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로마서 1:14-15
빚진 마음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2003년도에 한 부모가 아들의 카드빚을 더 이상 갚을 수 없어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카드빚 3,000만 원을 갚을 길이 없는 한 어머니가 세 명의 자녀들을 아파트에서 떨어뜨리고 자기도 투신자살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었습니다.
사람은 빚을 지면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빚에 눌려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아니, 빚을 갚지 않고 죽으면 자녀들뿐만 아니라 사촌 이내의 모든 이들에게 그 빚이 상속됩니다. 빚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롬 13:8).
본문에서 바울은 빚을 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진 빚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의 빚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빚을 갚지 않고는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빚을 갚기 위해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사랑의 빚진 마음은 어떤 수모도 이기게 합니다. 사랑의 빚진 마음은 어떤 장애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게 합니다. 사랑의 빚진 마음은 자존심을 극복하게 합니다. 사랑의 빚진 마음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하게 합니다. 사랑의 빚진 마음은 겸손하게 합니다. 사랑의 빚진 마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헌신하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와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빚진 마음으로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1. 다 내가 빚진 자라
로마서 1장 8-16절까지 ‘내’라는 단어가 14회나 반복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표현할 때는 ‘나’라는 1인칭 대명사를 쓰고, 사람들을 가리킬 때는 ‘우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속에는 나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은 우리라고 할 때 나를 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빚을 졌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이 체험한 복음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복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빚진 자의 심정으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신앙이란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요, 증인된 삶입니다. 증인은 내가 체험한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증거는 내가 직접 목격하고, 직접 경험하고, 직접 들은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증언이 아닙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합디다. 누가 말하는데,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하고 부활했다고 합디다.”
증언은 내가 직접 체험해야 할 수 있습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처럼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고 경험한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체험한 것을 내가 아무리 말해도 그것은 증언이 되지 못합니다. 단 한마디를 하더라도 내가 경험한 사건,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체험한 기도의 응답, 내가 겪은 빚진 마음, 나를 변화시킨 복음을 말할 때 힘이 있습니다. 신앙은 객관적이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직접 체험한 주관적인 고백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헬라인’은 문명인, ‘야만인’은 비문화인, ‘지혜 있는 자’는 지성인, ‘어리석은 자’는 무식한 자를 지칭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모두 빚을 졌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빚을 진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강한 의무감
빚은 강한 의무감과 필연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의무는 의무를 아는 사람에게만 의무가 되지, 의무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권리만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격을 보려면 주어진 의무를 얼마나 이행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격이 미숙한 사람은 자기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자기 권리만 주장합니다. 반면에 인격이 성숙한 사람은 자기 권리, 자기 몫을 챙기기에 앞서 자기의 의무를 먼저 행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인격이 미성숙하기 때문에 부모에게 무엇을 달라고 요구만 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커서 성숙해지면 부모에게 요구하기보다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하고,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행할 의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 또한 그러합니다. 성숙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성숙한 아내 또한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서로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피차 해야 할 의무를 행합니다. 이런 가정이야말로 건강한 가정, 행복한 가정, 물댄 동산이 됩니다.
미숙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요구만 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요구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말씀에 순종합니다. 교회에 무엇을 요구하기에 앞서 내가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 봉사합니다. 이런 성숙한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건강한 교회요,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어느 시대보다도 자기의 의무를 행하지 않고, 자기 밥그릇만을 챙기고, 자기 목소리를 너무 크게 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혼란스럽습니다. 건강한 사회는 자기 권리 못지않게 자기의 의무를 행하는 시민이 많은 사회입니다.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자신이 받은 것을 먼저 기억하고, 내가 행할 의무를 행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입니다. 이를 사회적 성숙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알았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고, 그것을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권리보다 의무를 앞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자기가 행할 의무를 앞세우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자기 권리만 주장하지 말고 자기 의무를 앞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갚아야 하는 부담감
요즘 빚을 떼먹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 빚을 받아주겠다는 광고가 붙어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빚을 지고 갚지 않으면 도둑입니다. 사람이 빚을 갚지 않으면 발을 펴고 잘 수 없습니다.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빚을 갚으라는 독촉 전화인 줄 알고 깜짝깜짝 놀라게 됩니다.
제가 전에 교회 건축 헌금을 드리기 위해 은행에 빚을 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빚으로 인한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빚은 장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빚을 갚지 않으면 그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로마 시대에는 빚을 갚지 못할 경우 일당 얼마를 계산해 노동으로 갚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갚지 못할 경우에는 노예로 팔렸습니다. 빚은 반드시 몸과 마음과 시간을 바쳐서 갚아야 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슨 빚을 진 것일까요? 사실 바울은 로마 사람들에게 빚을 진 적이 없습니다. 얼굴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빚을 졌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진 빚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의 빚이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주님의 비방자요, 폭행자요,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딤전 1:13-15). 그는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서기도 했고(행 7:58),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죄로 인해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그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고(행 9:1-9, 26:16-18; 갈 1:1; 빌 1:16), 성령께서 인을 치셨습니다(행 13:2, 22:21).
이와 같이 바울은 구원의 은혜와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부르심의 빚을 졌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이 너무 커서 일생 동안 빚진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잡힌 바 되어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갔습니다(빌 3:12).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치리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당시 노예는 주인이 맡긴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화를 당했습니다. 바울은 목숨을 걸고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탁하신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21-35절에서 일만 달란트 비유를 들어 빚을 탕감받은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을 지고 일생 동안 살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일생 동안 벌어도 갚을 수 없는 액수입니다. 설령 돈을 벌어 빚을 다 갚았다 할지라도 어려울 때 돈을 빌려주어 사업을 할 수 있었고, 그 밑천을 갚은 것이기 때문에 “돈을 다 갚았다. 이제 끝났다” 하고 외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면 장사할 수도, 돈도 벌 수도, 빚도 갚을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의 빚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는 학교와 지역사회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받은 혜택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장학금을 받은 사람들은 돈을 벌어 언젠가는 학교에 기부해야 합니다. 프랑스어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번역하면 귀인의 책임, 다른 말로 풀이한다면 ‘가진 사람의 빚 갚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랑과 은혜의 빚을 갚지 않으면 은혜와 사랑의 도둑이 됩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주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음
빚은 현재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입니다. 그리고 빚은 아무리 갚아도 보상이 없습니다.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을 때 칭찬 한 번 들어본 적 있습니까? 오히려 제때 빚을 갚지 않으면 독촉 전화를 하거나 독촉장을 보냅니다. 그리고 빚은 허구한 날 갚아도 원금이 그대로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꼭 빼앗기는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빚을 갚으며 칭찬 듣기를 원한다면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빚을 갚았는데 이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보상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빚진 마음입니다.
빚은 우리에게 청지기 자세를 갖게 합니다. 예수님은 청지기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눅 17:7-10). 어떤 사람에게 충성스러운 종이 있었습니다. 그는 새벽부터 들에 나가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배가 고프고 피곤해 쉬고 싶었습니다. 이때 주인이 식사 준비를 해놓고 “더운 날씨에 얼마나 수고했느냐?” 하며 위로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눅 17:8).
종은 아무리 열심히 일했어도 쉰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주인으로부터 섬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인이 사례하지 않는다며 피해의식에 빠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을 하고 나면 인정과 칭찬을 받고자 하는 보상심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종은 전혀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종의 위치요, 신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다 하신 후에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사실 이 종은 무익한 종이 아니라 아주 유익한 종입니다. 주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종입니다. 그러나 종은 스스로 유익한 종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7).
바울은 세 차례에 걸쳐 전도여행을 하며 많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가 남긴 업적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명을 감당한 후에 사람이나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생색을 내거나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족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바울의 위대함은 바로 종의 도리(servantship)에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2. 복음 전하기를 원하는 바울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5).
바울은 빚진 마음을 가지고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복음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원칙을 철두철미하게 지켰습니다(롬 15:20). 그런데 그는 왜 이미 복음을 들은 로마 성도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을까요?
이는 복음이 로마 성도들에게 전해졌지만 복음의 열정이 식고, 복음신앙을 상실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는 황제숭배사상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해졌지만 신앙의 골격이 튼튼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로마 성도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해 로마에 가고자 한 것입니다.
대개 신앙경력이 3년이면 무덤덤해지고, 5년이 되면 식어지고, 10년 이상이 되면 화석화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한 것은 로마에서 파송을 받아 당시 땅 끝인 서바나 선교를 하기 위해서입니다(롬 15:23). 바울은 지금까지 안디옥에서 파송을 받은 선교사로 활동을 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땅 끝 선교만큼은 로마에서 파송을 받아 로마 선교사로 활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다 빚을 졌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빚을 갚기 위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와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 모두 빚진 마음을 가지고 일생 동안 복음을 전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