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창세기 32:1-32, 33:1-20
소유냐 존재냐 :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8).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자기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부와 명예, 사랑과 인정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이때 자신은 초라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한때 30대가 잘 부르던 유행가가 있었습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 그대 등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드는가.”
사람과 명예와 권세 앞에서는 진정한 자기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참된 자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불굴의 투지와 노력으로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 즉 명예, 사랑, 물질 등을 다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생문제에 부딪쳤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 참된 자아를 찾도록 하셨습니다. 그 후 그는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변화될 때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 장에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며 야곱을 키우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야곱을 고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창 32:1-2)
야곱은 20년 전에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 강을 건넜지만 지금은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20년이면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데 청년이었던 야곱도 이제 장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는 고향에 가는 것이 감개무량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가까이 옴에 따라 기쁨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20년 전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빼앗기고 난 후 자기를 죽이고자 한 에서의 얼굴이 점점 더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밧단아람에서는 사랑과 물질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느라 에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이제 20년 전의 일이 생각나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창 32:1-2).
하나님은 야곱이 두려워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와 함께해 주시겠다는 약속대로 천군천사들을 보내어 그를 전후좌우로 호위하며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마하나임’, 즉 하나님의 군대라고 일축했습니다.
2. 얍복 강에 홀로 서 있는 야곱(창 32:3-24상)
야곱은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먼저 에서의 동정을 살피고자 정탐조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기 위해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야곱은 에서가 자기를 치기 위해 오는 줄로 알고 심히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는 내면에 파고드는 불안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얻은 모든 것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하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머리가 안 돌아가고, 사지가 마비되고, 모든 생각이 부정적이 됩니다. 그러나 야곱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머리를 돌리고 지혜를 짜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에서가 치면 다른 데로 피하고자 소유를 두 떼로 분산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창 32:9-12).
그는 지팡이 하나로 요단을 건넜지만 지금은 큰 거부가 되게 하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의 핵심은 에서의 손에서 자신을 건져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현재 당면한 현실 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긴급요청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보다 야곱이 위기의 때에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기도한 후에도 안심이 되지 않아 사람은 선물에 약하다는 심리를 이용하여 에서에게 예물 작전을 썼습니다. 그 예물은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젖 나는 낙타 30마리(새끼 낙타 30마리),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새끼 나귀 10마리) 등 모두 540(580)마리였습니다. 한 마리에 10만 원씩만 쳐도 5,400(5,800)만 원이나 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그냥 보내지 않고 세 떼로 나누고 또 각 떼 사이에 거리를 두어 많은 양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에서를 만날 때 각기 같은 말을 하도록 하여 선물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그는 에서의 노여움을 풀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야곱은 예물을 얍복 강 건너편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밤에 사랑하는 처자식과 6년간 모은 물질 등을 모두 얍복 강 건너편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얍복 강을 건너지 못하고 혼자 남았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 32:24).
이는 현재 야곱의 실존입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형 에서 때문에 얍복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라반 때문에 다시 밧단아람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불안은 점점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불안을 자기 성실과 노력과 의지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들과 자식들, 그리고 물질은 그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많은 것을 소유했기 때문에 더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초롱초롱 빛나는 별빛이 얍복 강에 비치건만 그의 내면은 답답하고 고독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독백했습니다. “나는 내가 얻고 싶은 모든 것을 소유했다. 명예, 사랑, 물질! 이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열심히, 지독히, 굳센 의지로 살아왔어! 그러나 나의 내면에 파고드는 두려움과 불안은 해결되지 않는구나…. 아, 미치도록 답답하다.” 홀로 남은 야곱,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창 32:24)라는 말씀에서 그가 자신의 힘과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야곱이 자신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소유에 급급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떠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주어진 현실에서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여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인간의 본질보다 삶 속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파헤칩니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실과 노력으로 내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야곱은 사실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력과 열심 자체로써 인간 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행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내면에 파고드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답답함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진정한 행복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관계된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서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꽉 짜인 조직사회, 복잡한 인간관계, 모든 소유 등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조용하고 진지하게 ‘나는 누구이며, 내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야곱의 두려움과 불안은 외부에서 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불안은 외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불안은 에서 때문이 아니라 부당한 방법으로 에서를 속이고 축복을 빼앗은 죄의식에서 온 것입니다. 죄는 불안, 공허, 허무, 절망, 두려움, 그리고 죄의식을 가져다줍니다. 불안과 허무와 절망과 두려움은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을 환경의 변화를 통해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죄는 조건 개선이나 환경 개선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 드러내놓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씻음을 받아야 해결됩니다.
예수님의 보배 피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배 피는 우리의 죄악된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아무리 더럽고 추한 죄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보배 피를 마음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이 그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롬 3:25). 예수님의 보배 피가 우리 마음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이 피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역사하여 죄로 병든 마음, 삐뚤어진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을 다 치료해 주며 소생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피는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며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죄로부터 보호해 주며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내적 힘을 공급해 줍니다.
예수님의 피는 구원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생명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은총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능력의 피입니다. 이 예수님의 피가 내 심장에서 박동할 때 죄 사함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있을 때 죄의 파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모두 흘리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는 죄 사함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는 강한 죄의 사슬을 끊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속하셨으니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널 넘어서 가리라”(찬송가 265장).
3.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는 야곱(창 32:24하-27)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 32:24하).
여기에서 ‘어떤 사람’이란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고뇌의 밤을 지내고 있는 야곱을 도우시고자 친히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도우시고자 야곱과 씨름하셨습니다. 이때 야곱은 힘을 다하여 씨름했습니다. 여기에서 ‘씨름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기도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야곱과의 씨름을 이길 수 없게 되시자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셨습니다(창 32:25). 그러자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습니다. 이 ‘허벅지 관절’이란 상체와 하체를 이어주는 힘줄로, 몸의 평형과 힘을 유지해 주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이 어긋나면 몸을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게 되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야곱의 인생철학, 즉 야곱을 지탱해 주었던 모든 것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의 강한 인간성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의 자아가 깨어지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자아가 탄생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야곱은 더 이상 의지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날이 새자 하나님의 천사는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필사적으로 붙들고 다리를 절며 축복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창 32:26). 호세아서 12장 4절에 의하면 야곱은 울면서 간구했습니다.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호 12:4상).
야곱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때야말로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절박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얻었으므로 마땅히 행복해야 옳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축복을 더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가 소유했던 것들이 진정한 축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가 소유한 것들이 하나님의 축복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불안과 두려움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는 외적인 소유보다 내적인 것, 세상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드디어 영적인 세계에 눈을 떴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축복을 달라고 애원하는 야곱에게 물으셨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 32:27상).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와 인격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를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니고데모는 ‘백성의 정복자’란 뜻이며, 베드로는 ‘반석’이란 뜻이요, 다윗은 ‘사랑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직결됩니다. 그러므로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너는 어떤 존재이며, 네 인격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소유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야곱이 소유보다 존재와 인격 자체에 깊은 관심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 짓고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질문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이 들려 자아를 잃어버리고 미쳐 소리지르는 한 청년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막 5:9)고 질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름을 물으심으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발견하도록 하셨습니다. 야곱은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야곱이니이다”(창 32:27하).
야곱이란 속이는 자, 싸우는 자, 빼앗는 자란 뜻입니다. 여기에는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요, 인간성이 강한 사람이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을 경쟁의 대상자로 삼고 투쟁하여 모든 것을 다 소유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항상 ‘나’, ‘내 것’뿐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자신의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자기의 본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본모습은 속이고 싸우고 빼앗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는 권투선수가 사각의 링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것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고백은 죄인으로서의 자아 발견이요 고백이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 8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기 전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이스라엘의 모범적인 청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보면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 가운데 좌절하지 않았고, 내일을 준비하는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성실한 사람이 범하기 쉬운 이기심을 극복하고 남에게 호의를 베풀 줄 아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대인관계도 원만하여 동료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겸손히 배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남이 볼 때 결코 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비천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스스로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딤전 1:15).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부패한 세상을 향해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후에 그는 자신도 백성들처럼 부정한 자임을 발견했습니다(사 6:5). 사람은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설 때만이 자신의 실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4.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신 하나님(창 32:28-30)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어떻게 바꾸어주셨습니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8).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과의 투쟁이란 뜻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투쟁뿐이었습니다. 에서와 라반과 아내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은 자기 중심보다 하나님 중심, 자기 기준보다 하나님 기준, 빼앗는 자보다는 나눠주고 축복해 주는 자, 개인보다 민족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황태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복을 원하는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주심으로 진정한 축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의 변화, 자기 중심성과 본성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데 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는 학문적으로 탁월한 사람이요, 종교적으로 거룩한 바리새인이요, 사회적으로 의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돈도 많았습니다. 이런 배경을 소유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했고 결국 정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어두움을 상징합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그의 내면이 칠흑처럼 어두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베드로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 1:2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고 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현대인들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데서 존재 의미를 찾고자 하기 때문에 존재 상실이라는 비극이 초래되었다고 했습니다.
행복은 소유가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마틴 셀리그만의 행복 공식을 보면 H=S+C+V: set point(50%)+condition(10%)+voluntary action(40%)입니다. 이 공식에서 환경의 변화가 가져다주는 행복은 10%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환경의 변화가 행복의 100%로 알고 환경의 변화를 위해 목숨을 겁니다. 행복은 환경의 변화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존재 자체가 변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있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찬송가 305장).
제가 캠퍼스 사역을 시작하던 해, 한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는 재학시절에 고시에 합격할 만큼 성실한 형제였습니다. 무엇이든 뜻을 세우면 집념을 가지고 도전하였습니다. 그가 승승장구하던 때에 저는 인천으로 왔고 그 형제와는 헤어져 지냈습니다. 젊은 열정으로 첫 사역을 시작하던 때의 열매였고 같이 늘 밥을 먹고 함께 했던 이 형제를 잊지 못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이 형제가 저를 찾아 왔습니다. 그는 20세 초반에 사무관이 되어 앞날이 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믿음있고 아름다운 자매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과 달리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중에 창세기 야곱의 말씀을 공부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복 영적인 복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시는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야곱과 같이 세상의 것을 움켜잡으려고만 했던 이기심과 욕심을 회개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을 제하시고 믿음의 담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젊은 날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품고 살게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30대 초반에 정부 장학금을 받아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도록 길도 열어주셨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것들을 가지고 교만하지 않고 직장에서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나타내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유보다 존재가 변화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5. 브니엘의 하나님(창 32:31-32)
하나님을 만나 인격이 변화되었을 때 야곱의 내면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창 32:31).
죄인인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고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습니다. 이는 그의 내면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불안과 두려움등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희망과 기쁨, 빛과 생명이 넘치는 새 아침이 밝아왔습니다. 모든 죄의식이 사라지고 마음에 감사와 은혜, 그리고 사랑과 기쁨, 평화가 임했습니다.
6. 세겜에 머무르는 야곱(창 33:1-20)
창세기 33장 1-16절을 보면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뒤 에서를 만나는 자세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얍복 강을 건너지 못할 만큼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에서를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에서를 만난 소감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했습니다(창 33:10). 이는 에서에 대한 아첨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 그 내면이 변화되었을 때 에서와의 인간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선물을 강권하여 받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에서에 대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은 맨 끝에 두었습니다. 또 에서가 야곱의 길을 인도하려 할 때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마땅히 정든 고향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갈 때 만났던 벧엘, 그리고 서원했던 벧엘로 가서 20년 동안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가정을 이루어주시고, 부요하게 하시고,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세겜에 머물러 그곳에 자기를 위한 집과 가축우리를 짓고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단을 쌓고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야곱은 세겜에서 큰 시련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소유에서 행복을 찾던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습니다. 그의 인격을 바꿔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세상에 보이는 축복이 진정한 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내면이 변화하는 것이 진정한 복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소유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던 데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찾도록 도우셨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변했을 때 브니엘의 새 아침이 밝아왔습니다. 그의 내면이 변했을 때 세상이 달리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야곱의 강한 인간성을 깨뜨리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