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신년 마가복음 11:20-33
믿음과 기도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막 11:22)
“나는 기도하리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쓰라린 고난의 폭풍우가 나를 에워쌀 때 나는 기도하리라. 마지막 날이 가까워서 사탄이 의로운 자를 찾고 거짓 예언자들이 횡행할 때 나는 기도하리라. 이 세상의 맹목적인 냉담이 나를 실망시킬 때 나는 기도하리라. 이기적 욕심과 신앙의 결핍이 나를 사로잡고 나를 위협할 때 나는 기도하리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아름다움이 나를 황홀하게 할 때 나는 기도하리라. 주님의 크신 사랑의 친절이 나의 영혼을 채우고 나를 기쁘게 할 때 나는 기도하리라.”
본문은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마른 것을 보시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의심하지 않고 기도하여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을 믿으라(막 11:20-22).
예수님은 이튿날 아침에 성전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탐스럽던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저주를 받고 뿌리 채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의 생각이 나서 외쳤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권세에 놀라 탄식했습니다. 한편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저주하신 것을 보고 열매 없는 인생은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관심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도 말 한마디에 나무가 뿌리 채 말라버리는 놀라운 권세를 갖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로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한번 안수하면 불치병이 낫고, 한번 말씀 전하면 수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만의 소원이 아니라 우리의 소원이요 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가 부러웠습니다.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언제 저런 권세를 가질 수 있을까?” 이 또한 베드로만의 물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물음이요 나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소원과 이런 물음을 갖고 있는 베드로에게 그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Have faith in God].”(막 11:22)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이다.
우리가 전도를 하다보면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가 무엇인가를 믿고 살아갑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헬라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을 믿었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커가면서 믿음의 대상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의지할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을 의지하다가 상처받고 절망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을 믿고 의지하다가 배신당할 때 그것보다 허무하고 비참한 것도 없습니다. 저는 사람을 의지하고 믿을 때마다 실망하곤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을 의지하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이제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까?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결코 믿음의 대상이나 의지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과 섬김의 대상입니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믿을 것은 돈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뭐니 뭐니 해도 머니야 하며 돈을 소유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돈만큼 큰 위력을 가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상의 나래를 펼쳐야 할 젊은이들이 돈벌이가 되는 의대나 약대나 공대 계통으로 몰려듭니다. 과거에는 관의 입김이 컸지만 요즈음에는 재벌들의 입김이 큽니다.
그러나 돈은 있으면 편하고 없으면 불편한 필요의 대상이지 결코 믿고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돈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세 자리 머리를 의지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출신 배경과 학연과 지연, 그리고 스팩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출신배경, 학연, 지연, 스팩도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영어 속담에 “Beauty is but skin-deep; 미모도 따지고 보면 가죽 한 꺼풀.”라는 말처럼 늙으면 아름다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목사를 의지합니다. 그러나 함께 늙어가는 형편인데 어떻게 목사를 의지할 수 있습니까? 강대국, 미국, 사드를 의지하는데 결코 의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보이는 모든 것은 결코 믿음의 대상, 의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미국의 예일대학의 로니 타워 교수의 연구팀이 6년 동안을 연구한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처가나 애처가는 보통 사람보다 일찍 죽는다.”는 것입니다. 왜 일찍 죽느냐 하면 남편이 아내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아내가 혹시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과 그 스트레스 때문에 일찍 죽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리고 독생자를 보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의 하나님만이 믿고 의지해야 할 믿음의 대상이요 소망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을 의지하면 의지하는 만큼 의지하는 그것으로 망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들을 믿고 의지할 때 영적인 소원이 점점 사라지고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할 때 자립적인 사람들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경력은 몇 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나 가치관이 미성숙하여 성인아이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인정과 칭찬이나 받고자 합니다.
인정과 칭찬은 직장과 학교와 가정에서 받고 교회에 와서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초로 헌신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사회는 인정과 칭찬을 받는 장소이고 교회는 봉사와 헌신의 장소입니다. 그게 바로 자립적인 사람, 성숙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회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그 분야에서 탁월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자기 마음의 완전함과 그의 손의 능숙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시 78:72).
둘째,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를 뿌리 채 마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시면 그대로 되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매 그대로 찬란한 빛이 비추었습니다(창 1:3).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마른 막대기에서 새싹이 나게 하시고,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나는 여전히 무기력하고 무능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큰 저수지와 같습니다. 이 저수지의 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파이프가 집까지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 파이프의 직경이 굵으면 굵을수록 많은 양을 순식간에 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파이프의 직경이 작으면 작을수록 물은 졸졸 나와 답답하게 합니다.
그리고 수도관이 잠겨 있으면 물이 공급되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에 수도관이 노후가 되어 공사를 했는데 인부가 모르고 수도관 밸브를 잠그고 흙을 덮었습니다. 제가 수도꼭지를 여니 물이 졸졸 나와 인부가 다시 묻은 흙을 파서 밸브를 여니 수돗물줄기가 쫙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향하는 창을 닫고 주님께 마음의 창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파이프의 직경이 굵더라도 녹이 슬면 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습니다. 녹을 제거해야 합니다. 세상 욕심, 근심, 염려, 불신, 원망하게 되면 주님을 온전히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신을 회개하고 원망과 불평과 탐욕을 회개하고 염려 대신 기도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의 통로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크기만큼, 회개하는 만큼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과 회개와 비례합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어느 정도 큰일을 할 수 있습니까?
2. 의심하지 않는 믿음은 그대로 되리라(막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을 때 산을 바다에 던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니 어떻게 산을 바다에 던질 수 있습니까? 산의 특징은 요지부동입니다. 요지부동한 산을 말로 바다에 던진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으로 능히 이런 큰일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큰일을 한 사람들은 모두 의심과 싸워서 이긴 분들입니다. ‘의심(διακρινόμενος)’이란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저울질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양다리 걸친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두 마음을 품은 자입니다. 이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께 무엇이든지 얻기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심은 신앙생활의 적입니다.
태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도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태산은 고사하고 손가락하나 팔다리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부정적인 생각, 연약한 생각, 패배적인 생각, 운명적인 생각이 엄습하여 나의 몸과 생각과 의지를 사로잡아 아무 것도 못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믿음을 잃고 실족합니다. 그러나 의심을 극복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때 ‘누구든지’ 산을 바다에 던질 수 있습니다.
의심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심리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의심은 사탄이 심어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사탄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는 의심병을 심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 의심의 파문이 일어나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사탄이 심어주는 의심병에 걸리면 어떤 천하장사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의심을 심어 승리한 사탄은 재미가 붙어 지금도 각종 의심을 심어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민족공동체를 파괴합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의심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과연 될까”, “과연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이것은 모두가 사탄이 심어주는 의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의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사탄이 심어주는 의심은 우리의 힘과 의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무장할 때만이 의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심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끝까지 믿으면 누구든지 믿는 그대로 됩니다.
시편 기자는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고 했습니다. 바울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을 때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연약함과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십자가의 복음으로 로마를 정복하여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후에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고 고백했습니다.
근대의 선교의 아버지라 일컫는 윌리암 캐리, 믿음으로 종교개혁을 한 마르틴 루터, 믿음으로 아프리카를 정탐한 데이비드 리빙스턴, 믿음으로 인간 조건을 극복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한 디 엘 무디, 믿음으로 중국 선교를 한 허드슨 테일러, 우리 교회에도 의심치 않고 믿음으로 도전하여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역사를 이룬 산 증인들이 많습니다.
1980년대의 루마니아는 김일성과 형, 아우 사이로 지내던 독재자 차우체스쿠가 지배하던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에 김다윗 선교사와 레베카 선교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루마니아 대학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거지와 집시들이 들끓는 루마니아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큰 역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 외에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 그리고 수많은 교회와 복음 단체들, 그리고 이름도 없이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여 복음 역사를 섬긴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은 모두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불가능에 도전한 분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여러 태산들이 우리를 가로막습니다. 이런 태산에 부딪칠 때 절망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결코 절망하거나 낙망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도전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갖추어져야 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과 상식을 깨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캠퍼스가 무너졌습니다. 우리교회에는 빈자리가 많습니다. 우리가 금년에 상식과 고장관렴을 깨고 살리고 채우고자 도전할 때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금년 한해 우리가 각기 기도 제목을 믿음으로 도전하여 그대로 되는 믿음을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
3. 기도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예수님은 믿음의 능력을 말씀하신 후에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기도는 구체적인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기도는 떼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믿음이 없는 분들이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분들이 기도를 많이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고 의심하면 안됩니다. 기도했으면 감사하고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비가 오도록 기도했으면 우산을 가지고 집을 나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5장 8절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는지 금 대접에 담아두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기도를 응답하여 주십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 8:3-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기도는 하늘의 열쇠”라는 글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며, 세상의 기둥이며, 헌신의 불이며, 지식의 빛이며, 지혜의 저장소며, 영혼의 힘이며, 낙심의 치료제며, 영광의 선구자며, 인생의 보모며, 순종의 수호자며, 평정의 샘이며, 슬픈 자들의 위안이며, 의로운 자들의 승리며, 눌린 자들의 돕는 자며, 이생을 소생케 하는 것이며, 죽음을 달콤하게 하는 것이며, 하늘의 삶을 내리 맛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우리를 중도에서 만나시며, 우리가 받으려 하는 것보다 천 배나 더 베푸실 준비가 되어 있다.”
기도할 때 먼저 형제와 걸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막 11:25) 그런데 형제를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에게 온갖 상처를 주고 온갖 고통을 안겨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이는 태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으면 죽었지 그를 용서 못하겠다며 복수의 칼을 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한을 품고 살다가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말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않을 때 기도가 막히고,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합심하여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때에 용서의 사랑과 사죄의 은혜가 넘치고 합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용서는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형제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본성으로 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덧입을 때 용서할 수 있습니다. 벤허는 그의 친구이지만 원수가 된 멧살라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차 경기에서 멧살라가 죽었음에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을 문둥이 계곡에서 보는 순간 복수의 칼은 더욱더 커가기만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한마디인 “저희의 죄를 용서하소서.”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는 멧살라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이 나의 마음에서 복수의 칼을 뺏어가셨어!”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만이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산을 옮기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한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로 제가 믿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둘째로 각 가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셋째로 건강이 무너지지 않도록, 넷째로 믿음과 부르심의 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다섯째로 한국교회가 이단과 거짓 사상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여섯째로 선교사들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일곱째로 민족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