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창세기 3:1-6
타락론 : 에덴에 찾아온 사탄의 유혹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창 3:1상).
에덴 동산은 아무 부족함이 없는 사랑의 동산, 희락의 동산, 행복의 동산이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과 기쁨과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행복의 동산에 이를 시기하는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탄입니다.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했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전반부에는 사탄의 유래와 그 특징, 그리고 사탄의 유혹 방법이 나옵니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 백전불패(知彼知己 百戰不敗)’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적을 먼저 알 때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장을 통해 사탄의 특징과 유혹 방법을 알고 또 이를 이기는 법을 배워 믿음생활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1. 유혹자 사탄(창 3:1상)
아담과 하와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에덴 동산에서 아름다운 동역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열심히 감당했습니다. 이때 이를 파괴하는 침입자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뱀으로 가장한 사탄입니다.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창 3:1상).
‘간교하다’는 말은 좋은 의미로는 분별력 있다, 영리하다는 뜻입니다. 반면 나쁜 의미로는 간사하고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임을 뜻합니다. 뱀은 본래 모든 들짐승 중에 가장 아름답고 영특하게 창조되었습니다. 뱀은 색깔이 아름답습니다. 독이 있는 뱀일수록 그 모습이 더 아름답습니다. 주위 상황에 따라 잘 변형합니다. 풀숲을 지날 때에는 초록색으로, 나무를 올라갈 때에는 갈색으로 변형합니다. 그리고 순발력이 뛰어나 기회가 포착되면 순간적으로 달려들어 상대방을 쓰러뜨립니다. 뱀은 확실히 다른 짐승보다 영리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셨습니다(마 10:16).
사탄은 뱀의 이런 특성을 이용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은 사탄을 가리켜 큰 용, 옛 뱀, 마귀,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사탄을 마귀, 악령,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이 세상 임금, 귀신의 왕, 바알세불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믿는 자들을 이간질시켜 하나님을 떠나도록 하는 원수입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이 사탄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사탄의 유래
유다서 6절, 베드로후서 2장 4절, 이사야서 14장 12절을 보면 사탄은 본래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 루시퍼였습니다(이사야서 14장 12절에 등장하는 “계명성”이 KJV에서는 루시퍼로 나타납니다). 그는 특별한 사역을 위해 창조된 천사로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위치에서 지키는 수호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던 자였습니다(겔 28:12-17). 그러나 그가 축복을 많이 받자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대적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 어두움의 세력을 잡은 자가 되었습니다. 즉 사탄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처소를 떠난 범죄한 천사입니다. 사탄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인격을 가진 실재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사탄의 본성
예수님은 사탄의 본성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사탄은 진리를 떠난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살리는 것이라면 사탄의 속성은 죽이는 것이요, 참된 진리를 떠나도록 하는 미혹자요, 거짓말을 참말처럼 잘하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감당하시는 분이라면, 사탄은 인간의 약점을 책잡아 비방하고 고소하는 대적자요, 중상자요, 참소자입니다. 우리가 반복하여 죄를 지을 때 사탄은 우리에게 나타나 참소합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를 불신앙에 빠뜨려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2. 사탄의 유혹 방법(창 3:1하)
사탄은 여자가 홀로 있을 때 접근하여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이 질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여 그 뜻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것입니다. 사탄은 “각종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어도 좋다”는 무한한 자유를 빼버렸습니다. 결국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도록 금지하신 것처럼 부정적인 측면에서 질문했습니다.
또한 ‘참으로’라는 부사를 넣어 여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심었습니다. ‘참으로’란 말은 긍정문에 사용하면 확신을 심어줍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 계시다”라고 하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강조하게 됩니다. 반면에 부정문과 의문문에 사용하면 회의와 의심을 갖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가?” 하면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가를 한 번쯤 생각하게 됩니다. 사탄은 여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지 말고 한 번쯤 생각해 보라고 불신과 의심을 심었습니다.
이솝 우화 중에 네 마리의 황소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들판에 네 마리의 황소가 한가롭게 뛰놀고 있었습니다. 황소는 풀을 뜯을 때나 잠을 잘 때도 늘 함께할 정도로 친했습니다. 위험이 닥치면 서로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사자 한 마리가 황소들을 호시탐탐 노렸으나 네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힘에 겨웠습니다. 아무리 해도 그들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자는 약간 뒤쳐져 풀을 뜯는 황소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다른 소들이 네 흉을 보더라.” 사자는 다른 소들에게도 차례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네 마리의 황소는 서로를 불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사자는 한 마리 한 마리 황소를 공격하여 네 번의 멋진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탄의 전략은 사람의 마음에 의심과 불신의 씨를 심음으로 서로 간에 불신을 조장시켜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공동체를 파괴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할 때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절대적으로 믿지 말고 한 번 돌려서 상대적으로 생각하도록 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회의를 심었습니다. 이처럼 회의는 죄의 동기가 됩니다. 회의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회의는 심장을 갉아먹는 생쥐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마치 큰 대궐이 망치로 때려서는 잘 넘어가지 않지만 생쥐가 살금살금 대들보를 갉아먹으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전체를 부정하게 하여 미혹합니다. ‘모든’, 즉 전체를 부정하여 미혹합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 따 먹지 말라고 하셨지, 다 따 먹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다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며 전체를 부정했습니다. 일부분을 전체로 단정하여 부정하는 것은 마귀의 수법입니다. 사람들이 남을 공격할 때 “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단정을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두 사람의 생각을 전체로 단정 지어서 전체인 양 사람을 비방하고 헐뜯고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사탄은 오늘날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고, 믿음에 회의를 심어 우리를 신앙에서 떠나게 합니다. 몸이 연약해졌을 때 병이 찾아오는 것처럼, 사탄도 우리의 마음이 연약할 때, 특히 무슨 일이 잘 안 될 때 친구처럼 찾아와 마음에 의심과 회의를 심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 계시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세상이 왜 이렇게 다 불의하고 모순투성이란 말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왜 이 모양이지?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가? 성경은 참으로 절대적인 진리인가? 이렇게 꼭 십자가를 지고 힘들게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가?” 한 번 회의하고 의심하게 되면 전혀 생각지 않던 이상한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움이 생기고 무기력하게 됩니다. 두려움은 사탄이 심어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3. 유혹에 넘어간 여자(창 3:2-6)
사탄의 유혹을 받은 여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2-3).
여자의 대답은 창세기 2장 16-17절과 대조해 볼 때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달랐습니다. 여자는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으라”는 말씀을 빼버림으로 하나님이 주신 무한한 사랑과 자유를 빼버렸습니다. 사랑과 자유를 빼버리면 남는 것은 얽어매는 율법뿐입니다. 또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로 바꾸었습니다.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도 있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일반 나무로 일반화했습니다. 또 “만지지도 말라”는 말씀을 첨가하여 과장되게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함으로써 절대적인 명령을 상대화했습니다(KJV에는 “너희가 죽지 않기 위해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여자의 마음은 이미 사탄의 의심의 화살을 맞고 비틀거렸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어졌습니다. 사탄이 이 틈을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재빨리 여자의 약점을 간파하고 원투 스트레이트로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사탄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거짓 확신을 심어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사탄은 여자의 마음에 거짓 확신을 심은 후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교만을 심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와 같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선악과를 따 먹기만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며 따 먹도록 유혹했습니다.
더 나아가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했습니다. 사탄은 모든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까 봐 하나님이 고의로 금하신 것처럼 말했습니다.
여자가 사탄의 달콤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사탄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하나님 중심, 하나님 기준으로 생각했던 데서 자기 중심, 자기 기준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자유요, 행복이 아니라 사람을 얽어매는 구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녀는 독립하여 선과 악을 구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교만한 생각입니다. 어떻게 피조물이 조물주와 같이 될 수 있습니까? 이처럼 인간이 타락하게 된 근본원인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은 죄의 뿌리요(롬 1:21),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잠 16:18).
이때 여자의 마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여자가 탐욕의 눈으로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창 3:6). 여자의 마음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생겼습니다(요일 2:16). 여자의 마음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욕심이 마음에 둥지를 틀면 죄를 짓게 되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습니다(약 1:15). 여자는 따 먹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강한 충동이 일어나 마침내 손을 들어 실과를 따 먹었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변화무쌍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세 축이 있는데, 그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태초 이래 마귀는 지금까지 이 세 축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해 왔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감각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을 추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안목의 정욕’은 잘못된 가치관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이생의 자랑’은 자기 영광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소설가 프레데릭 베그브데는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18세가 될 때까지 평균 35만개의 광고에 노출된다. 그런데 이 모든 광고의 개념(concept)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러한 광고를 청년이 될 때까지 35만 번 이상을 보고 들으면서 이 세상의 생활양식이 자리를 잡게 되고, 그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형성된다.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키우려면 TV 보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탄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미혹합니다.
그리고 남편인 아담을 유혹하여 먹게 했습니다. 여자의 사명은 남자와 동역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인데 그녀는 죄를 짓는 일에 남편과 동역했습니다. 한편 남자는 분별력 없이 여자가 주는 대로 덥석 받아먹었습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남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여자의 말을 더 들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누구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가는 생사가 걸려 있는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는 에덴 동산에서 생명과 기쁨과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말에 순종했을 때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러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왜 이처럼 죄가 됩니까? 아담의 행위는 간단하지만 그 동기가 사탄과 함께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화하여 불순종했다는 데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하나님께 대한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인간은 결국 ‘하나님→인간→만물’의 세계에서 ‘인간→만물’의 2차원 세계로, ‘육신→물질’의 1차원 세계로 전락했습니다. 전락한 인간은 외적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속이 썩어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여 ‘인간→물질’, ‘육신→물질’의 2차원, 1차원의 세계로 전락시킵니다. 그런데 사탄은 무서운 얼굴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마치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것과 같이 달콤하게 찾아옵니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접근합니다(고후 11:14). 그래서 쉽게 유혹에 빠집니다. 한번 유혹에 빠지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죽음에는 영적인 죽음과 육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은 영과 육이 죽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도 살고 육도 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그날, 우리의 죽을 몸은 신령한 새 몸으로 변화하여 부활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과 육이 구원받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4. 유혹을 이기는 길(마 4:4)
말씀에 대해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여자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이유 중의 하나는 말씀을 잘 알지 못하고,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말씀이라도 확실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신앙의 권위의 원천은 지성과 경험과 전통과 성경 중 하나입니다. 지성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또는 선한지 악한지를 인간 자신의 이성적 능력으로 판단하는 것이고, 경험은 인간의 감각과 감정으로 진리가 무엇인지 결정짓는 것입니다. 전통은 조상들이 중시했던 것들로 신앙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한편 성경은 하나님이 온전한 진리를 기록된 문자를 통해 계시하신 것입니다.
지성에 기초한 사람들은 사두개인입니다. 그들은 지성에 기초해 볼 때 부활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성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성을 주신 이유는 선악을 분별하고,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최종의 방법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지성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도구입니다. 경험에 기초한 사람들은 뭔가 느끼고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에 신앙의 권위를 두는 것은 위험합니다(신 13:1-3). 전통에 기초한 사람들은 과거 사람들에 의해 정해진 특별한 관습, 의식을 계속 반복합니다. 성경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이에 속합니다. 모든 권위의 원천들 중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성경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성경이 유일한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딤후 3:15-17).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해주는 것은 성경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작품입니다. 성경은 단지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자체가 진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궁극적이며 최상의 기록입니다.
둘째, 성경은 경험에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의 변화를 목격하고 체험했습니다(마 17:1-5). 그러나 자기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오직 거룩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라고 증거했습니다(벧후 1:16-21). 그는 자신의 경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우선했습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성경에 기초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고전 15:3-7).
셋째, 성경은 놀라운 예언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기록자가 기록 당시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언급한 것이 수백 개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세주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그분의 사역 등 모든 것이 성경의 구석구석에서 발견됩니다. 주전 선지자 미가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또한 이사야서 53장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넷째, 지혜와 의의 영원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경 자체를 법, 율례, 계명, 명령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성경의 기록 자체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것은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진 것이든, 창조물의 모습을 통해 주어진 것이든, 세상의 역사를 통해 주어진 것이든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영원성, 지혜의 원천, 의의 원천입니다.
사탄과는 대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 이유 중 또 하나는 사탄과 대화했기 때문입니다. 사탄과 대화하면 반드시 유혹에 넘어집니다. 따라서 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 “기록되었으되”라는 한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마 4:4). 그리고 예수님은 조금도 말씀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믿고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자 하실 때 사탄은 여러 모양으로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순종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사탄을 이기는 비밀은 성경말씀을 100%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사탄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는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사탄은 미혹자입니다. 사탄은 진리를 떠난 살인자요, 거짓말쟁이로 하나님을 떠나도록 미혹합니다. 사탄은 전체를 부정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고, 교만을 심어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합니다. 사탄을 이기는 방법은 단 하나, 말씀을 경외하고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사탄의 유혹을 이기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