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아부라함의 하나님
제10장
창세기 12:1-20, 13:1-4
부르심 : 너는 복이 될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죄는 급속도로 성장하여 노아 시대에 와서는 온 세상에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새로운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람을 불러 믿음의 조상으로 키우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기초로 구속역사의 집을 지으시고, 그 씨로 말미암아 세상 만민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셨습니다. 아브람으로 시작된 구원역사는 다윗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완성되었습니다(마 1:1). 아브람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요, 믿음의 본이 되었습니다(롬 4:12, 16). 우리는 이 장에서 아브람을 부르셔서 복으로 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명령(창 12:1)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창 15:7; 행 7:2-3).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 이라크 지방입니다. 우르는 바벨론, 수메르 지방의 중심도시로 수메르 문화를 이루었으며 첫 왕이 우르남무입니다. 역사적인 시기로는 청동기 시대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문명이 발달한 만큼 우상도 많았습니다. 헬라와 로마의 신화에 많은 신들이 나오는 것처럼 이곳에도 많은 신들, 즉 신들의 아버지 아누, 대기권을 맡은 엘리, 땅의 신 아닫, 달의 신 난나르 등이 있었습니다. 우르 성의 주신(主神)은 달의 신 난나르였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도 이곳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아브람 또한 아버지와 그 시대를 본받아 우상을 숭배했습니다(수 24:2). “난나르여, 떡두꺼비 같은 자녀 한 명만 주소서!” 그는 75세가 되도록 자녀 하나 없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65세 된 사래였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면 누구나 자식을 낳고 삽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자녀 하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브람은 그릇된 가치관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망령된 행실을 좇는, 자녀 하나 없는 소망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생 하란이 일찍 죽어 조카 롯을 부양해야 하는 무거운 짐도 지고 있었습니다(창 11:27-32).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하나님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 12:1상).
‘고향’은 삶의 터전이 있는 곳이요, ‘친척’은 서로 돕고 의지하는 관계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안정된 삶의 보금자리입니다. 그곳은 청운의 꿈을 꾸며 자란 곳입니다. 새들은 날이 저물면 둥지를 찾고 여우도 늙으면 굴을 찾습니다. 그래서 많은 실향민들이 고향을 사모하며 그리워합니다. 이를 귀소본능, 수구초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정든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모험이 없으면 삶의 변화가 없고, 떠나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배는 항구에 있으면 안전하지만 항구에 정박해 두려고 만들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이 생활하면서 삶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인생이 달라지고 역사가 창조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모습, 똑같은 생활은 똑같은 결과를 낳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지, 콩 심은 데 팥이 절대로 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려면 변화를 시도하고 모험을 해야 합니다. 플로렌스 케네디는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배가 항구를 떠나 항해를 할 때 아름다운 것처럼 인간은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고 나아갈 때 아름답습니다. 여기서 ‘떠난다’는 것은 단지 장소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삶을 떠나고, 거룩한 삶을 사는 데 방해가 되는 환경과 생활습관을 떠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이 주는 좋지 못한 영향력과 죄악을 즐기던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던 삶과 그 영향력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 22-24).
날마다 욕심을 따라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을 때 우리는 성장의 기쁨과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야 합니다. 좋지 못한 환경과 생활, 습관, 나쁜 영향력, 그릇된 사상과 가치관, 그리고 세속주의 등에서 떠나야 합니다. 여기에는 떠나는 아픔이 있고 모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모험 없이는 큰일을 할 수 없고 창조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없습니다. 아픔과 모험에 따르는 두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으려면 반드시 떠나야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유학자이신 선친으로부터 한문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유교사상에 젖어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저의 삶에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후 저는 과거 유학자 집안의 풍습과 사상에서 떠났습니다. 이것은 제게 큰 아픔이었고 저의 앞날을 하나님께 맡기는 모험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의 결단을 받으시고 저의 앞날을 그분의 뜻대로 신실하게 인도하셨습니다.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떠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하).
여기에서 ‘가라’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한 분만을 의지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동안 의지하고 살았던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 한 분만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은 새 역사 창조의 터전이요, 사명의 땅,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소망의 땅이요,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함께하시는 곳은 그 어디나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입니다.
2. 하나님의 약속(창 12:2-3, 7)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명령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약속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복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I will make you into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I will make your name great, and you will be a blessing)”(창 12:2).
TLB성경에 보면 2절 앞부분에 “네가 그렇게 하면”(If you do)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나기만 하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고 복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들은 미래형 동사로 되어 있고,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현재 아브람의 형편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약속들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말씀입니다. 아브람은 현재 자녀 한 명 없습니다. 앞으로도 자식을 낳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또한 아브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골 노인에 불과합니다. 이런 아브람이 위대하게 된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고, 이름 없는 늙은 아브람을 유명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복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에 기초해서 인류 구원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기초로 아브람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결국에는 큰 민족을 이루며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약속에 기초해서 아브람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약속에 기초해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약속으로 아브람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습니다(벧후 1:4). 이 약속으로 믿음의 조상,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위대하게 된 것은 그의 재능이나 인간 됨됨이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그렇게 키우겠다는 확고한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사람들이 위대한 인생을 살고 싶지만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신의 조건과 형편을 바라보고 의지합니다. 그러다가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자신을 과소평가합니다. 위축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이 위대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조건이나 형편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우리는 연약하고 쉽게 깨지는 질그릇과 같습니다. 생각도 좁고 스케일도 작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조건과 형편을 넘어서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9장 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배롭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구체적인 복이 무엇입니까?
큰 민족을 이루리라.
아브람은 현재 자녀 하나 없습니다. 이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와 다름없는 아브람에게 해변의 모래알 같고 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자식을 주고자 하셨습니다(겔 33:24; 히 11:12; 롬 4:11). 그리고 온 세상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왕국을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인종과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사는 나라를 의미합니다(창 18:19). 출애굽기 19장 5-6절에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라고 했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을 의미합니다(벧후 2:9). 따라서 나란 존재는 나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됩니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라는 말씀 중에 ‘창대하게 한다’는 것은 그 이름을 위대하고 유명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명하게 한다는 것은 세상의 명예를 높여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유명하게 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세상 명예는 언젠가 들의 꽃과 같이 시들고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명예는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시자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아가던 아브람은 역사상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창 17:4), 선지자(창 20:7), 하나님의 방백(창 23:6), 하나님의 벗(약 2:23), 여호와의 종(시 105:5-6), 이스라엘의 조상, 믿는 자의 조상(롬 4:16)이 되어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아브람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는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유명하게 하셔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 석 자를 남기기 위하여 피나는 투쟁을 합니다. 드라마의 된장녀가 되어서라도 유명한 남편감을 얻어 자기도 유명인사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유명해지려면 하나님이 유명하게 해주셔야 됩니다.
복이 될지라.
하나님이 아브람으로 큰 민족을 이루고 그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를 복으로 삼고자 하심입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하).
“복이 될지라”는 말씀은 곧 복의 샘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샘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샘의 특징은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한강의 발원지는 태백에 있는 검용소입니다. 검용소에서 온 물은 영월의 동강을 거쳐 경기도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만나 서울과 수도권의 젖줄이 되고 있습니다. 검용소는 수천 년을 걸쳐서 언제나 물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샘은 시대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자신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눠주는 복의 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한 시대가 아니라 영원히 복의 샘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복’ 하면 오복(五福)을 연상합니다. 오복도 복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닌 존재 자체가 변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복이 될지라”는 말씀은 아브람의 후손 가운데 인류를 구속할 메시아가 나오리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는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 22:18상)라는 말씀에서 더욱더 구체적으로 계시되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8-9절에서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심판에서 구원과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2장 3절에서 복으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의 뜻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
사람이 아브람을 축복하면 그 사람이 복을 받고 저주를 하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저주와 심판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보배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십니다(벧전 2:7-8).
“너는 복이 될지라”는 말씀은 아브람에게만이 아니라 아브람의 믿음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롬 4:12, 23-24).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복의 샘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 혼자만의 구원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나눠주는 복의 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슬픔과 열등감, 운명의 근원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었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복을 나눠주는 복의 샘이 되어야 합니다.
한 형제는 가난한 가정환경으로 실업계고교를 졸업하고 지방대학 3지망으로 합격한 후, 자신은 삼류 인생이라는 패배감으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는 말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삼류 인생이 아니라 복으로 삼으셨다는 말씀이 큰 울림이 되어 복을 받으려고만 하던 삶에서 복을 나눠주는 복된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해방 이후 모스크바대학 첫 유학생 선교사로 파송되어, 4년간 러시아 대학생들을 말씀으로 제자양육하며 모스크바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러시아 극동 지역의 선교사로서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땅을 네게 주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 제단을 쌓고”(창 12:7).
땅에 대한 약속은 후에 기업에 대한 약속으로 나타납니다(창 15:7, 17:8). 그리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신다는 약속으로 나타납니다. 땅은 역사 창조의 터전입니다.
3. 아브람의 초기 신앙(창 12:4-9)
말씀에 순종한 아브람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상과 욕심, 감정, 신비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씀만을 좇았습니다. 아브람은 말씀의 깊은 뜻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처음부터 하나님의 보배로운 말씀만을 붙들고 출발했습니다.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람
아브람이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고자 했을 때 많은 친구들이 가지 못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아니, 지금 몇 살인데 이제 와서 어디를 간다는 건가? 정신 차려, 이 친구야!”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출발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람은 머리로 계산하며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래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아브람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환경을 이기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창 12:5). 신앙생활이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히 10:38-39). 신앙생활이란 출발도 중요하지만 끝은 더욱 중요합니다. 아브람은 끝까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감사의 단을 쌓은 아브람
마침내 아브람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장부들이었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이르렀지만 누구 하나 환영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 치의 발을 붙일 땅도 없었습니다(행 7:5).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제단을 쌓기란 쉽지 않습니다. 감사보다는 불평하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창 12:7-8).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말로 하면 감사하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받았던 은혜에 감사하고, 받고 있는 은혜에 감사하고, 받을 은혜에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이 감사는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합 3:17-18). 이러한 감사는 더 많은 축복을 길어냅니다. 그리고 삶의 목적과 자세로 연결됩니다. ‘이게 웬 은혜인가?’, ‘이제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그렇다면 이제 내가 어떻게 은혜에 보답하지?’ 이처럼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삶의 자세가 달라지고 목적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행복의 분량은 감사의 분량에 비례합니다. 감사가 넘치는 사람에게는 역경이 축복으로 바뀝니다. 감사가 넘칠 때 나의 내면이 달라지고, 나의 삶이 달라지고, 가정이 달라지고, 자녀가 달라지고, 교회가 달라지고, 내가 속한 일터가 달라지고, 삶의 모든 영역이 달라집니다.
장막 생활을 하는 아브람
아브람은 큰 희망을 가지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했습니다. 막상 가보니 기골이 장대한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약속의 땅에서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장막 생활은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습니다. 천장이 낮아 허리를 숙이고 출입해야 합니다. 사생활이 침해받게 됩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라도 불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브람이 생활의 안정이나 편리함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사명 중심으로, 하나님 역사를 중심으로 살았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아브람만 장막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삭, 야곱에 이르는 후손들까지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히 11:10).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능히 견뎌내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땅의 소유에 매이지 않고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4. 아브람을 보호하신 하나님(창 12:10-20, 13:1-4)
아브람이 약속의 땅에 거하여 새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다가 현실의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대로 약속의 말씀만 믿고 살다가는 굶어 죽을 것만 같아서 잠시 애굽으로 피신했습니다. 애굽에 이르자 고민이 생겼습니다. 아내 사래가 아리땁기 때문에 애굽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갈까 봐 두려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짜내어 아내를 누이라 속였습니다. 그 결과 사래는 바로의 궁녀가 되었고 자신은 후대를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많은 물질을 얻고 목숨도 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한숨도 자지 못하고 괴로워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람을 책망하지 않고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셔서 아내를 도로 찾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시고 실수와 허물에 대한 책임을 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어린 믿음을 섬세하게 돌보셨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처음 제단을 쌓았던 곳에 와서 여호와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는 좀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이 좀 어렵다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깨고 약속의 땅을 떠난 것에 대한 회개의 제단이요, 또한 아내를 누이라 속임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의 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의 자세를 새롭게 한 제단이기도 했습니다. 그 후 그는 이 실패를 기초로 어떤 시험 앞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 이 없는 아브람을 불러 복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는 하나님의 소망과 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민족 분단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를 부르셔서 복의 샘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의 샘으로 삼으시어 열방을 향해 복을 나눠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