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로마서 1:16
복음의 능력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한 가지 일에 전념했다는 것입니다. 코카콜라는 세계 시장에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미국 외교관이 들어가지 못한 북한에도 코카콜라가 시판되고 있습니다. 이제 코카콜라는 햄버거와 함께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코카콜라 회사가 이렇게 성장한 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사장의 꿈과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코카콜라 회사의 사훈은 이러합니다.
“온 인류의 몸속에 코카콜라가 흐르게 하자.”
그리고 사장은 “나의 몸속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코카콜라 판매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의 비전대로 세계 어느 곳에 가도 코카콜라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코카콜라 브랜드는 세계 1위로, 자그마치 그 가치가 704억 5,300만 달러(2008년 기준)입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것도 코카콜라의 영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복음에 미친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에 목숨을 걸었습니다(행 20:24). 그는 복음 전파에 미쳤습니다(고후 5:13). 본문을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복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1. 복음의 의의
복음이 무엇이기에 바울이 복음 전파에 목숨을 걸었으며 미쳤을까요? 바울은 당대 석학이었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을 섭렵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상류 사회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히브리인 중에 최고의 가문을 자랑하는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그런 그가 복음 전파에 목숨을 걸었으며 복음에 미쳤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복음이 모든 믿는 이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됩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이 복음 전파에 생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복음은 모든 믿는 이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고, 둘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εὐαγγἐλἰον)으로, 기쁜 소식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전쟁의 승전 소식을 알리는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요즘은 전쟁을 마치 스포츠를 중계하듯이 TV로 생중계하여 그 승패를 금방 알 수 있지만 옛날에는 전쟁에 관한 소식을 전령을 통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령이 승전 소식을 들고 먼 길을 몇 날 며칠 달려와서 높은 성문에 올라가 전쟁의 승리를 알렸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이겼고, 어디를 빼앗겼다가 어떻게 빼앗았으며, 몇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또 몇 명의 포로를 붙잡았으며, 전쟁의 노획물은 얼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단 한마디의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지르며 몇 시간이고 감격과 환희와 기쁨을 나누며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승리의 소식, 해방의 소식,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은 죄와 사망과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고, 율법과 심판에서의 해방과 동시에 그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생각할 때 환희와 기쁨이 심령에서 솟아났습니다.
우리는 기쁜 소식을 들으면 감격합니다. 기쁜 소식을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기쁜 소식을 들으면 그 소식을 알리고 싶어집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기에 우리가 복음을 믿게 되면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의 외모에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 비교해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얼굴에는 슬픔, 좌절, 낙망, 원망이 쓰여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믿는 이들의 깃발입니다. 우리의 깃발이 구기차를 마시고 있는 것처럼 얼굴이 구겨져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깃발은 기쁨입니다. 우리는 기쁨이라는 깃발을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2. 세상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이유
그런데 당시에는 복음을 듣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세상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합니까? 복음의 내용 때문입니다. 복음은 가난한 가운데 태어나신 한 분을 소개합니다. 그 분은 힘없이 잡히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셨습니다. 그 분은 나무에 못 박혀 수많은 군중으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복음은 가난한 삶을 살다가 십자가에 죽으신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신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았습니다.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고전 1:22-23). 헬라인들은 철학을 논하는 지성적인 사람들로, 논리적이고 사변적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어떻게 육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올 수 있고,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으며, 어떻게 죽은 사람이 부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은 귀하고 육은 쓸모없다”는 영지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또 육의 몸으로 부활하셨다고 하니 그들로서는 예수님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라는 말조차 꺼렸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은 표적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라면 표적을 나타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가장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뭐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처럼 로마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십자가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가 너무 끔찍한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사람들에게는 힘이 정의였습니다. 지혜를 대표하는 헬라 철학도 로마의 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당시에는 힘이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명분이고 진리고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힘없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하나 구원하지 못하는 힘없는 예수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그들만이 아닙니다. 음란하고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도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쉽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드러내놓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입도 뻥끗하지 못하는 벙어리 신자,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지 않는 두더지 신자로 살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복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겠다고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예수님은 재림의 때에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보시면 “나는 너를 모르겠다”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른다고 하시면 지금까지 우리의 삶은 모두 헛것이요, 끝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습니까? 복음을 부끄러워했습니까? 아니면 자랑했습니까? 혹시 두더지 신자처럼 살지는 않았습니까? 아니면 박쥐처럼 살지는 않았습니까?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 성경을 들고 다니는 것이 부끄러워 성경을 도시락처럼 신문지에 포장하여 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빨간 성경보다 색이 없는 성경을 들고 다녔습니다. 우리 중에는 지금도 저와 같이 성경을 들고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힘써 전해야 합니다.
3.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
철학자들은 저마다 구원의 문제를 제시했습니다. 독일 훔볼트 대학 현관에는 칼 마르크스의 글이 동판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세상의 철학은 세상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만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이다.”
그렇게 말한 칼 마르크스가 세상을 변화시켰고 구원했습니까? 그가 저술한 자본론은 세상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는 대중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1989년 10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게 패한 사건입니다. 물론 자본주의도 세상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2008년의 금융위기는 이를 잘 말해 줍니다. 김일성 주체사상도 인민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철학과 사상도, 이념도 세상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철학과 사상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왔고,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사상들은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추상적인 것으로는 인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율법으로도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선(禪)으로도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구원이란 매임으로부터의 풀림, 죄로부터의 해방, 죄책감과 죄의식으로부터의 놓임,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탈출, 죄의 오염으로부터의 건짐, 죽음으로부터의 벗어남, 질병에서의 치유입니다. 바울은 바로 복음에 이 구원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찾는 구원이 십자가에 있고, 헬라인들이 추구하는 지혜가 십자가에 있으며, 로마인들이 원하는 힘이 십자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복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도덕이 아닙니다. 복음은 상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철학이나 이념 또한 아닙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 속에서 구원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능력’은 사도행전 1장 8절에 기록된 ‘권능’(δύναμις)과 같은 단어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능력은 헬라어로 뒤나미스(δύναμις)로, 다이너마이트가 터질 때의 그 힘을 말합니다. 다이너마이트는 무서운 파괴력이 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길을 냅니다.
이처럼 복음에는 두 가지 능력이 있는데 하나는 죽이는 능력과 또 하나는 살리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죄를 죽입니다. 복음은 교만을 죽입니다. 복음은 위선과 거짓을 죽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영접하는 순간, 이런 죄의 속성이 사라집니다. 복음은 모든 죄악과 죄악의 속성을 죽이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복음에는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살립니다. 복음은 소망을 살립니다. 복음은 삶의 존재 가치와 존재 의미를 살립니다. 복음은 용서와 자유를 줍니다. 복음은 생의 보람을 가지고 살게 해줍니다. 복음은 병든 내면을 치료합니다. 복음은 어그러진(deformed)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reformed) 능력이 있습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새찬송가 151장).
믿는 이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
구원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납니까?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입니까?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입니까? 교회 생활을 오래 한 사람입니까? 인격이 고매하고 훌륭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구원의 능력은 믿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복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여인이 있었습니다(막 5:25-34). 그녀는 혈루증이라는 고질병을 치료받기 위해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녔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많은 의원에게 괴로움과 상처를 받았고, 있던 재산을 병원비로 모두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병이 더 중해졌습니다.
절망 중에 있던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믿음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짝 만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보시고 그녀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의심하지 않고 믿고 나오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항해하다가 큰 광풍을 만났습니다(막 4:36-41). 이때 예수님은 고물에서 편안히 주무셨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광풍 앞에 믿음을 잃어버리고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울부짖는 음성을 듣고 일어나셔서 말씀 한마디로 큰 광풍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연까지도 지배하십니다. 예수님의 광풍 앞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 4:40).
우리가 살다 보면 각종 재난과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두렵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현대 의학과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두려움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증상만 알 뿐입니다. 그러나 의심하지 않는 믿음은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의 자리로 이끕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2-23).
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죄와 죽음과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은 태산과 같은 장벽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믿음은 위대하고 큰 일을 하게 합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믿으면 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예수님이 하십니다.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을 믿으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복음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복음은 죽음을 이기고 악을 이깁니다. 복음을 믿으면 연약함과 절망이 극복됩니다. 복음을 믿으면 새 역사가 창조됩니다. 복음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하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복음을 믿으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말씀을 들으세요. 말씀을 들으세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말씀을 들으세요”(복음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