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로마서 3:27-31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 3:27).
저는 몇 년 전 성탄절에 교도소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단체와 함께 위문품을 전달하기 위해 교도소를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일단 교도소에 들어가면 과거에 대통령이었든, 장관이었든 어떤 위치에 있었든 상관없이 모두 똑같은 푸른 수의를 입습니다. 그런데 만약 수의를 입은 죄인이 교도관 앞에서 “과거에 내가 대통령이었다. 장관이었다” 하고 위세를 부리며 자기를 변명하고 자기를 자랑한다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푸른 수의를 입은 죄인들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푸른 수의를 입은 죄수임을 인정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거드름을 피우며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하십니다. 스펄전 목사는 교만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죄는 손가락으로 다루시지만 교만은 팔을 걷어붙이고 대적하신다. 탐심에 대해서 무거운 심판을 내리신다. 그러나 교만에 대해서는 열 배로 더 무거운 심판을 내리신다.”
로마서를 읽어 보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자랑거리를 들고 나가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은 믿음이 자라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게 합니다.
본문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자랑할 때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는 인간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7-28).
여기에서 ‘법’이란 법조문이 아니라 원리, 또는 체계를 뜻합니다. 바꾸어 말해 “행위의 원리로냐, 아니면 믿음의 원리로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랑’이라는 단어는 바울 서신에만 35회 나옵니다. 이는 가슴 벅찬 기쁨,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의 자랑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유대인만큼 자기를 자랑하는 민족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바리새인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 18:11-12).
신자라면 누구나 토색, 불의, 간음을 해서는 안 되고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자랑할 것이 아니라 신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단지 평범한 신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저는 간음하지 않고, 토색하지 않고, 불의를 행하지 않고, 십일조를 드립니다” 하고 자랑했습니다. 과거에 바울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4-6).
바울은 할례를 자랑하고, 선민임을 자랑하고, 왕의 후손임을 자랑하고, 순수 혈통임을 자랑하고, 경건함을 자랑하고, 유대교에 충성했음을 자랑하고, 완전주의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석학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런 바울이 변화되어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당시 십자가는 부끄러움의 상징이요, 낮아짐의 상징이요, 고난의 상징이요,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자 갈라디아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자 슬픔에 빠졌던 사람이 기쁨을, 절망에 빠졌던 사람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십자가는 능력과 생명과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는 원동력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십자가는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고,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입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유대인만이 아닙니다. 우리도 자신을 자랑합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한 형제가 어느 날 제게 와서 조그만 선물을 보여주며 자랑했습니다. 제가 볼 때 그 선물은 별것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형제는 그것을 대단하게 여겼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했더니 약혼자가 준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약혼자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사실 값으로 따지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것을 선물한 사랑에 고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것은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최고의 자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일순간 없어질 것들을 자랑합니다. 남의 콧대를 꺾고 자기의 콧대를 세우기 위해 자기를 자랑합니다. 자신의 건강을 자랑하고, 명예를 자랑하고, 외모를 자랑하고, 학벌을 자랑하고, 돈을 자랑합니다. 자기 지위를 자랑하고, 타고 다니는 차를 자랑하고, 옷을 자랑합니다.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사람조차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서양 금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쇠는 아무리 갈아도 금이 되지 않는다.”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면 할수록 금이 나오기는커녕 추한 녹물만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 속담에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행주가 될 수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걸레일 뿐, 그 본질이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나는 방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나는 능력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하고 자랑합니다. ‘은사’란 말 그대로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선물을 자랑합니다. 또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자랑합니다. 한때 저 또한 믿음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믿음도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믿음은 구원의 통로, 구원의 매개체, 하나님의 의와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통로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은 구원의 도구, 채널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믿음은 내 의지와 내 뜻과 내 노력과 내 원대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저는 한 형제가 예수님을 믿고자 애를 썼지만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한 형제는 방언의 은사를 받고자 몸부림을 쳤지만 받지 못했습니다. 방언도 하나님이 주셔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 내게 은사를 주신 하나님을 자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주님을 자랑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성경은 지혜로운 자도, 용사도, 부자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과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는 주님을 아는 것이 명철이므로 이것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우리는 명예, 성공, 부귀영화를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경건한 생활을 좀 한다고, 헌금을 좀 한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랑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잠 16:18).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우리에게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아신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자랑치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단순히 믿는 것으로 끝나면 그런 믿음은 귀신의 믿음에 불과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신뢰, 위임, 복종, 자기 포기를 수반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신뢰하면 안심하고 모든 것을 위임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신뢰하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모든 것을 그에게 맡깁니다. 남편은 아내를 신뢰하기 때문에 아내에게 저금통장과 인감을 맡기며 동거동재(同居同財)합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만사형통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복종하고 위임하고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주님을 따르려면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기의 이상, 자기 생각,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적 찬성만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사람은 절대로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네게 실망했어!”라고 말합니다. 이는 맞는 말입니다. 사람은 믿는 만큼 실망시킵니다.
저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람을 믿는 만큼 실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하고 믿었던 사람, 사랑을 많이 베풀고 기도를 많이 해주었던 사람이 가장 먼저 저를 실망시켰습니다. 그때 얼마나 섭섭하고 속상하고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저런 일을 경험하면서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 섬김의 대상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믿음의 대상, 신뢰의 대상이 되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구원자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자랑이십니다. 주님을 나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이방인의 하나님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 3:29-30).
하나님은 인간이 자랑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다 배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외에는 그 어떤 구원의 길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선한 자나 악한 자를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의 대상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도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원하시는 방법이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믿음만을 보시고 구원하십니다. 죄인이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다원주의의 영향을 받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라고 생각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이요, 도그마(dogma)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중보자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참선이나 예배 의식, 은사 등은 구원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가 되십니다.
모든 의를 배제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율법을 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렇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예수님은 도리어 하나님의 의가 율법을 완전하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7). 율법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이유는 칭찬받고자 함이 아닙니다.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보상을 받기 위함도 아닙니다. 또한 선행을 통해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선행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선행은 구원을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에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결과로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에 은혜와 감사를 더하면 더욱더 사랑과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 자신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을 자랑할 때마다 드러난 것은 자신의 추한 모습뿐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자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새찬송가 216장 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