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로마서 6:12-23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의 삶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하나님은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은 성장해야 합니다. 이를 가리켜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는 칭의와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주어지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칭의가 믿음으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성화는 오랜 세월 동안 십자가를 바라보며 은혜 안에 거할 때 이루어집니다. 성화는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날마다 갈보리 현장에 서서 거룩의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입니다. 칭의가 신분의 변화라면 성화는 수준의 변화입니다. 이는 마치 거지왕자가 갑자기 왕이 되어 신분이 바뀌었으나 왕의 수준이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성화는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살전 4:3).
본문은 죄에 대해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 산 자의 삶에 대한 자세, 즉 성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순종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2).
여기에서 ‘그러므로’는 로마서 6장 10-11절 말씀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삼 일 만에 부활하셔서 계속 살아 계십니다. 이 원리에 의해 우리 역시 죄에 대해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 산 자가 되었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원리이자 곧 성화의 시작입니다. 만일 신앙이 하나의 원리로 끝난다면 우리의 신앙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의 원리는 삶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요즘 한국 교회가 무력하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듭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을 잘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지만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알지만 지키지 못할 경우 그 지식은 사람을 형식주의에 빠뜨리고, 결국은 위선자로 만듭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늘어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혼탁한 시대를 변화시키기란 불가능합니다. 말씀을 아는 만큼 삶에 적용할 때 우리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시대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이 말씀에는 ‘하지 말라’라는 소극적인 명령과 ‘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이 동시에 나옵니다. 실천에는 항상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병행됩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를 동시에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명령은 실천해야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신 명령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도 있고 실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죽을 몸’(mortal body)이란 죄의 몸(롬 6:6)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몸을 말합니다. 즉 우리의 지체를 뜻합니다(롬 6:13). 우리는 영원한 몸과 죽을 몸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각각 영광의 몸, 낮은 몸으로 구분합니다(빌 3:21). 낮은 몸은 낡고 쇠합니다. 40년 전 고등학교 시절에 만났던 한 자매가 제 아내의 변한 모습을 보고 ‘세월이 원수’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죽을 몸은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젊었을 때의 아름답던 몸매는 나이가 들면서 사라지고, 주름살이 늘어나고, 흰머리가 생깁니다. 그래서 50대가 되면 미가 평준화가 되고, 60대가 되면 지식이 평준화가 되고, 70대가 되면 돈이 평준화가 되고, 80대가 되면 수명이 평준화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면에 거듭난 생명, 영적인 생명은 영원하며 죄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왜냐하면 옛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낮은 몸, 죽을 몸은 아직 우리의 육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죄가 활동할 수 있습니다. 죄는 살아 있는 몸을 보면 발광합니다.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의기양양하게 몸을 지배하여 죄를 짓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 죽기 전까지 낮은 몸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는 유리그릇처럼 연약하고 죄에 쉽게 넘어집니다.
그런데 죽을 몸 그 자체는 선합니다. 예쁜 여성을 보고 예쁘다고 느끼는 감정은 죄가 아닙니다. 죄는 경향, 성향이지 형태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가 자연적인 본능을 사욕으로 바꾸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사욕’이란 격렬한 충동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욕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싸워야 합니다. 싸우되 결연한 의지로,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대적해야 합니다(벧전 5:8-9). 사욕과 싸워 이기지 못하면 죄의 노리개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그리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위의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찾으라’란 현재 명령형으로, 지속적으로 애정과 열심을 가지고 향하라는 뜻입니다. ‘생각하라’란 판단하라, 주의를 기울이라는 뜻으로, 단순한 지적 요소가 아니라 의지적인 요소도 포함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소유, 능력, 학벌 등 사회적 지위를 보고 상대방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분이 높다 할지라도 생각하는 것이 천박하면 천박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인격이 형성되고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진실한 생각을 하면 진실한 사람이 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생각과 삶이 따로 움직이면 위선자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생각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먹을 것을 생각하고, 틈만 나면 투기하여 떼돈 벌 생각을 하고, 틈만 나면 벼락출세할 생각을 하고, 틈만 나면 정욕적인 생각을 하던 데서 돌이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위의 것’이란 영원한 것, 하늘에 속한 것, 약속된 미래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신령한 복 등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인 사랑, 겸손, 온유, 긍휼, 인내, 순결,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 등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실재요, 우리가 누리는 현실입니다. 죽음이 분명한 사실이고 현실이듯이 하나님 나라 또한 실재입니다. 따라서 먼저 위를 바라보고 위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체’란 죽을 몸, 낮은 몸의 부분 부분들을 말합니다. 손, 발, 눈, 귀, 입 등 겉으로 드러나는 지체가 있습니다. 아울러 드러나지 않는 지체도 있습니다. 생각, 지능, 재능, 감정, 상상, 의식과 무의식 등이 그것입니다. ‘드리라’(yield, KJV)란 내주라, 사용하도록 허락하라는 뜻으로, 현재 명령형입니다. 지금 당장 계속적으로 드리라는 의미입니다.
‘무기’란 도구라는 뜻입니다. 도구는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칼은 의사가 사용하면 생명을 살리는 데 쓰임받고, 강도가 사용하면 생명을 죽이는 데 이용됩니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됩니다. 권력은 잘 쓰면 국민을 이롭게 하지만 잘못 쓰면 국민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지체는 죄에게 드리면 불의의 무기가 되고, 하나님께 드리면 의의 무기가 됩니다. 우리 자신을 누구에게 드리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손과 발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방향 전환을 뜻합니다.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학교 공부, 가정생활, 직장생활, 결혼생활, 심지어 신앙생활도 자기를 중심으로 할 경우 결국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드리는 결과가 됩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고전 10:31).
그리고 ‘무기’는 누구 편인가라는 뜻을 포함합니다. 요즘 ‘경계인’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경계인이 없습니다. 의의 무기 아니면 불의의 무기, 하나님 편 아니면 죄의 편일 뿐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며 사는 사람은 결국 죄의 편에 속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무기’는 군사용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영적 전쟁터와 같습니다. 전쟁에서는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의의 무기로 드리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수도사와 같이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 될까요, 아니면 자신을 학대하면 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무릎에 피를 흘리며 계단을 오르내리며 고행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100% 안 됩니다. 우리가 옛사람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처럼 죽을 몸도 우리의 뜻과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는 순간 십자가를 바라보면 됩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됩니다. 그때 우리의 죽을 몸은 보통 몸이 아니라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임을 깨닫게 되고, 성령의 전을 더럽힌 것을 회개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 안에 내주하신 성령께서 죄와 싸워 이기십니다. 성령께서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힘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매 순간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을 죄에 대해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로 새롭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우리가 적극적으로 직장에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학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전도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면 죄의 소욕이 물러갑니다. 우리의 심령이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죄의 소욕에 시달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몸과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삶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죄의 소욕을 다스리는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면 어떤 복이 임합니까?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면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요구만 합니다. 반면에 은혜는 모든 것을 줍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감격을 줍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강함을 줍니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인간 상호 간에 사랑하게 합니다.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라
바울은 신자들이 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과거에 우리는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율법에 얽매여 마지못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은혜 아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깁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다 감당해 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은혜를 남용하고 죄를 지으면 우리는 죄의 종이 됩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34). 자신을 누구에게 내주어 순종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이 달라집니다. 죄에게 순종하면 사망에 이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의에 이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누구에게 내주어 순종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본래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 중에 태어나 죄를 짓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종의 본질은 순종과 섬김입니다. 우리는 죄에게 순종하고 죄의 소욕을 섬겼습니다. 오랫동안 죄를 섬겼기 때문에 죄의 습성이 배어 있는 우리에게는 노예근성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했지만 오랫동안 노예생활로 인한 노예근성으로 인해 원망하고 불평하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산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노예가 자유인이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의 종 노릇 할 때 그 삶이 너무나 비참했기 때문에 의의 종이 된 은혜에 감격하며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우리가 어떻게 의의 종이 되었습니까? 우리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본’이란 금형(金型)을 가리킵니다. 밀가루 반죽을 넣고 구워 붕어빵을 계속 만들어내는 붕어빵 틀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교훈’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뜻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새롭게 형성하는 본입니다. 흉악한 죄인도 십자가의 복음을 영접하고 순종하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게 됩니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됩니다. 죄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누구로부터도 정죄받거나 송사당하지 않습니다(롬 8:33-34).
그러면 주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바울은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린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를 쉽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죄의 종이었을 때 죄를 위해 시간과 물질을 아무리 많이 써도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아니 며칠을 보내도 시간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사실 자발적으로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렸습니다.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옛 주인을 섬기던 그 열정으로 새 주인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향유를 담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은 죄 많은 여인처럼 마음과 힘을 다해 새 주인이신 예수님을 섬겨야 합니다(막 14:3-9).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라
죄의 종이었을 때 우리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죄의 종이었을 때 의에 대해 자유로웠습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 6:20-21).
우리는 그때 의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말씀이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오로지 죄의 종에 충실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부끄러운 육체의 열매들만 맺었습니다. 그 열매들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었습니다(갈 5:19-21). 그리고 그 마지막은 사망이었습니다. 결국 죄는 우리를 실컷 부려먹고 난 뒤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졌습니다. 죄는 이렇게 잔인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되었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란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덧입게 되는 열매를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하나님의 종이 되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면 사랑과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영생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영생은 죽은 후에 누리는 것뿐만 아니라 현재 삶 속에서의 영생도 포함합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영생의 씨를 심으셨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영생의 씨가 싹이 터서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지체를 적극적으로 의의 무기요, 의의 종이요, 하나님의 종으로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함에 이르러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내야 합니다(고후 2:15). 우리 삶의 수준이 매일 달라져야 합니다.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진리의 싸움을 할 때 열심을 다하여라 모범을 보이신 예수 굽히지 않으셨네 너희는 충성을 다해 주님을 섬기어라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구원의 갑주를 입고 끝까지 싸워라”(새찬송가 57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