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로마서 9:1-5
바울의 큰 근심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 9:1-2).
바울은 로마서 1-8장에서 믿음으로 칭의, 성화, 영화에 이르는 복음의 핵심을 전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유대인이 지니는 독특한 위치를 다룹니다. 특히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복음은 성경에 이미 계시된 것인데(롬 1:2, 3:21) 왜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만일 복음이 먼저는 유대인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면(롬 1:16) 왜 그들은 가장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유대인의 복음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미래의 계획은 무엇인가?” 등에 대해 과거, 현재, 미래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말합니다.
9장에서는 이스라엘의 타락을, 10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그리고 11장 1-32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장래를 각각 다루었고, 11장 33-36절은 송영입니다.
본문에는 동족에 대한 바울의 목자의 심정, 동족에 대한 슬픈 눈물, 동족에 대한 상한 마음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울과 같은 동족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의 특권
바울이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은혜와 사랑이 큼에도 그 특권을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받은 특권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4-5).
‘이스라엘 사람’이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들이 받은 특권은 모두 여덟 가지입니다. 양자 됨, 영광,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조상, 메시아의 약속입니다.
양자 됨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장자에게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리며 주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장자에게는 미래에 대한 보장이 있습니다. 장자에게는 소유의 두 몫의 상속권이 있었습니다(신 21:15-17). 하나님은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장자로 삼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장자로 입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가치 없는 노예 백성, 아무 공로 없는 그들을 일방적으로 장자로 삼으셨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민족이 있습니다. 그중에 뽑혀서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은 큰 복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영광’이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찾아오셔서 그들과 만나시고, 그들 가운데 임재하신 것을 뜻합니다(출 16:10, 24:16-17, 29:43, 33:18-22). 세계 어떤 민족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목격하고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후에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의 광야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속죄소에서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언약
‘언약’이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약속하신 것을 말하는데,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할례이고, 둘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 곧 율법이며, 셋째는 이스라엘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만 직접 찾아오셔서 이런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율법
다른 민족이 우상을 섬기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고 성별된 삶을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진 백성임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반면에 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율법 없는 백성들을 천히 여겼습니다.
예배
‘예배’(worship)는 앵글로색슨어인 ‘weorthscipe’에서 유래된 단어로, ‘가치’(worth)와 ‘신분’(ship)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는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신분을 뜻합니다. 즉 예배란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리는 모든 인간의 행위를 말합니다. 모든 영광과 기쁨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모든 행위가 예배입니다.
고대 사회에 이방 민족들은 바위나 고목나무 아래에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만나주시고, 그 능력을 행하시고, 사랑과 은혜를 베푸십니다. 예배는 매우 중요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구약 시대에는 예배를 드리는 이가 여호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지금은 반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영원 속에 거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을 소망하시고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토록 소망하시는 예배를 드리지 않아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부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은혜를 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다’란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의 예배로, 예배의 태도가 아니라 예배의 속성, 예배의 본질을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예배 하면 어떤 신비적 체험을 떠올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는 인간이 원하는 대로, 인간이 좋아하는 대로, 인간의 방편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없는 예배는 가식입니다. 하나님은 눈물로 애통하며 회개하는 예배를 찾으시고 받으십니다.
약속
하나님의 약속들은 일반 언약에 덧붙여 오실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들입니다(롬 1:2).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 내용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들입니다(눅 24:44). 이스라엘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탄생 장소,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승천, 재림 등 모든 것에 관한 약속을 다 받았습니다.
훌륭한 조상
이스라엘에게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등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상들을 통해 형성된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메시아의 약속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혈통을 통해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히 2:16). 그리스도께서 그들 중에서 나신 것은 큰 특권이요, 은혜였습니다. 앞서 열거한 일곱 가지 특권은 이 마지막 특권을 위한 준비요,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자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영접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민족만큼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와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문제만큼은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처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복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그들이 오히려 복음의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할 그들이 오히려 복음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핍박하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런 그들에 대해 애타는 목자의 심정, 상한 마음, 통곡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고통
육체가 아픈 것은 ‘고통’이라 하고, 마음이 아픈 것은 ‘슬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마음의 아픔이 지나쳐서 그것이 육체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 9:1-2).
바울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올수록 근심이 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이 복음의 원수가 되어 지옥불로 떨어지는 것을 볼 때 그는 근심과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동족을 생각할 때마다 바울은 끓어오르는 고통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이방인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의 고통은 더 커져만 갔습니다. 그 고통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동족에 대한 목자의 심정에서 오는 상한 마음이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의 동족을 향한 사랑의 극진함을 볼 수 있습니다. ‘저주를 받다’란 지옥 심판의 형벌을 뜻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에 있는 물건 하나라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불태워 없애라고 명하셨던 그 심판과 같은 뜻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 할지라도 동족만 구원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동족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을 만큼 뜨거운 열정이 없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바울에게는 자기 동족의 구원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2).
하나님은 목숨을 걸고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동족에 대한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이런 상한 마음과 부르짖음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동족에 대한 상한 마음과 부르짖음이 있다면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이런 기도에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요엘서에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면서 백성들을 위해 간구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까”(욜 2:17).
하나님은 그들이 울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해 주셨습니다(욜 2:18-20).
느헤미야 선지자 또한 무너진 성벽과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앉아서 울며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금식기도했습니다(느 1:4).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울며 통곡하고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예레미야도 쓰러져가는 조국의 앞날을 바라볼 때 너무 슬퍼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눈물의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애가를 읽을 때마다 우리 또한 따라 울게 됩니다. 하나님은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을 귀히 여기시고 그를 쓰십니다. 예수님의 사역 또한 한마디로 말하면 통곡과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통곡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보시며 우셨고(요 11:35), 회개하지 않는 이들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눅 19:41).
바울은 에베소에서 단지 말씀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습니다(행 20:31).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순종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고 섬겨도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배신의 길로 빠지는 그들을 보며 바울은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했습니다.
영국의 메리 여왕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할 때 엄청난 학정이 있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고 쓰러졌습니다. 메리 여왕은 ‘피의 여왕’이라고 불릴 만큼 잔학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존 낙스입니다. 그는 싸우고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제 목숨을 거두어 가시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시옵소서.”
이에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스코틀랜드를 돌려주셨습니다. 스코틀랜드에 다시 복음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스코틀랜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 땅은 장로교의 메카가 되었습니다.
저는 개척 초기였던 1989년 초, 샤미나드 피정의 집에서 가졌던 신년 수양회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30여 명의 형제자매들이 모여 밤새도록 인하대 복음 역사를 위해 얼마나 통곡과 눈물로 합심해서 기도했던지 피정의 집 문지방이 흔들렸습니다. 그러자 수녀들이 쫓아 올라와서는 기도를 작게 하라고 야단쳤습니다. 그 해에 세계 선교의 문이 열려 독일과 일본, 뉴질랜드, 그리고 동구권의 교두보인 헝가리 사역이 이루어졌고, 헝가리를 통해 러시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눈물이 있습니까? 통곡과 눈물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까? 통곡과 눈물이 사라지면 사랑이 식어버립니다. 사랑이 식으면 한 영혼이 넘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아프지 않습니다. 사랑이 식으면 사회가 강퍅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눈물과 통곡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캠퍼스를 주시옵소서! 통일 한국을 주시옵소서! 열방을 주시옵소서! 아니면 제 목숨을 취하소서!”
이런 기도가 대학을 살리고, 조국을 살리고, 통일 한국을 앞당기고, 세계 복음화를 이룹니다. 눈물의 기도는 강퍅한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눈물은 은혜입니다. 한 영혼이 지옥 자식이 되는 것을 보며 가슴을 찢고, 옷을 찢으며 애통하는 마음만 있으면 한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눈물의 기도만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눈물로 성장하고 부흥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품을 떠난 탕자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 한 영혼을 위해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 9:1-2).
바울은 자신이 크게 근심하고 고통당하는 것이 사실임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며 충성을 다했습니다. 20년 넘게 1, 2, 3차 전도여행을 통해 온 세계에 복음을 편만하게 전파했습니다(롬 15:19). 그런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동족으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행 14:19). 율법과 성전을 훼방하고 더럽히는 자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 죽이려 했습니다(행 21:27-36). 40여 명이 결사대를 조직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행 23:12-13).
그런 중에도 바울은 동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인해 고통하고 근심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해도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안 한다.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동족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지옥의 불길 속에서 고통스러워 부르짖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전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동안 우리나라는 복음이 들어온 후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다가 현재는 감소 추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나라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남북 분단의 슬픔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속히 통일 한국이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땅으로 한 걸음씩 나아갈 때에 수많은 적들과 견고한 성이 나를 두렵게 하지만 주님을 신뢰함으로 주님을 의지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큰소리 외치며 나아가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땅을 취하리니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땅을 취하리니”(복음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