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로마서 10:14-21
전도의 중요성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조지 휘트필드 목사는 일주일에 40시간 내지 60시간을 설교했습니다. 이는 그가 주님을 믿고 사는 삶이 얼마나 부요한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롬 10:12-13). 그는 온 마음을 다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힘써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런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녹이 슬어서 없어지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는 것이 더 낫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그토록 핍박과 환난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복이 얼마나 크고 영광스러운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복을 알게 되면 사랑하는 부모, 친척,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 모두 전도의 중요성을 알고 전도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믿음과 복음 전파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이 말씀은 도치법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부를 수 있고, 불러야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구원을 얻어야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를 볼 때 전파하는 사람, 외치는 사람이 없이는 믿는 자들이 생길 수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부뚜막에 소금도 넣어야 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이 아무리 복된 말씀이라 할지라도 전하지 않으면 생명과 구원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생명과 구원 역사가 일어납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5년 기독교 인구는 861만 6,000명(18.3%)으로, 불교(1,072만 6,000명, 22.8%)에 뒤이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2008. 5. 25. 2005년 인구주택조사). 왜 이처럼 교회가 부흥이 안 되고 하향곡선을 그리는 것입니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주된 원인은 우리의 입술을 통해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든 직장에서 동료와 상사에게,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후배들에게, 가정에서 부모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교회로 초청해 보십시오. 그러면 캠퍼스에 십자가의 계절이 올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지나치게 프로그램에 몰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부흥은 프로그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에 있습니다. 믿음은 말씀을 듣는 데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도록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외쳐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불신자들을 교회로 초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들이 듣고 안 듣고는 그다음 문제입니다. 우리가 초청한 사람이 교회에 왔다가 그냥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할 일은 불신자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장(場)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마귀는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합니다(고후 4:4). 바리새인들은 사도들을 핍박할 때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행 4:18).
그들은 사도들로 하여금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이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위협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20).
말씀은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불신자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우리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죽게 됩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듣든지 안 듣든지 전하라고 했습니다(겔 2:5-7). 우리는 씨를 뿌릴 때 옥토에만 뿌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옥토인지 박토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열심히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 생명을 구원하지 않으면 그 피 값을 우리에게서 찾겠다고 하셨습니다(겔 3:18). 이처럼 전도인의 책임은 막중합니다.
그렇다면 복음 전파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전해도 그만, 안 전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복음은 우리를 통해 반드시 전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5상).
누구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이들은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가 선교사입니다. 꼭 해외에 나가야만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두가 선교사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지상 명령을 계승한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들고 가정으로, 직장으로, 학교로, 열방으로 가야 합니다. 복음을 들고 삶의 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삶의 현장은 우리 모두의 선교지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는 전도의 은사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전도는 은사가 아니라 의무입니다. 전도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특별히 몇 사람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정에 파송된 선교사들입니다. 우리는 캠퍼스에 파송된 선교사들입니다. 우리는 직장에 파송된 선교사들입니다. 우리가 이 직임을 잘 감당하지 않으면 이는 직무 유기입니다.
“가라 가라 세상을 향해 가라 가라 말씀 가지고 가라 가라 온 땅을 향해 가라 가라는 예수님 명령 우리 모두 모두 가겠어요 온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우리 모두 주의 명령을 따라 온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복음성가).
바울은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하).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에서 발 냄새가 날지라도 그 발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말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사 52:7). 바벨론에서 비참한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그토록 사모하고 사모하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는 자의 발이 얼마나 아름답냐는 것이 그 배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은 이보다 더 기쁜 소식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주님이 죽음의 세력을 잡고 있는 마귀의 세력을 멸하고 승리하셨습니다. 인류의 최대 원수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이라고 했습니다. 지옥의 형벌에 떨어져서 영원한 불 심판을 받을 인생들이 영생을 얻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기쁜 소식을 어떻게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은 아름다운 발입니다.
세상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직분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귀한 직분입니다. 복음 전파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삶이 고상하고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생 동안 온 마음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 전파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는 전도하는 사명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여 완수하는 일을 자기 생명보다 더 귀히 여겼습니다.
복음 전파와 불순종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마다 듣는 이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할 때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지만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롬 10:16).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않았다’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다 복음을 영접하고 순종하는 것은 아님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소수의 사람들만 복음을 듣고 영접했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음을 순종하지 않아 거치는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리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배부른 사람에게는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편안한 사람, 교만한 사람,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구원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마음,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말씀이 들립니다. 말씀이 들리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마음,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일이면 적어도 30분 전에 교회에 와서 말씀이 들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들려지는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옆에 앉은 성도들에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도록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마른 스펀지에 물이 쫙 빨려들듯 말씀이 우리 안으로 빨려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말씀을 듣지 못해서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 10:18).
바울은 일찍이 복음이 온 땅에 퍼졌고,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방법, 탄생 장소,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재림, 새 하늘과 새 땅 등 복음에 관한 내용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지 못했다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땅 끝까지 다 전파되었는데 그들은 왜 순종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롬 10:19상).
이스라엘이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복음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입니다.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롬 10:19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복음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도 들어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단순합니다. 그러므로 이해하지 못해서 믿지 못했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둘째는 스스로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15-21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살찌고 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발로 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등 따습고 배가 부르자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각종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다른 신을 경배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격노하시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심으로 그들을 시기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무시했던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것을 보고 시기가 나서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사야는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롬 10:20).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열심히 구원하셔서 유대인들을 화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직접 목격한 사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습니다. 율법도 모르는 이방인일지라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복음 진리 자체가 그들을 화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훼방했습니다. 깡패들을 동원해서 복음 역사를 훼방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던진 적도 있었습니다(행 14:19). 그만큼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자기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했습니다.
종일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
그렇다고 하나님이 유대인을 버리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롬 10:21).
우리는 순종하지 않고 거슬러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두 번 다시 보기 싫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극진하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실 만큼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순종하지 않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종일 손을 벌리셨습니다. ‘손을 벌리시다’란 두 손을 활짝 열고 그들을 영접하시기 위해 손을 내미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적극적으로 두 손을 내미시고 거슬리는 죄인들을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백성들을 향해 종일 두 손을 내미시고는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우리는 5분 정도만 팔을 올리고 기도해도 팔이 아픕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수천 년 동안 종일 팔을 드시고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두 팔을 벌리신 채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주님께 돌아오라고 간절히 호소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십자가 위에서 손을 내미시고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면 누가 탕자입니까? 우리 중에 ‘나는 신앙생활을 오래 했으니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탕자입니다. 하나님은 욕심과 교만과 자기 의를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용서받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긍휼의 팔에 안기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거절하고 자기 길로 가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오늘도 종일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없으면 전할 수 없고, 전하는 자가 없으면 복음을 들을 수 없고, 복음을 듣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구원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선교사들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이 선교지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서 종일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십니다.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와 어서 와 돌아오라”(새찬송가 52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