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로마서 5:1-11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바울은 지금까지 복음의 능력(롬 1:1-17), 복음의 필요성(롬 1:18-3:20), 구원의 방법(롬 3:21-31),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아브라함의 예(롬 4:1-25)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구원의 확신과 결과에 대해 말합니다.
본문을 보면 인칭대명사의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1장에서는 자기 자신을 ‘나’,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들을 ‘그들’, 유대인들을 ‘너’라고 칭했습니다. 그런데 5장부터는 1인칭 대명사가 복수인 ‘우리’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에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라는 새로운 공동체, 즉 교회를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에게 임하는 결과와 확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의 확신과 복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첫 번째 복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 진노의 관계에 있었습니다(엡 2:3). 우리의 이름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엡 4:18). 그래서 마음에 기쁨과 행복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마음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내면은 괴로움이 가득했습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 단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어둡고 부정적이며 허무에 시달렸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불화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참선을 해보기도 하고, 스포츠에 열중해 보기도 합니다. 무엇인가에 집중해 보기도 합니다. 술을 마시고 춤을 춰보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는 잠시 잊은 듯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이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처럼 평화는 돈을 주고 살 수 없고, 노력으로 얻을 수도 없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좋은 침대는 돈으로 살 수 있지만 단잠은 돈으로 살 수 없다.”
‘평화’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평화는 주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요 16:33).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으로, 하나님과의 화목, 이웃과의 화목, 자기 자신과의 화목을 뜻합니다. ‘누리자’란 ‘누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평화는 신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입니다.
평화를 누리려면 평화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소중하고 귀한 것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면 누릴 수가 없습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면 가정에서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밖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평화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 흘리심이라는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신 고귀하고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고 우리의 삶 속에서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커피를 즐겨 마시듯이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과의 평화를 즐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즐길 때 어떤 경우든, 어떤 사람이든 용서할 수 있고 거북한 말도 소화해 낼 수 있습니다.
평화의 반대는 불화와 분노입니다. 마음에 분노와 불화를 품게 되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분노는 사람의 피를 말립니다. 영혼을 말라 죽게 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은 삶의 안식처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정에 불화가 생기면 자녀들은 가정이 지옥처럼 느껴져 들어가기 싫어하게 됩니다. 부부간에 불화가 지속되면 가정이 깨지고 자녀들은 탈선하게 됩니다.
분노는 모든 화병의 근원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평화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도 낫지 않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불화하여 서로를 원망하는 가정,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화약고를 메고 불 섶에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불화, 이것은 국가 경제와 안위를 망치는 원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즐기는 사람은 비록 환경은 달라진 것이 없지만 두려움이 평안으로 바뀝니다. 내면에 시와 찬미가 넘칩니다. 화평은 능력을 생산하고, 평안은 지혜를 생산합니다. 화평은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합니다. 화평에 미래가 있고 약속이 있습니다. 화평은 소망을 눈앞에 다가서게 하고 병도 절로 낫게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다가 친구와 멱살을 잡고 싸웠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그림을 그리려 하니 도저히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예수님의 형상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이 재주 있는 손을 가졌다고 동물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고도로 발달한 두뇌를 가졌다고 해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의 화평이 없을 때 예술가가 될 수 없고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다.”
화해에 창작이 있습니다. 화해에 아름다운 예술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안을 적극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새찬송가 412장).
은혜 안으로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롬 5:2상).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란 이미 들어갔고, 또 계속해서 확고하게 서 있는, 반복해서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은혜의 세계의 반대는 율법의 세계입니다. 율법은 자신과 이웃에게 완전한 행위를 요구합니다. 율법의 세계는 아무리 잘하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어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우거지상을 쓰게 됩니다. 자학하고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율법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정죄하고 잘라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늘 긴장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은혜의 세계는 이해와 사랑, 그리고 용서입니다. 은혜의 세계는 속죄소를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속죄소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가장 먼저 일어난 사건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았던 휘장이 찢어진 것이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휘장으로 인해 속죄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휘장이 찢어져 새롭고 산 길이 열림으로 이제 누구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 나가 주님께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와 찬양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허물과 실수가 많지만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덧입어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즐거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하).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이는 믿는 자들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여러 가지 희망을 붙들고 삽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 희망, 권세를 잡아 세상을 한번 다스려보고 싶은 희망,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나가 복음을 전하고 싶은 희망, 교수가 되고 싶은 희망, 나눔과 봉사를 통해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은 희망,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싶은 희망 등 다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직업의 선택 사항일 뿐입니다. 이는 우리의 궁극적이고 참된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성취된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행복지수가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또한 죽음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립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산 소망입니다(벧전 1:3-4).
신자들은 이러한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즐거워하다’란 기뻐 어쩔 줄 몰라 환호를 지르는 기쁨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 보기를 즐거워하며 바라며 살아갑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
‘환난’이란 시련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환난을 당하면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고사를 연상하며 참고 견딥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들은 환난 중에 참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즐거워합니다. ‘즐거워하다’란 너무 좋아서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환난이 주는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당하게 되는 고통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게 되는 모든 고통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세상 사람이 당하는 고통을 모두 겪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교통사고를 당할 수 있고, 불치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한 가지 더 큰 고통을 당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의 원리가 아닌 성경의 원리대로 살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에서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인간이 고통받을 때의 모습을 묘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히 12:11상).
고난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서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은 고난을 즐거워합니다. 이는 고난을 통해 얻게 되는 부가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 부가가치란 무엇일까요? 환난을 겪는 동안 인내를 배우게 되고, 인내를 통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세상으로 향하던 마음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소망으로 바꾸어지게 됩니다.
‘인내’란 단순히 참고 억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적극적인 인내를 말합니다. 도망갈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는 연단을 가져다줍니다. ‘연단’이란 헬라어로 도키메(δοκιμή)로 금속공학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강도 높은 쇠가 되려면 불 속에 여러 번 들어갔다 나와야 하고 수없이 큰 망치로 맞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분자의 밀도가 높아져 강도가 높아집니다. 그러므로 많이 맞은 쇠가 단단합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역경을 겪은 사람이 단단합니다. 역경을 통해 좋은 품성으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품성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인내에서 비롯되고, 인내는 환난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면 반드시 크고 작은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박해에는 외적 박해도 있지만 주님을 섬김으로 오는 심적 아픔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겸손해집니다. 유교의 덕목 중에 하나는 ‘인’(仁)입니다. ‘인’ 역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역경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이를 볼 때 환난은 좋은 성품을 갖게 하는 학교입니다. 욥은 많은 매를 맞았습니다. 많은 역경을 겪은 욥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하나님이 쓰신 하나님의 종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많은 연단을 받았습니다. 고난 없이 영광을 누리고자 했던 베드로도 주님을 위해 많은 고난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벧전 4:13). 주님도 많은 고난을 받으신 후에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눅 24:26).
고난을 통한 영광! 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연단은 궁극적으로 소망을 이룹니다. 세상에서 붙들고 있던 거짓된 소망은 환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소망, 신령한 소망, 영원한 소망으로 바뀝니다. 이 소망은 확실히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소망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확신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임재하십니다. 그때부터 우리 속에 임재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해집니다. 이 소망의 확신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의인을 위해 죽는 것이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해 죽는 것은 혹 있지만 죄인을 위해 죽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시점은 우리가 아직 연약했을 때입니다(롬 5:6). ‘연약하다’란 유치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유치할 때, 이해하지 못할 때, 알아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할 때입니다. 어릴 때 우리는 부모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잘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아이도 세 살 이전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실 세 살 이전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어렸을 때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니?” 하고 자녀에게 물으면 모른다고 합니다. 그것을 안다면 부모의 속을 썩일 리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적으로 가장 어리고 연약할 때 가장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을 때, 그때 우리의 신분은 아직 죄인이었고, 원수였습니다(롬 5:8, 10). 우리가 의인이었을 때가 아니라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주님은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조금 실수했다고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좀 시원치 않다고 내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히 13:8).
사람들은 대개 복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정에 기초해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병이 나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집안에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이 일어나 많은 살상이 발생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내리고, 그 사랑 가운데 믿음의 터가 굳어지고,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폭이 어떠함을 깨달아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움
로마서 5장 9-10절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그로 말미암아 장차 임할 진노의 심판에서도 구원을 받을 것이 더욱 확실합니다(롬 5:9).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는데 이제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장차 구원받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롬 5:10).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끝났다면 우리는 혹시 심판 날에 구원에서 제외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으신 지 삼 일 만에 부활하셨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지금도 중보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의 보증수표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1).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움의 대상 또한 달라집니다. 과거에 우리의 즐거움은 시각적이고 물질적이고 순간적이고 감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것, 더 나아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즐거움이 극대화되어 차원 높은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 첫 번째 결과는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그리고 은혜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더 나아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런 특권들을 적극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맘이 늘 평안해”(새찬송가 40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