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창세기 34:1-31, 35:1-29, 36:1-43
엘벧엘 신앙 :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 35:1).
참된 신앙과 우상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미신은 기원(祈願)만 있지 감사가 없습니다. 반면에 참된 신앙은 감사로 나타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보통 유리컵에 물이 반 정도 차 있으면 두 가지 반응이 나온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에이, 반밖에 없잖아”, 긍정적인 사람은 “반이나 있네”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반을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앞으로 반을 채워주실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축복의 때나 궁핍의 때나 환난의 때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의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풍족한 물질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감사가 없고, 그것이 오히려 욕망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을 가져다준다면 이는 참된 행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구제의 대상이 될 정도로 빈곤한 삶을 살지라도 그 마음에 감사가 있다면 그는 복된 사람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주님이 주신 것을 복으로 알고 감사하는 삶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물량의 차원이 아니라 어떤 차원에서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경험하면서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불평과 원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복되게 하십니다. 감사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서 옵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야곱의 신앙이 자기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신앙임을 보게 됩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감사의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엘벧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초로 하나님께 감사의 단을 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세겜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야곱(창 34:1-31)
야곱이 세겜에 머물고자 했을 때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창세기 34장을 보면 야곱의 고명딸인 디나가 하몰의 아들 세겜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은 이 소리를 듣고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보통 부모 같으면 당장에 찾아가서 항의하고 관에 고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잠잠했습니다.
반면에 야곱의 아들들은 심히 노하여 이를 복수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세겜의 아버지 하몰에게 “우리가 너희와 통혼할 테니 먼저 너희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제안을 받아들이고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러자 시므온과 레위가 그들이 할례로 인해 가장 고통스러워할 때 그 성에 들어가 모든 남자들을 다 죽였고, 여러 형제들은 그 성의 양과 소와 나귀 등 모든 재산을 탈취했으며 심지어 아이들과 부녀자들까지 무자비하게 끌고 왔습니다. 이에 야곱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창 34:30).
야곱은 자기 아들들의 잔인함을 책망하기보다 이제 앞으로 여기서 어떻게 살겠느냐며 걱정을 했습니다. 그는 딸이 성폭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겜 사람들과 타협하며 그곳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들들이 이런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더 이상 그곳에 살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문에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이는 야곱이 하나님과의 서원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가는 노중에 벧엘 서원을 했습니다. 그 서원 내용은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평안히 아버지 집에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경배할 것이요, 또 그가 기름 부어 세운 그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며, 10분의 1을 반드시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이제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거부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형 에서와의 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마땅히 서원을 기억하고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소유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고 감사의 단을 쌓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숙곳에 집을 짓고 거기서 딸 디나가 처녀로 자랄 때까지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후 그는 세겜 땅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곳 땅의 일부를 은 100개를 주고 사서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았고 그 단의 이름을 거창하게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했습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이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잊지 않았지만 하나님과 약속한 벧엘에 가서 단을 쌓지 않고 엉뚱한 곳에 자기 중심으로 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보다 자기 유익과 편리를 따라 살기 좋은 세겜에 거처를 정했습니다. 그는 고난의 때에 나타나 보호해 주시고, 서원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만일 그가 고난의 때에 나타나 자기를 도와주시고 서원을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했다면 마땅히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중심,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나름대로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지 않으시고 긍휼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내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준을 둔 삶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기보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2. 이방 신상을 버린 야곱(창 35:1-2)
하나님은 곤경에 처한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 35:1).
하나님은 야곱에게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환란에 처해 있을 때 나타나시고 밧단아람에서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신 하나님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나름대로 거창하게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단을 쌓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인생에 함께하시고, 친히 만나주시고, 구원하신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그 은혜를 기초로 감사의 단을 쌓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를 흘리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단을 쌓아야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기 전 가족들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로 하여금 세 가지를 행하도록 했습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창 35:2).
우리가 지금까지 야곱을 살펴본 바로는 야곱이 가족들을 모아놓고 신앙교육을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야곱이 처자들을 모아놓고 신앙교육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은 아마 처음으로 가족 예배를 드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족 예배의 중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가족 예배는 자녀들이 신앙을 갖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가족 예배를 통해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유산을 물려받게 됩니다.
이방 신상을 버리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농경사회는 풍요의 신을 섬겼습니다. 그와 동시에 쾌락의 신을 섬겼습니다. 야곱의 가솔들도 하나님을 섬겼지만 그 시대의 영향을 받아 풍요의 신과 쾌락의 신을 동시에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겼습니다. 특히 라헬은 아버지가 섬기던 수호신 드라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 집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을 없애도록 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자 결단했습니다.
십계명 중 첫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입니다. 이 첫째 계명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유일하신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과 섬김을 강조합니다. 여기에서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은 다른 신들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당시 애굽에서 섬겼던 우상들, 가나안의 우상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볼 때 이스라엘은 언제든지 다른 신들을 믿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애굽 사람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보고, 느끼고, 들으며 살았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만지고, 느끼고, 보이는 모든 것들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것도 애굽의 우상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애굽의 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발진티푸스의 발병 원인인 이를 숭배했습니다. 그리고 개구리를 숭배하고, 피를 숭배하고, 파리를 숭배하고, 티끌을 숭배하고, 우박을 숭배하고, 메뚜기를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그중에서 최고의 신은 태양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염소와 황소를 숭배했습니다. 이는 성적인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은 오리시스를 섬겼습니다. 세 개의 남근을 가진 황소인 오리시스의 형상은 종교적인 행렬을 할 때 여자들이 운반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 아스다롯, 밀곰, 그리고 몰록을 섬겼습니다. 바알은 풍요의 남신이고, 아스다롯은 매혹적인 여신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와 육신의 쾌락을 가져다주는 신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틈만 나면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후 얼마 안되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듣고 보고 배운 것이 우상숭배였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그들의 무의식, 의식의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끔 “기독교는 독선적이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밖에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신들에게는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각종 신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신들에게 도덕과 윤리가 있습니까? 신들은 도덕을 부패시키고 문화를 오염시킵니다. 윌리엄 버클리는 “어떤 신을 섬기느냐에 따라 당신의 인격이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부패한 이미지를 가진 신을 섬기면 부패한 사람이 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섬기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이면 하나님이고, 재물이면 재물이지 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재물은 원어에 보면 ‘맘모나스’로, 이는 ‘단순히 물질이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신’을 말합니다.
현대인들의 강력한 우상은 돈 신입니다.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만큼 돈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돈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돈은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3장 5절을 보면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3장 4절을 보면 쾌락을 사랑할 때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기를 원한다면 물질의 탐욕과 육신의 쾌락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복음 역사보다 물질을 더 사랑할 때 순수한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욕심은 형식적인 신앙과 이중적인 생활을 하게 합니다. 또 쾌락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죄의 근원이 되고, 부패의 온상이 되며 영력을 떨어지게 하는 요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면 마음을 뺏고 부패시키는 탐심과 쾌락을 제거해야 합니다.
자신들을 정결케 하라.
야곱은 가솔들에게 자신들을 정결케 하도록 했습니다. ‘정결케 하라’는 말은 회개를 뜻합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했던 만큼 그 내면이 탐욕과 정욕으로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죄로 더러워진 모습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죄를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 죄인들을 초청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죄인들을 초청하시고 변론하자고 하십니다. 이는 이성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화를 통해 인간들이 죄를 깨우치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그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주홍 같은 죄라 할지라도 눈처럼 희어지고,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초청의 말씀입니까? 죄인들을 초청하여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 그리고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하고자 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은혜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의복을 갈아입으라.
야곱은 가솔들에게 의복을 갈아입도록 했습니다. ‘의복’은 그 사람의 인격과 품위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옷을 단정히 입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꼭 입어야 할 옷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1-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믿는 사람들은 방탕의 옷, 술 취함의 옷, 음란의 옷, 호색의 옷, 다툼의 옷 그리고 시기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믿음의 옷, 의의 옷, 겸손과 온유, 긍휼과 자비 그리고 오래 참음을 옷입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벧엘로 올라가는 야곱(창 35:3-8)
야곱은 준비를 마치자 가족들에게 벧엘로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창 35:3).
야곱은 지금까지 환난의 때에 응답하시고 가는 길에 함께하신 하나님께 단을 쌓기 위해 가솔들과 함께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하나님께 서원했던 벧엘 서원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습니다. 그는 세겜이 살기에 좋은 땅이라 생각하고 그곳에 가축우리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형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가는 노중에 만나주신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벧엘 서원을 기억했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런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자 결단했습니다. 야곱에게 이는 놀라운 결단이었습니다.
이에 야곱 권속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야곱의 결단에 큰 감동을 받고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 등을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회개했다는 구체적인 표현이요, 행동입니다. 야곱은 그것을 받아 아깝다며 일부분만 상수리나무 아래 묻은 것이 아니라 모두 다 묻었습니다(창 35:4). 그는 대대적인 집안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한 분만을 순수하게 섬기고자 결단했습니다.
여러 왕기하 18장 4절과 23장에서 히스기야 왕과 요시야 왕은 아세라 목상을 비롯하여 모든 우상을 제거하되 불태우고, 쪼개고, 부수고, 빻아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탐욕과 쾌락의 탐닉을 철저하게 제거했습니다. 우상이란 마치 누룩과 같아서 철저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상숭배는 개인은 물론 가정과 사회를 파탄시키고 국가와 민족을 붕괴시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빼앗고 부패시키는 탐심과 우상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때 내 안에 주님이 거하실 수 있습니다.
야곱은 드디어 벧엘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단을 쌓고 그곳 이름을 엘벧엘이라고 했습니다(창 35:7). 이는 벧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야곱의 첫 번째 벧엘 서원은 자기 중심의 신앙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 영광을 위한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중심이 자기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 처음 인격적으로 만나주신 모교회(mother church)를 기억하고, 그곳에서 만나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의 단을 쌓아야 합니다.
4. 야곱을 축복하신 하나님(창 35:9-15)
하나님은 야곱이 벧엘의 서원대로 단을 쌓았을 때 그를 어떻게 축복해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창 35:10-12).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속성, 내면의 변화를 인정하셨습니다. 그의 성숙한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허리에서 많은 민족과 왕들을 잉태케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민족의 조상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이 말씀을 어떻게 영접했습니까?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창 35:14-15).
야곱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영접했습니다. 야곱은 그곳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과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부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보여주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기름을 부은 것은 성결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는 표시입니다. 야곱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벧엘이라 했습니다. 벧엘에서 야곱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축복, 즉 창세기 28장 13-14절은 영접하지 않고 15절 말씀인 개인에게 주신 말씀만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축복까지 영접했습니다. 그는 이제 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5. 라헬과 이삭의 죽음과 에서의 후예(창 35:16-29, 36:1-43)
야곱이 14년 동안 사랑하여 아내로 맞이한 라헬이 난산 중에 득남을 했는데 그 이름이 베노니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를 베냐민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냐민은 야곱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고 죽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14년간 사랑하여 결혼한 라헬을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묻고 거기에 묘비를 세웠습니다. 이제 야곱은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거기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곳에 거할 때 장자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자식 많은 야곱에게는 바람이 아니라 태풍이 잘 날이 없었습니다.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살았던 헤브론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이삭은 180세에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지냈습니다.
창세기 36장은 에서의 후예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야곱은 인간성이 너무 강하여 변화되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영적인 비밀을 깨닫고 영적인 사람이 되기까지 오래 참고 키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야곱을 보호하시고, 그를 훈련하시고, 축복하셔서 믿음의 조상 중에 한 명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믿음의 3대 조상으로 키우셔서 든든한 구속역사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야곱을 키우신 하나님은 현재도 자아가 강한 사람들을 훈련하시고 키우시면서 그의 하나님이 되시고 변화된 그를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쓰시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