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로마서 3:9-18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는 세상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인간은 어떤 심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입니까? 맹자는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 속에 있는 것들을 잘 이끌어주기만 하면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또 그런 사람들로 구성되면 아름다운 사회가 된다는 ‘성선설’을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순자는 인간은 천성적으로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전혀 희망을 가질 수 없고, 오직 교육과 훈련을 통해 개선될 수 있다는 ‘성악설’을 설파했습니다.
동양의 이런 상반된 사상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는 에밀이라는 교육 소설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서 떠날 때는 선하지만, 인간의 손으로 넘어오는 순간 악해진다고 보았습니다. 본래 인간은 선한데 환경이 악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스콜라 철학은 인간은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교육과 철학과 경건 훈련을 통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고 있습니까?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성경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인간이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죄로 시작해, 죄로 말미암고, 죄로 끝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고,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했습니다. 바울 또한 본문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롬 3:9).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모두 다 죄인인데, 두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고 시인하는 죄인과, 또 하나는 나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어떻게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죄 아래에 있는 인간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하).
유대인과 헬라인은 모든 인류의 통칭입니다. 이는 서구 사상을 인본주의를 대표하는 헬레니즘과 신본주의를 대표하는 헤브라이즘으로 대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 아래에 있다”는 말씀에서 ‘죄’는 복수인 죄(sins)가 아니고 단수인 죄(sin)입니다. 우리말은 죄(sin)나 죄들(sins)이나 똑같지만 헬라어는 단수로 쓰느냐, 복수로 쓰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달라집니다.
죄가 복수로 쓰일 때는 우리가 흔히 짓는 잘못된 것들을 말합니다. 반면에 단수로 쓰일 때는 보이지 않는 실체, 힘을 가리킵니다. 이는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 사탄, 마귀, 악령으로 비유됩니다.
또한 “죄 아래에 있다”는 말씀에서 ‘아래’는 헬라어의 전치사 휘포(ὑπὸ)로, ‘밑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무엇으로부터 지배당하고 있다는 의미로, 그 무엇에 소속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단어는 디모데전서 6장 1절의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이라는 말씀에서 ‘아래’와 같은 것으로, 멍에, 사슬에 묶여 있는, 죄의 손아귀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죄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죄는 힘과 권세가 있는 실체입니다.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하).
바울은 죄가 자신을 끌고 가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죄는 바울을 붙들어 노예로 만들고는 질질 끌고 갔습니다. 바울은 죄의 실체를 몸으로 느꼈습니다. 죄의 힘이 얼마나 센지 피부로 느꼈습니다.
이처럼 죄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한번 죄에 붙들리게 되면 자신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는 마치 강력접착제와 같아서 절대로 놓아주지 않습니다. 죄에 한번 붙들리게 되면 자기의 뜻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죄가 원하는 대로, 죄의 의지대로 끌려가게 됩니다. 죄의 세력에 붙들리면 절대로 헤어날 수 없고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박에 손을 댔습니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도박중독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박의 세력, 도박의 힘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점점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후회한 그는 이제 도박을 절대로 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비장한 각오로 도끼로 자기 손가락을 다 잘랐습니다. 대단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심도 한순간,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도박판에 가서 발가락으로 도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의 모습이요, 죄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대변해 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우리는 죄의 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죄의 힘은 무섭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죄의 세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의 심각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죄를 짓습니다. 아니, 오히려 죄를 즐길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커피 마시듯이 즐깁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면 죄를 짓는 그 순간 죄의 노예가 되어 영원한 파멸에 이릅니다. 이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이보다 더 큰 어떤 세력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인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크게 두 종류의 인간으로 대별합니다. 죄 아래에 있는 사람과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이 얼마나 착한가, 얼마나 선을 많이 행했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이 죄 아래에 있는가, 아니면 은혜 아래에 있는가를 묻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나라에 소속되어 있는가, 즉 죄가 다스리는 나라에 속해 있는가, 아니면 은혜가 다스리는 나라에 속해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외국에서 입국심사를 할 때 “저 사람은 돈이 많은가? 저 사람의 직업은 무엇인가? 저 사람의 키는 얼마이고, 몸매는 어떠한가?” 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단지 “저 사람은 내국인인가, 외국인인가?”를 구분할 따름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 나라 사람인가, 아니면 죄가 지배하는 나라 사람인가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죄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율법의 지배를 받아 사망에 이릅니다. 반면에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은 성령의 지배를 받아 영생과 의와 사랑과 평강에 이릅니다.
2. 죄 아래에 있는 인간들의 모습
부패한 사상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바울은 의인은 한 명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의인’이란 사상과 생활에 있어서 정직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는 곧 율법에 있어서 어떤 흠도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을 뜻합니다.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자 하는 데 모두 실패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에녹도, 노아도 모두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의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 중에 “나는 의인입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하는 한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는 모든 율법을 다 지켰기 때문에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자랑한 이야기가 나옵니다(마 19:20). 그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그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영생을 얻는 길을 알게 되었지만 자신이 소유한 많은 재물로 인해 근심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신만만했지만 하나님과 이웃보다 물질을 더 사랑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습니다(마 19:22). 세상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죄를 깨닫는 자도 없습니다(롬 3:11). ‘깨닫는 자도 없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만 있다는 뜻입니다. 죄는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총명을 어둡게 합니다(엡 4:18).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시 14:1).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아무 인식과 느낌이 없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습니다. 부패해진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거룩한 존재였습니다(창 1:27). 그런데 죄를 범한 이후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는 마치 새가 날개가 부러져 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의 왕자 독수리라 할지라도 날개가 부러지면 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부패하다는 사실은 잠재의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도 어떤 위기가 닥치면 자기를 통제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그렇게도 착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우리도 스스로 알 수 없는 행동을 한 뒤 후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타락한 본성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합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평소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세에게 잘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 즉 배고픔과 목마름의 문제가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지도자 모세를 대적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무능하다는 사실과 자기에게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람이 어느 정도 무지하냐 하면 하나님을 깨닫지도 못하고 찾지도 않습니다(롬 3:11).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 4:29).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그런데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전심전력을 다해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찾을 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롬 3:12),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렘 17:9).
여성들은 매일 거울을 보며 얼굴을 가꿉니다. 이것은 여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얼굴은 스스로 가꿀 수 있지만 마음은 그럴 수 없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말들, 독사와 같은 저주, 탐욕, 음욕, 시기, 미움, 질투 등은 그 무엇으로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죄 아래에 있는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부패한 언어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롬 3:13-14).
히브리인들은 목구멍, 혀, 입술, 입을 마음으로 통하는 통로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가슴에 ‘마음’(καρδι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통하는 통로가 모두 썩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죄를 짓는 도구이고,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무덤이 열렸으니 입을 열어 말을 했다 하면 악취가 납니다.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습니다.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는다’는 것은 헬라어 원어로, 혀가 매우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말은 달콤한 꿀과 같지만 그 속에는 독이 있어 사람을 죽입니다. 각종 매스컴에 등장하는 광고를 보십시오. 얼마나 달콤한 말로 우리를 유혹합니까? 그러나 그 뒤에는 무서운 독이 서려 있고 유혹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아름다운 장미꽃 속에 가시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더러운 행동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 3:15).
발은 피를 흘리는 데 빠릅니다. 이것은 진짜 피를 흘리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향해 해를 끼치는 모든 삶은 다 이에 속합니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너와 나’의 관계는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먼저, 서로 경쟁관계를 갖습니다. 그리고 모두 자기 유익을 추구하며, 약육강식이 지배합니다. 승자는 한 사람뿐이기 때문에 패자는 늘 복수하고자 하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자기 욕심만 챙기니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절망적인 모습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6-18).
우리의 삶은 길어야 80-90년입니다. 이후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죽음과 심판입니다(히 9:27; 계 21:8).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가는 길 끝에 죽음과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정신없이 달려갑니다. 여기에 평강이 있을 리 없습니다. 오직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존 헨리 조웨트 목사는 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죄는 파괴적인 존재다.”
죄는 우리의 몸과 인격과 마음과 양심, 그리고 영혼을 파괴합니다. 인간관계, 심지어 우리의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까지도 파괴하여 못쓰게 합니다. 죄는 시각을 손상시켜 분별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죄는 청각을 마비시켜 귀머거리로 만들어 진리를 듣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촉각을 혼돈하게 하여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죄는 사람을 흉하게 만듭니다. 죄는 은혜로운 얼굴을 일그러지게 합니다. 죄는 사람을 어두운 곳으로 이끌고 갑니다. 죄는 어두운 음악과 어두운 생각을 좋아하게 합니다. 죄는 옷도 어둡게 입게 하고, 삶도 어둡게 합니다. 죄는 사람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앗아갑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 보기를 꺼리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발견되는 것을 싫어하게 합니다. 죄는 처음에는 심한 죄의식을 가져다주지만 나중에는 죄의식조차도 없게 합니다. 특히 죄가 문화를 형성하게 되면 죄 짓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죄를 자랑하게 됩니다. 죄는 거룩하고 순결하게 사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무엇보다도 죄는 피를 요구합니다(히 9:22).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뜻합니다(레 17:11). 피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피는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줍니다. 피가 부족한 사람은 빈혈로 쓰러지게 되고, 피가 깨끗하지 못한 사람은 동맥경화증으로 죽게 됩니다. 그리고 피가 통하지 않으면 세포가 썩습니다. 피는 병균과 싸워 이기는 방패 역할을 합니다. 이 피는 골수에서 만들어집니다. 피는 인공으로 만들 수 없고,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죄는 지독하여 피를 흘리지 않으면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히 9:22).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피는 불완전하여 일시적으로 정결하게 할 뿐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보내셨습니다(요 1:29).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짐승의 피와 달라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습니다(히 9:12).
예수님의 피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악된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아무리 추한 죄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를 마음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이 그 죄를 사해 주십니다(롬 3:25). 예수님의 피가 우리 마음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피는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역사해 죄로 병든 마음, 삐뚤어진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을 치료해 소생시켜줍니다. 예수님의 피는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죄로부터 보호해 주고,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내적 힘을 공급해 줍니다.
모든 인류는 죄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죄는 피, 즉 생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구원의 피, 생명의 피, 은총의 피, 능력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심장에서 힘차게 솟구칠 때 죄 사함의 은혜가 넘칩니다. 죄의 파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헌신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의 역사를 섬기게 됩니다.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속하셨으니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널 넘어서 가리라”(새찬송가 26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