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창42:1-38,43:1-34,44:1-34,45:1-28,50:1-26)회개와용서:나를앞서보내셨나니
창세기 조회 수 2328 추천 수 0 2014.11.25 11:22:55제26장
창세기 42:1-38, 43:1-34, 44:1-34, 45:1-28, 50:1-26
회개와 용서 :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우리가 어떤 사건을 만날 때 우리의 짧고 좁은 소견으로 보면 그것이 시험이 되고 문제가 되지만 전체로 보면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필요한 곳으로 인도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됩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 하나님이 나에게 크신 뜻을 두시고 내 인생을 가장 완전하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실패와 좌절과 질병, 환난 등이 닥쳐올지라도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완전한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비록 실수하고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 완전한 구원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쓰라린 실패와 경험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실패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은 어떤 시련에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환난과 핍박과 고난 중에도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겪습니다. ‘모든 일’이란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좋은 일, 나쁜 일, 고난, 불행, 질병, 헤어지고 만나는 일들, 실패와 성공, 살고 죽는 일 등 살면서 당하는 모든 일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선한 뜻,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을 때 우리는 환경에 좌우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을 때 우리에게 운명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는 요셉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이 회개하고 요셉이 그들을 용서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형들의 죄 문제를 돕는 요셉(창 42:1-38, 43:1-34, 44:1-34)
풍년이 지나고 흉년이 들자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었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왔습니다. 형들은 총리가 동생 요셉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그날도 애굽의 거대한 곡식창고를 열어 인근 각지에서 몰려온 여러 민족들과 백성들에게 곡식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들처럼 보이는 10명의 사람들이 요셉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바로 그들이 형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에 요셉은 그들을 국가보안법의 누명을 씌워 간첩으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막내 동생인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복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에 형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창 42:21-22).
형들은 20년 전에 지은 죄를 기억하고 죄의식으로 괴로워했습니다. 이처럼 죄란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아야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요셉이 형들에게 복수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모양으로 형들을 훈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죄를 회개시키고자 할 때 끓어오르는 정을 억제하지 못해 안에 들어가 울고, 다시 돌아와 시므온을 인질로 잡고, 식량을 주어 보냈습니다. 시므온을 인질로 삼은 것은 시므온의 성격이 포악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시므온은 세겜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요셉은 식량자루 속에다 돈까지 넣어 보냈습니다. 도중에 이를 안 형들은 두려워 떨며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창 42:28).
사람을 돕는 일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은 죄 문제입니다. 그 죄 문제가 나와 관련되어 있을 때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보통 내 편에서 이해하고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방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마음으로 용서했다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죄를 사함받아 죄의식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그를 진정으로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와 간통하고 이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내어 죽게 했을 때 그의 죄 문제를 돕고자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죄를 회개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3일 밤낮을 하나님께 나아가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1-3).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받으시고 다윗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때 다윗은 참된 안식과 평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을 때 다윗은 그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참된 복이란 소유에 있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허물과 죄를 사함받음에 있습니다.
형들은 시므온이 애굽에 볼모로 잡혀 있었지만 곡식 속에서 돈이 나온 사건으로 인해 다시 애굽에 내려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근이 심하여 애굽으로 다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창 43:1-2).
이번에는 베냐민을 데려가야 했습니다. 유다가 이를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야곱은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한다는 유다의 말에 고통스러웠습니다. 지난번 갈 때도 혹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일부러 보내지 않았던 그였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의 자녀 중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었습니다. 야곱이 주저하자 유다가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자기 목숨을 걸고 베냐민을 반드시 데리고 돌아오겠노라 맹세했습니다(창 43:9-10).
야곱은 그 본성이 빼앗는 자요 한번 잡으면 놓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움켜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했습니다. 야곱은 마지막 남은 베냐민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했습니다(창 43:13-14). 하나님은 야곱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베냐민을 데리고 형들은 다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요셉 앞에 섰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친동생 베냐민을 보며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창 43:29)고 물었습니다. 베냐민의 얼굴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니 요셉은 그 마음이 타는 듯하여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얼른 자리를 피했습니다. 요셉은 당장 동생을 얼싸안고 형제의 정을 나누고 싶었지만 형들이 회개하고 합당한 열매를 맺기까지 감정을 억제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식량을 가지고 가는 길에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도록 관리인에게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도중 그들이 은잔을 훔쳤다고 추궁하도록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은잔을 훔쳤다는 관리인의 말에 정색을 하며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죽이고 나머지는 종을 삼아도 좋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형들이 시기심으로 동생 요셉을 판 것을 회개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였습니다. 형들이 만약 그 죄를 돌이키지 않았다면 이 순간 일제히 베냐민을 도둑이라고 몰아세우며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항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잔을 감춘 베냐민만 종을 삼겠다는 요셉에게 유다가 간청했습니다. 그는 먼저 베냐민을 집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하실지에 대해 자세히 말한 후 자신을 대신 종으로 삼고 베냐민을 풀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형들은 동생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로써 대대로 원수가 될 형제들이 견고한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를 기초로 이들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각 지파의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2. 형들을 용서하는 요셉(창 45:1-28)
요셉은 형들이 온전히 회개한 것을 보며 비로소 자신이 바로 요셉임을 밝혔습니다. 자신이 요셉이라 말하는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습니다. 요셉은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형들과 건강한 모습으로 자란 동생, 그리고 이제는 시기와 미움이 사라지고 서로 사랑하는 형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너무나 기뻐서 한참 동안 울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울다가 형들을 보니 그들의 표정이 근심과 걱정으로 창백해져 있었습니다.
요셉은 이런 형들에게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그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형들을 가까이 오도록 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4-8).
여기서 “하나님이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다”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을 형들에게 팔린 인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명 형들에게 팔려 애굽에 노예로 왔습니다. 형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인생이 형들에 의해 팔린 인생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애굽으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요셉의 고백에는 형들에 대한 분노나 복수심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신을 돈 몇 푼에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인해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요셉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상처와 아픔이 있습니다. 원망과 미움, 그리고 분노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 또 어려울 때 자신을 외면하고 비방한 사람, 자존심에 상처를 준 사람 등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는 세월이 지나가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어!” 잊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요셉을 통해 큰 은혜를 받습니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꽃다운 나이에 형들로부터 노예로 팔렸습니다. 억울하게 성추행의 누명을 쓰고 죄수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그를 도왔던 술 맡은 관원장은 그를 잊었습니다. 요셉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움과 분노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런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마음씨가 착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천성적으로 이해심이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아픔을 보상받을 만큼 출세를 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인생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로 바라보았을 때 요셉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한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나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 모든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데 쓰임받은 사람들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요셉은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고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형들을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도울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섭리로,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와 복수심에서 벗어나 화해와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3.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하나님(창 50:1-21)
야곱의 장례를 치루는 요셉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은 아버지 얼굴에 울며 입맞추었습니다(창 50:1). 어릴 때 특별한 관심과 사랑 속에 자기를 키워준 아버지, 애굽에 노예로 팔려왔을 때 자나 깨나 잊지 못했던 아버지, 그리고 20년 후에 만난 그 아버지가 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을 배웠고 믿음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깊은 사랑과 존경 속에서 애굽 국장으로 거행했습니다. 바로는 요셉의 맹세대로 그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에 바로의 모든 신하와 궁의 원로들, 애굽 땅의 모든 원로들,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 그 아버지의 집이 다 요셉과 함께 가나안에 올라갔습니다. 병거와 기병이 따라 올라갔습니다. 애굽은 국가적 차원에서 야곱의 죽음을 예우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마침내 아버지의 시신을 가져다가 막벨라 굴 매장지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로써 야곱의 인생은 막을 내렸습니다. 나그네 인생철학을 가지고 산 그는 이제 본향으로 돌아가 하나님 품에서 영원히 안식했습니다.
형들을 위로하는 요셉
아버지가 죽자 그 형제들은 요셉이 혹시 그 옛날에 노예로 팔아버린 것에 대해 복수나 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이제까지는 아버지가 있어서 요셉이 자기들에게 복수를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복수하지나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에게 말을 전했습니다.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창 50:16-17상).
이 말을 들었을 때 요셉은 울었습니다(17하). 이는 형제들이 자기의 진심을 몰라주어 섭섭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여전히 그 죄로 인해 고통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들이 안타깝고 불쌍했습니다. 그런데 형들이 와서 이번에는 요셉의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창 50:18)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요셉에게 스스로 나와 공식적으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에 요셉이 대답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창 50:19)
그는 심판에 대해 아무 권한도 없으니 안심하라고 했습니다. 심판과 정죄는 오직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심판하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랑하고 용서할 뿐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20-21).
요셉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하나님 안에서 과거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선을 생각할 때 지난날 자기가 받은 고난은 너무나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모든 것들 속에는 만민 구속역사를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며 그들이 큰 역사와 선을 이루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 편에서 모든 사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나의 모든 환난과 기쁨과 실패와 좌절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한 요소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당장에는 고난을 바라보기가 힘들지만 하나님이 나와 늘 동행하시고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을 바라볼 때 위로와 힘과 비전을 얻게 됩니다.
요셉은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라고 하며 형들을 위로했습니다. 이제 용서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까지 먹여주고, 입혀주고, 교육해주고, 필요하면 유학도 보내주고, 시집, 장가도 잘 가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용서를 확신시켜주는 말이었습니다. 또한 요셉이 그 마음에 품고 있는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요셉은 어린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사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차 이루어질 민족의 조상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역사의식을 가지고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4. 자기의 해골을 유언한 요셉(창 50:22-25)
창세기 50장 22절에는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니 이제 80년의 긴 세월이 지난 것입니다. 그동안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여전히 충성되게 살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총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흠이 없고 성실하게 그리고 능력 있게 총리직을 감당했기 때문이요, 그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애굽의 우상숭배와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애굽은 세상 보화와 쾌락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자칫 세상을 즐기고 그곳 문화에 동화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요셉은 자기 민족의 기반을 견고하게 닦아놓았습니다. 요셉은 오랜 세월 동안 총리를 하면서 자기 민족을 형성하기 위한 안전보호막을 만들고 실제 그들을 양육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죽을 때가 되자 그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창 50:24).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같이 자기 민족이 출애굽할 그날이 올 것을 믿고 또 그 후손들에게 이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맹세시켰습니다.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 50:25).
하나님이 맹세하신 땅을 바라보는 그 믿음의 유언은 장렬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묻어주길 유언하고 거기 묻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를 애굽 땅에 묻되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들을 출애굽시키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자 할 때 자기의 유골을 그 약속의 땅에 가져다 묻을 것을 유언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후 고난을 받으면서도 언젠가 요셉의 유골을 들고 출애굽할 그날이 올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실제로 후손들은 요셉이 심어준 믿음 덕분에 그의 해골을 들고 출애굽할 수 있었습니다(출 13:19).
그의 유언을 생각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장면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요셉의 유언 속에는 위대한 역사의식이 있었고, 위대한 출애굽의 비전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로써 창세기 대단원의 막이 내렸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들을 키우신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에 큰 은혜를 받습니다. 또 그들의 믿음이 우리에게 큰 본이 됨을 보게 됩니다. 이런 조상들의 믿음 속에서 요셉은 창세기의 열매로 맺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삶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늘 그와 동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늘 그와 동행하시고 함께하사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를 믿음의 거장으로 세우고 계십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원대한 구속계획을 가지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키우시는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이 믿음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지금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 하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역사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상대적 가치관 속에서 삶의 기초를 잃고 가인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여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고 하나님 자리에 썩어질 사람과 물질이 왕 노릇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창세기 말씀공부를 통해 우리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그 영원하고 선하신 주권을 받아들이고 복의 근원으로 섭리의 인생을 살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