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로마서 1:18-32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회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로마서 1장 14-20절에서 바울은 ‘왜냐하면’으로 앞의 말씀과 연결시켜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묘사하며 말씀을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앞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 1:16)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한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데 당신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이에 바울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이에 바울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또 바울에게 물었습니다. “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까?” 이에 바울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기 때문입니다”(롬 1:18). 그 사람이 바울에게 또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진리를 막았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요.” 이에 바울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 속에, 또 모든 자연에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명백하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롬 1:19-20).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하고, 의롭다 하심을 받기 위해 복음을 믿어야 하고, 복음을 믿기 위해 복음을 들어야 하고, 복음을 듣기 위해 복음을 전해야 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빚진 마음으로 로마에 가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1.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
로마서 1장 18절은 로마서 본론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 본론의 첫마디를 진노의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기 이전의 인간은 죄로 죽었고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 2:3). 그래서 인간은 날 때부터 죄성(罪性)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하나님은 죄가 있는 곳에 진노를 나타내십니다. ‘나타나다’(is being revealed)의 시제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계속해서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부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 7:11).
의와 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하나님은 악과 패역을 절대로 눈감아두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죄는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우리의 능력을 가로막으며, 가정을 파탄시키고,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죄는 인간의 최대 원수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잠 14:9).
미련한 자는 죄를 가볍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죄의 파괴력과 죄가 가져다주는 심각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는 잘나가던 사람을 어느 날 갑자기 넘어지게 합니다. 죄는 쌓아놓은 명성을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합니다. 대개 죄에 넘어지는 사람들을 보면 스캔들 때문입니다. 점잖게 말해서 스캔들이지 사실 정욕과 탐심입니다. 분식회계, 차명계좌 등은 모두 탐심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두려워하고 철저하게 미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쏟으시는 죄 중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경건하지 않음’(ungodliness)입니다. 경건하지 않음은 하나님이 없다는 뜻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됨으로써 오는 죄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53:1상).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 곧 경건하지 않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먼저 진노를 나타내십니다. 그런 후에 불의(unrighteousness)에 대해 진노가 나타납니다. 불의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오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무슨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까?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들이 잘 살고 있고,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뻔뻔스럽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훼방하는 이단들이 활보하고 있고, 음란 메일을 띄우는 사악한 자들이 버젓하게 살고 있는데 무슨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말입니까? 괜히 하나님이 겁주시려고 진노가 있다고 하시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가 죄에 대해 반드시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이 직접 내리시는 진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는 죄를 지었을 때 즉시 진노를 쏟아부으셔서 그 자리에서 죽게 했습니다. 다음으로, 포기하는 진노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내버려두다’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롬 1:24, 26, 28). 이는 포기(gave up)를 뜻합니다. 포기는 하나님의 진노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돕다가 안 되면 뭐라고 합니까? “네 멋대로 해!” 하지 않습니까? 마음대로 하라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이는 부모가 자식에게 향하는 책망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폭풍전야”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 더욱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속 내버려두기만 하십니까? 아닙니다. 거기에 상응하는 또 다른 진노를 나타내십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하나님은 계속 진노를 쌓아놓으시다가 결정적일 때 쏟아부으십니다. 이는 마치 댐에 물이 가득 찰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댐에 물이 가득 찬 다음 수문을 열게 되면 무서운 힘으로 쏟아집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향해 정하신 진노의 날까지 벌을 유보한 채 쌓아두십니다. 그리고는 심판하시는데, 그 심판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로 나타납니다. 이는 마치 사정권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를 짓고 탄로가 나지 않으면 행운으로 생각하고(롬 2:16) 그 비밀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젠가 그 죄를 드러내시고 진노하십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 의기양양하거나 죄를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죄를 드러내어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2. 신성과 능력을 나타내신 하나님
바울이 하나님이 불의에 대해 진노를 쏟으신다고 하자 이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불신자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하’ 자도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제가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저를 향해 진노를 쏟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이에 대해 칼 바르트는 인간은 워낙 그 마음이 타락하고 썩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에밀 브루너는 부패했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바울은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늘 새롭게 하시기 위해 계속해서 신선한 물방울을 우리 마음에 떨어뜨려주신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게 지음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구상에 인간이 살았던 곳에는 반드시 종교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누구든지 그 마음에 하나님을 찾는 씨앗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본능적으로 어머니를 찾듯이 인간이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그리고 바울은 창세로부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드러내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다고 핑계를 댈 수 없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우주는 하나님이 만드신 영광의 피조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궁전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궁전 뜰을 거닐다 보면 이런 찬송이 저절로 나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새찬송가 79장).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를 보고 있노라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시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몸은 또 어떠합니까? 우리 신체의 신비를 볼 때 얼마나 놀라운지요? 인공 관절은 그 수명이 길어야 15년이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관절은 영구적입니다. 또한 임신 사실을 모르고 먹은 약은 태아에게 전혀 영향이 없지만 임신 사실을 알고도 약을 먹으면 그 약이 태아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임신한 사실을 모르고 먹은 약에 대해서는 인간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십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놀라운 솜씨로 아름답게 꾸며놓은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갖고 주위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무신자(無神者)는 없고, 오직 불신자(不信者)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루이스는 “무신론이란 언어로는 가능하지만 그 주장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벌고프는 “인간은 치료 불가능한 종교적 존재”라고 했습니다. 신을 전제하지 않은 인간의 문화나 역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무신론은 논리적으로 입증이 안 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고의로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사람은 죄를 지을 때 모르고 짓는 경우도 있고, 반면에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사람이 모르고 죄를 짓는 경우에는 구제받을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도 죄를 지을 경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를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정상참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의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고 말했습니다(롬 1:18). 여기에서 ‘막는다’는 것은 고의적으로 막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에 대한 답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고전 10:31; 롬 11:36; 시 73:25-28),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딤후 3:16; 엡 2:20; 요일 1:3-4).”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에 대한 표현은 주야로 말씀 묵상과 율법을 즐거워하고 기도를 즐거이 하는 것입니다(시 1:2-3).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 이 세상 근심 걱정에 얽매인 나를 부르사 내 진정 소원 주 앞에 낱낱이 바로 아뢰어 큰 불행당해 슬플 때 나 위로받게 하시네”(새찬송가 364장).
2.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의 모습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광내기를 좋아하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러면서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로마서 1장 21하-23절을 보면 생각이 허망해집니다. 마음은 지정의의 근원이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좌소(座所)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근원, 하나님의 좌소가 어두우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지혜롭다고 변명합니다. 하지만 결국 어리석은 자가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의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우상 숭배의 원인은 욕망입니다(롬 1:24-25). 우상은 자신의 욕망을 형상화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는 인간의 본능과 맞아떨어집니다. 우상은 우리의 본능과 충돌하지 않고 죄를 정당화합니다. 인간의 본능에는 음행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비너스 신을 만들어 그 신의 이름으로 음행합니다. 인간의 본능에는 돈을 추구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풍요의 신인 바알을 만들어 탐욕을 즐깁니다. 우상숭배는 회개가 없고, 죄를 정당화하고, 결국 성적인 타락을 초래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떠나면 백이면 백 모두 우상에 빠지고, 그 다음에 성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성적 타락의 극치는 동성애입니다. 여인들이 순리를 바꾸어 역리로 쓰고, 남자가 여인 쓰기를 거절하고 서로를 향해 음욕이 불 일듯 일어납니다(롬 1:26-27).
미국은 1970년대까지는 동성애를 성 장애(sexual disorder)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2000년에 발행한 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DSM-Ⅳ-R)부터 동성애를 장애로 보지 않았습니다. 현재 미국은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성애를 가리켜 하나님의 진노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들의 결국은 하나님의 상당한 보응을 받게 됩니다. 성적인 타락으로 행복의 요람인 가정이 파괴되고, 자녀들이 일탈하고, 사회 전체가 병듭니다.
학자들은 로마의 멸망 원인을 성적인 타락에서 찾습니다.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로 멸망한 폼페이의 유적 가운데 동성 간에 성행위를 하다가 죽은 화석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성적 타락의 극치는 동성애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동성애를 가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레 18:22). 그리고 가증한 일을 행했으므로 반드시 죽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성의 기능은 출산과 쾌락, 그리고 사랑입니다. 이중 하나라도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건강한 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동성애는 출산이 없고 인격적인 사랑도 없습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574명의 백인 게이 남성 가운데 84%가 50명에서 100명 정도의 파트너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동성애는 출산도, 사랑도 없는 오직 쾌락만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한 사회는 21가지의 죄들로 가득합니다(롬 1:29-32).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불의, 추악, 탐욕, 악의로 가득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시기, 살인, 분쟁, 악독이 가득합니다. 입만 열면 수군거리고, 비방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능욕하고, 교만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배신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우매하고, 배약합니다. 돈 몇 푼 때문에 신의와 믿음을 저버립니다. 무정하고 무자비합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 줄을 알면서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이 옳다며 합리화합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생각합니다(롬 1:32).
이처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은 죄로 뒤덮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쏟아부으십니다. 그러면 인간은 영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은 우리에게 쏟을 진노를 예수님께 쏟으셨고, 예수님은 그 진노를 다 받으셨습니다. 인간이 진노를 피하려면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 앞으로 나가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후로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때로는 사랑의 매로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십니다.
하나님은 불의와 경건치 않음에 진노를 쏟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위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잘 되는 사람들을 보며 마치 복 받은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봐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가치관을 바꿔야 합니다. 그들의 실체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눈으로 보는 것처럼 느끼고 십자가의 우산 아래 들어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모든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새찬송가 25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