학, 차석 졸업을 했습니다. 그는 30대 초에 독일에서 화공학 박사를 받고 30대초에 국립대학 교수로 초빙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을 만난 후 겸손한 사람이 되어 보배이신 예수님만을 힘써 증언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흙으로 빚어진 토기그릇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무쇠로 만든 마징거 Z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몇 백 년을 살 것처럼 아등거리며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며 자기 유익을 챙기고 은혜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삶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자신은 토기그릇임을 늘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내 자신이 질그릇이라고 아는 사람은 매사 조심합니다. 생각과 용모와 말과 몸가짐에 있어서 늘 근신하고 절제하며 순간순간 기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으러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질그릇이라고 아는 사람은 죄를 멀리합니다. 유혹을 멀리합니다. 나의 약점을 알고 조심하고 경계합니다. 성경은 스스로 섰다고 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고전 10:12).
또 자기를 낮추고 겸손합니다. 설령 나의 재능이 많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학식이 높다할지라도 고개를 숙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나 됨은 나의 질그릇에 있지 아니하고 내 안에 주님께서 하셨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겸손하고 항상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갖습니다. 그리고 늘 주님을 의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은 약한데서 온전해짐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려면 내가 100% 죽어야 합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질그릇에 불과하여 잘 부서지는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질그릇에 담긴 보배이신 예수님은 귀하고 가치가 있고 영원합니다. 골로새서 2장 3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보배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여러 모양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요 1:4). 예수님은 목마른 인생들에게 영생수를 주시는 영생의 샘이십니다(요 4:14). 예수님은 배고픈 자의 생명의 양식이십니다(요 6:35). 예수님은 소경의 빛이십니다(요 9:5). 예수님은 사망권세에 신음하는 인생들의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요 11:25). 예수님은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자의 선한 목자이십니다(요 10:11). 예수님은 병든 자를 치료하시는 회복자요 치유자이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운명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슬픔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빛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금이나 진주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보화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낍니다. 이를 도둑맞지 않으려고 고이 간직하고 이미테이션을 끼고 다닙니다. 명풍가방을 들고 다니다가 비가 오면 그 명품 가방이 비에 젖지 않도록 위해 품속에 넣고 갑니다.
그렇다면 우리 질그릇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보배이신 예수님을 귀히 여기고 잘 간직해야 합니다. 이게 삶의 지혜입니다. 제가 자주 미네르바(Minerva) 부엉이를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이 늙어서 이를 깨닫게 되면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지금 이 진리를 깨닫고 보배이신 예수님을 붙들고 보배이신 예수님을 귀히 여기기를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질그릇을 별로 귀히 여기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질그릇에는 별로 값이 안 나가는 된장이나 고추장이나 김치와 같은 음식을 담아 둡니다. 질그릇에 보배를 담아놓으면 그 가치가 돋보이지 않습니다. 보배는 역시 옥합에 담아야 보배로서의 가치가 더욱 빛납니다. 그런데 보배를 질그릇에 담는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울의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에는 어떤 능력이 있습니까?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복음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구원은 얽매임으로부터의 풀림입니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죄책감과 죄의식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죄의 오염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질병으로부터의 치유입니다. 복음에는 이런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구원은 온전한 구원, 참된 구원, 확실한 구원입니다.
복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도덕이 아닙니다. 복음은 상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철학이 아닙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 속에서 구원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죄 사함과 부활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능력은 헬라어로 뒤나미스, 다이너마이트가 터질 때의 그 힘을 말합니다. 다이너마이트는 무서운 파괴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두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은 부정적인 것을 죽입니다. 복음은 죄를 죽입니다. 복음은 교만을 죽입니다. 복음은 위선을 죽입니다. 복음은 거짓을 죽이고 세속적인 삶을 죽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영접하는 순간 신기하게 죄의 속성이 사라집니다. 욕망이 사라집니다. 갈등이 극복됩니다.
뿐만 아니라 긍정적으로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은혜와 평안과 기쁨이 생깁니다. 삶의 존재가치가 살아납니다. 존재의미가 살아납니다. 높은 자존감이 생깁니다. 생의 보람이 생깁니다. 병든 내면이 치유됩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료되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누구에게 이런 구원의 능력이 임합니까? 유대 사람이라고 다 구원을 받습니까? 성경을 많이 안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신앙 경력이 많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인격이 훌륭하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주님께 전적인 의탁과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께 대한 충성이요 주님께 대한 진실함입니다.
내 속에 간직한 보배이신 예수님 때문에 질그릇과 같은 나도 귀하게 여김을 받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보배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되면 내 자신이 보배인양 착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순간마다 보잘 것 없는 질그릇으로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증언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한 나귀가 고귀한 주인을 모시고 다녔습니다. 고귀한 분을 모시고 다니기 때문에 나귀의 안장은 금은보석으로 단장을 했습니다. 그 나귀가 주인을 모시고 가면 많은 사람들이 환영을 하고 절하였습니다. 나귀는 자기에게 절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주인을 떼놓고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누구하나 자기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나귀는 교만했습니다. 그 나귀는 더 이상 쓸모가 없었습니다. 인간도 교만하면 이런 나귀와 같이 됩니다. 잘 나갈 때에 나는 단지 질그릇임을 늘 마음에 새기고 보배이신 예수님을 높여야 합니다.
3. 바울의 간증(고후 4:8-15)
바울은 보배이신 예수님을 전파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절망 중에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안에 계신 보배이신 주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사람들은 능력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시대환경이 힘들다고 합니다. 물론 시대환경이 힘든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의지할 때에 시대환경을 이기고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주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환경을 이기고 이 시대를 이기고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질그릇과 같아서 잘 깨어지고 결국에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보배이신 예수님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보배이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자랑하고 간직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