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로마서 3:19-26
의롭게 되는 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지금까지 하나님이 없는 세상, 구원이 없는 세상, 죄 아래에 있는 세상, 하나님의 의가 없는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율법 아래에 있는 어두움과 탄식을 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인간들의 곤고함과 환난을 보았습니다(롬 1:18-3:18).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이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원대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통한 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율법을 지키지 못해 구원을 얻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율법을 폐기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그대로 놓고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길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베푸신 값없는 은혜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의 의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율법의 행위’는 구원을 얻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포함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자 하는 것, 도덕주의자들이 양심대로 살아 의에 이르고자 하는 것, 그리고 선행이나 업적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 모두 이에 해당됩니다.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행위와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데 모두 실패했습니다. 노력하면 할수록 의에 이를 수 없어 깊은 절망감에 빠져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는 자기 노력이나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애쓴 모든 사람들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행위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일생 동안 캄캄한 죄의 동굴 속에서 살다가 죽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여기에서 ‘이제는’이란 ‘그러나 이제는’(but now, KJV)을 뜻합니다. 하나의 큰 전환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아래에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놀라운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죄의식과 정죄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용서와 이해와 사랑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무서운 심판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행해야만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믿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딱딱한 구약의 율법의 시대가 가고, 신약의 은혜의 시대가 임했습니다. 옛 언약이 폐기되고 새 언약의 은총의 시대가 임했습니다. 율법의 세계에서 은혜의 세계로, 어두움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바뀌었습니다.
이 전환은 율법의 세계에서 뼈아픈 고통을 체험한 자에게 임하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이는 은총의 세계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알 수 없다.”
19세기의 위대한 전도자들은 모두 십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 없이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이 놀라운 전환은 한 개인의 생애뿐 아니라 인류 역사를 주전(B.C.)과 주후(A.D.)로 가르는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에서 ‘율법 외에’란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역사가 전개된다는 뜻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이 있기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율법이 모세 시대에 주어진 것이라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계시되었습니다(창 3:15).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 때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습니다.
율법을 통한 의는 행위로 인한 의이지만,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상관없지만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성경을 통해 증거를 받았습니다(요 5:39). 하나님의 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므로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생각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것인데, 구약성경에 감추어져 있다가 신약성경에서 드러난 것입니다(롬 16:25-26).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타나서’는 현재시제로,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나타나는 의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로마서 3장 21절,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에서는 과거완료 시제로,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죽으심의 영속성을 가리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이방인, 유대인, 인종, 신분, 빈부, 귀천, 민족을 막론하고 차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범하는 데 있어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이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핸드리 모울 목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창녀나 거짓말쟁이, 그리고 살인자들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지옥의 제일 밑바닥에 있고, 당신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을지 모르지만 당신이나 그들이나 별에 손이 닿을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납니까? 바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범하였다’의 시제는 과거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죄는 아담의 죄와 함께 자기 자신이 지은 죄, 자범죄를 포함한 모든 죄를 말합니다. ‘죄’란 화살이 표적에서 빗나갔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목적에서 빗나간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란 하나님의 수준에 미달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르지 못하더니’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이는 아담이 지은 죄가 현재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창 1:31). 하나님은 인간을 동물과 달리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차원 높은 고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하나님 앞에서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모습으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린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죽음과 질병으로 인해 끊임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시기 위해 놀라운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를 “의롭다 하심”, “속량하심”, “화목제물”, “예수님의 피”로 설명하였습니다.
의롭다 하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의롭다’란 법률용어로서 죄 없다고 인정받았다, 형벌에서 사면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죄 없다고 선언하시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입니다.
‘은혜’란 기쁨, 기쁨을 일으키는 것, 기쁨을 준다는 뜻입니다. 은혜는 복음을 요약한 단어입니다. 은혜는 신약성경에 155회 나오는데, 그중에 100회 이상을 바울이 사용했고, 로마서에서만 24회 나옵니다. 또한 ‘값없다’란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죄가 너무 추하고 더러워 어느 정도 씻은 후에 나오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죄를 씻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나의 의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이 주홍같이 붉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사실을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옭아맸던 죄와 죄의식의 사슬이 풀려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강도는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께 염치없이 부탁을 드렸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그러자 예수님은 그를 영접하셨고, 즉시 낙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그런데 이 은혜는 한 번만 주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being justified, KJV)는 현재분사로 언제나, 항상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계속적으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언제나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해 죄에 빠지고 유혹에 넘어집니다. 어떤 때는 의롭게 살고자 결심하지만 작심삼일이 됩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불의에 빠집니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불신과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반복해서 죄를 지을지라도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언제나 의롭다 해주십니다. 하루에 일흔 번씩 일곱 번 죄를 지을지라도 믿음으로 나아가 진실하게 회개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요일 1:9).
속량하심
죄인이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인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속량’이란 당시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한 단어입니다. 노예는 스스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고 누군가 몸값을 지불해야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속량이라는 단어를 통해 인간이 노예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인간은 죄의 종이 되어 죄가 시키는 대로 하며 살아갑니다. 정욕과 탐욕, 그리고 시기심과 미움, 교만 등 각종 죄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정욕과 탐욕에 무릎을 꿇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원하지 않게 무릎을 꿇고 맙니다. 또 우리는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워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의 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 번 죄의 사슬에 묶이면 스스로 풀 수 없습니다. 이 강한 죄의 올가미에서 풀려나려면 이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기는 속량의 도리를 잘 설명해 줍니다. 인간은 마치 애굽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형편과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강한 왕 바로의 지배 아래 신음했습니다. 바로 왕 아래에 있는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노예라고 해서 꼭 비참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고기 가마 곁에서 맛있는 고기 국물을 얻어먹어 살이 쪘습니다. 수박과 마늘 그리고 후추를 먹어 원기가 왕성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여가를 이용해 나일강으로 휴가도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들은 바로 왕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자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기 위해 구원자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희생의 피로 바로 왕의 지배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습니다.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려면 반드시 몸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 몸값이 어린 양의 피였습니다.
죄는 피, 즉 생명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피가 나를 죄의 사슬에서 풀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속량된 것은 은과 금같이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인함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신, 즉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결과입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주님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저 십자가는 나를 위한 것이다. 내가 저기에 달려야 하는데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달리셨다”고 고백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화목제물이 되심
하나님은 죄 아래에 있는 죄인들을 어떻게 속량하셨습니까? 화목제물이 되셔서 속량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상).
‘화목제물’은 구약의 제사 제도를 배경으로 한 단어입니다. 이는 성전의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의 금 뚜껑인 속죄소에 드려지는 제물을 뜻합니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짐승을 잡아 속죄소에 그 피를 뿌렸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 9:22). 그러나 짐승의 피는 일시적이고 그 효력도 제한적이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습니다(히 7:27-28, 10:4). 이는 장차 올 온전한 것의 모양과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히 8:5).
하나님은 마침내 죄인들과 화목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삼으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요 1:29). 예수님은 피를 흘리심으로 단번에 온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히 9:12). 이제는 더 이상 번거로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10:19).
예수님의 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상).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피, 즉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인간 모두를 만족시켜 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예수님께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시키심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보신 후 인간을 향한 진노를 그치시고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피는 죄를 사해 줍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피도 일시적으로는 정결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흠도 점도 없으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없겠습니까?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새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3-14).
셋째, 예수님의 피는 거룩함을 사모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변화된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죄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사모하는 이유는 우리의 피가 더럽기 때문입니다. 피가 깨끗하지 못하면 외부의 병균과 싸울 수 없습니다. 반면에 피가 깨끗하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생명을 살아나게 하고 죄와 싸울 힘을 줍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의 소욕을 이기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거룩한 삶을 살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은혜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이는 마치 심장에서 피가 솟구칠 때 우리가 힘찬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려 하심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하-26).
화목제물이 필요한 이유는 먼저 하나님의 의를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가 세워져야 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공의와 사랑은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충족되었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죄를 미워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믿음으로써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이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새찬송가 25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