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로마서 7:1-13
율법에서의 자유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 7:4).
구원에는 좁은 의미의 구원과 넓은 의미의 구원이 있습니다. 전자는 신분의 변화를 말하고, 후자는 수준의 변화를 뜻합니다. 우리는 신분이 변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불순종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순종의 종,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 산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분이 변했으므로 수준도 변해야 합니다. 신앙의 연륜이 더해 감에 따라 우리의 신앙 수준도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삶이 달라지지 않으면 우리는 성인아이처럼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로마서 6장 14-15절은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혜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면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는 은혜 아래에 있으니까 죄를 지어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겠지? 율법이 뭐가 필요해?’ 즉 율법의 무용과 율법의 폐기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이 바로 7장입니다. 7장의 주제는 율법의 역할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역할을 말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율법의 역할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우리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 죽은 우리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 역시 죄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제 그는 율법에 대해 우리가 죽었음에 대해 설명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롬 7:1상).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우선 정서적으로 접근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감정을 앞세워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고 따집니다. 연구보고에 의하면, 우리는 70%가 정서적으로 접근하고 30%가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한편, 서구는 70%가 이성적으로 접근하고 30%가 정서적으로 접근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동서양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정서나 이성보다 법으로 접근합니다. 그들은 냉정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법을 잘 아는 그들에게 율법에 대해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부부의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유대 사회는 가부장 제도이기 때문에 여자가 결혼하면 법적으로 남편에게 종속됩니다(롬 7:1하-3 참조). 남편이 폭군이라 할지라도 법적으로 이혼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는 한 부부관계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남편이 있는 아내가 남편이 보기 싫어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그 순간 간음한 여자가 되어 죽임을 당합니다(레 20:10).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달라집니다. 그 즉시 결혼반지를 빼고 그날로 다른 남자와 결혼하더라도 누구도 음부라고 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만 효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우리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같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끊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하라’, ‘하지 마라’ 하고 명령합니다. 만일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율법은 즉시 우리를 정죄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무서운 존재입니다. 율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죽든지, 아니면 율법이 죽든지 둘 중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죽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합니다(롬 7:12). 그렇다면 우리가 죽는 길밖에 없습니다. 율법에 대해 우리가 죽어야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약한 아내가 살고 강한 남편이 죽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바울은 거꾸로 연약한 우리가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죽으면 모든 관계가 단절된다는 사실을 비유로 든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지 않는 한 율법은 우리를 향해 계속 정죄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불의에 빠지게 하고, 절망하게 하고, 회의에 빠지게 하고, 낙담하게 합니다. 율법은 아무리 잘해도 칭찬이 없습니다. 율법은 못하면 못해서 정죄하고, 잘하면 잘한 대로 정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으면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향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와 똑같이 살아 있는 매개체를 통해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죄나 율법은 매질(媒質)이 죽으면 역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우리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 7:4).
이 말씀은 로마서 7장 1-3절의 적용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아래에서 고통당하는 인간들을 위해 죄에 대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매이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서 신음하는 인간들을 위해 율법에 대해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갈 3:13).
이 원리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도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의식도 없고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관계성이 끊어집니다.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율법을 의식하거나 율법에 대해 눈치 볼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율법을 의식하고 율법의 눈치를 본다면 이는 율법에 대해 죽지 않고 아직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랫동안 율법의 지배를 받아온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율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프로이드는 과거 3분의 2의 무의식이 현재 3분의 1의 의식의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에 대해 무의식까지도 완전히 죽었습니다. 따라서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의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를 날마다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도 그 자리에서 율법과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산 자가 되었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 7:4하).
‘다른 이’란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께 가서’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합니다. ‘연합’이란 결혼을 뜻하고, 결혼은 한 몸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고 예수님과 결혼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옛 남편인 율법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옛 남편인 율법과 깨끗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옛 남편을 그리워해서는 안 됩니다. 아내가 옛 남편을 잊지 못해 전화하고 만나고 편지를 보내면 새 남편이 좋아하겠습니까? 새 남편과 결혼했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으면 옛 남편인 율법을 깨끗하게 잊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 7:4하).
예수님과 연합한 우리의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신부가 아기를 낳기 위해서는 결혼식 날 사랑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신랑에게 마음만 주어서도 안 됩니다. 몸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정에 아기가 태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딱 한 번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그다음부터는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지 않고 제멋대로 살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끊임없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을 고백하고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길 때 전도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내 죄 속해 주신 주께 힘과 정성 다하니 나의 온갖 언행심사 주를 위한 것일세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바치리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바치리”(새찬송가 215장).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단순히 구원받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구원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삽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삽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도덕성을 자랑하며,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음을 자랑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즐겁게 하고, 자기 자신이 세운 표준에 따라 삽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자랑하고, 자기 가문을 자랑하고, 자기 출신학교를 자랑하고, 자기의 칭호를 자랑합니다. 사람들은 입만 열면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달라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습니다(고전 1:31). 바울의 삶의 목적, 간절한 소망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할 우리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롬 7:5).
이 구절은 영어 성경에서는 ‘왜냐하면’(for)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란 예수님과 연합하지 않았을 때를 가리킵니다. ‘육신’(sinful nature)이란 어떤 원리, 어떤 체제 아래에 있었는가를 말해 줍니다.
육신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육신이 죄의 도구가 될 때 악한 것입니다. 손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손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폭력을 위해 휘두를 때의 손은 나쁩니다. 발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될 때 그 발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죄 짓는 데 사용되는 발은 나쁜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죄 아래에 있을 때 맺은 열매는 무엇이었습니까? 죄가 육신에 작용하여 사망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 우리의 삶의 열매는 사망이었습니다. 사망의 열매는 온갖 음행과 우상숭배와 분쟁과 시기와 분을 내는 것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술 취함이었습니다(갈 5:19-21).
우리의 육신이 죄 아래에 있었을 때는 죄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 우리 육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습니다. 죄가 얼마나 힘이 있었던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율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사망의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교만과 불순종의 죄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게 했습니다.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율법을 부추겨서 우상을 숭배하게 했습니다. 죄 아래에 있으면 선한 것을 아무리 입력해도 악과 사망으로 출력됩니다. 이는 숫자 0에 어떤 숫자를 곱해도 0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심리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보면 더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죄는 우리의 육신을 충동질하여 ‘하지 말라’는 것을 더 하고 싶게 하여 죄를 더 짓게 만듭니다. 이때 죄의 덫에 걸려들면 그때부터 죄에 끌려다니게 되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이전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이제 우리는 율법 조문의 얽매임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지 않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깁니다. 그동안 우리는 율법의 조문에 얽매여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벌을 받을까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섬겼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찜찜하니까 교회에 나왔습니다. 여기에 기쁨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율법에서 벗어나면 더 좋은 것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영의 새로운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이란 성령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 마음에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네가 살았으니 이렇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행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와 전혀 관계없이 무조건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율법은 억지로 섬기도록 합니다. 형식과 의무감으로 섬기도록 합니다.
반면에 성령께서는 우리의 병을 치유하여 살려주신 후 행할 힘이 생겼을 때 행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영과 진리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게 하십니다(요 4:24). 성령께서는 새로운 생명과 능력으로 섬기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은혜로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자발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게 하시고, 자발적으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감사헌금을 드리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자발적으로 심방하고 양들을 돕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자발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자발적으로 자기 은사를 드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봉사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이 행복하고 기쁨이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은 돌이나 종이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중생한 사람의 경우 법이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의문은 죽이지만 영은 살립니다(고후 3:6). 옛 언약은 우리의 외적인 행동을 규제할 뿐 내면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사죄의 은혜를 베풀어주고, 하나님의 법을 마음으로 순종하게 합니다(렘 31:33-34).
율법의 기능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7:7상).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어 율법의 매임에서 벗어난 것은 율법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율법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줍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하).
율법이 없었을 때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알게 된 후에는 죄를 깨닫고 죄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십계명 중 열 번째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다른 아홉 개의 계명들은 겉으로 다 드러납니다. 그러나 마지막 계명은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탐심을 죄로 여기지 않기 쉽습니다. 탐심은 지나친 욕심입니다. 사람들은 욕심을 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욕심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욕심은 모든 죄의 근본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습니다(약 1:15). 모든 죄는 탐심에서 기인합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골 3:5).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롬 7:8).
우리는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가 율법을 기회로 삼아 우리 속에 온갖 탐심을 일으켜 우리를 질식시켜 죽게 했습니다. 이것을 *천로역정*에서는 재미있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기독도가 어떤 방에 들어갔더니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빗자루를 들고 그 방을 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먼지가 일어나서 질식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나타나 물을 뿌리자 깨끗해졌습니다.
여기에서 방은 인간 내면의 부패한 모습을 가리킵니다. 인간 내면은 먼지가 쌓인 상태와 같습니다. 빗자루를 들고 방을 쓴 사람은 율법이요, 물을 뿌린 사람은 은혜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질식시켜 죽게 만든 것은 빗자루를 들고 방을 쓴 사람이 아니라 방에 쌓인 먼지였습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 먼지가 얼마나 많은가를 알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알게 되면 우리 안에 먼지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우쳐줍니다. 죄는 숨어 있다가 율법을 통해 드러납니다.
율법을 알지 못했을 때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이나 양심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내가 살았더니’란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계명으로 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정반대로 죄가 살아나고 내가 죽었습니다. 내 속에 있던 죄가 계명을 이용해 나를 속이고 나를 죽였습니다(롬 7:10-11). 이를 볼 때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합니다(롬 7:12). 율법은 죄를 깨우쳐주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율법은 예수님의 필요성과 구원의 절박함을 알게 해줍니다(롬 7:13). 다시 말해 율법은 우리를 예수님께 나아가게 하고 우리의 구원을 준비시킵니다. 그래서 율법을 가리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라고 말합니다(갈 3:24).
율법은 거룩하고 선합니다. 율법은 은혜를 은혜 되게 합니다. 율법은 신분의 변화에서 수준의 변화로 이끕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를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 어제도 오늘도 언제든지 변찮고 보호해 주시네 주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리어 주소서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써 오늘도 충만케 하소서”(새찬송가 197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