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로마서 11:25-36
하나님의 비밀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 11:25).
로마서 9-11장은 계속해서 유대인을 언급합니다. 바울은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마음 가운데 깊은 고통과 근심을 느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로 인해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소망의 눈으로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본문은 이에 대한 결론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사적인 감정이나 주관적인 눈으로 유대인들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견해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보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안경을 쓰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어떻게 역사하셨고, 이방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역사나 사물을 볼 때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 어떤 사관을 가지고 보느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볼 때, 나 중심으로 인간적인 입장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시각, 성경적 맥락, 복음의 원리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는가,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의 속성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섭리는 어떠한가 등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자신을 보고 세계의 역사를 바라봐야 합니다. 이런 눈으로 보면 그 깊고 놀라운 섭리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긍휼로 구원하신 하나님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 11:25).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한다’란 다 아는 척하지 말라, 자기 교만에 빠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고 말씀합니다(잠 18:12). “교만은 실패의 앞잡이이고, 겸손은 지혜의 어머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성경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벧전 5:5). 바울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지혜 있는 척하다가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이 신비를 알려주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신비를 알고,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알게 되면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신비’란 헬라어로 무스테리온(μυστἠριον)으로, 이 단어에서 영어 ‘mystery’(미스터리)가 나왔습니다. 바울 서신에는 신비라는 단어가 22회 나옵니다. 신비란 지나고 보면 당연한 것인데 현재에는 이해할 수 없을 경우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드러내놓고 보면 당연한 것인데 현재에는 다 깨달을 수 없어 신비롭기만 합니다. 우리의 인식의 한계가 이를 수용할 수 없고 이해력이 부족하여 부득이 신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의 인식과 능력의 한계 밖이어서, 우리의 시야가 좁고 시공간적으로 알 수 있는 용량이 부족하여 그것을 이해하고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신비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것이 신비로운 것이 아니고 당연한 사실입니다. 다만 사람들에게 신비롭게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믿어야 이해가 됩니다. 우리는 믿는 순간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 신비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인식의 세계로 옮겨지고, 신비의 커튼이 걷힙니다. 믿음은 신비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요, 지혜요, 통로입니다. 이 신비를 깨달을 때 우리는 신앙의 기쁨을 누리게 되고 믿음이 성숙해집니다. 성숙해지니 또한 겸손해집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의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무한정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수가 들어오는 기간이 있고, 하나님이 마음에 두고 계시는 숫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숫자가 다 찰 때까지만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두시고, 그 숫자가 채워질 동안만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믿지 않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우둔함은 일시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받을 이방인의 총수가 얼마이고, 언제쯤 다 찰지, 그때를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이단들은 구원의 숫자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만 4,000명이라고 주장합니다(계 7:4). 그래서 그 숫자에 들어야 한다며 미혹합니다. 그러나 이는 가장 많은 수(신구약 교회, 즉 12×12=144에 히브리 사람들에게 가장 많다는 뜻인 1,000을 곱한 숫자)를 뜻하는 상징적인 것일 뿐 특정 인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고작 14만 4,000명을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겠습니까? 그리고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믿은 사람이 14만 4,000명만 되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마냥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이제 되었다”고 하시면 구원의 문이 닫히게 됩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닫힌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습니다. 한번 닫힌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구원의 문이 닫히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참 좁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길은 참 험하니 우리 몸에 지워 있는 그 더러운 죄 짐을 하나 없이 벗어놓고 힘써서 들어갑시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좁은 문 들어가 영생으로 인도하는 그 생명 길 갑시다”(새찬송가 521장).
전도서 기자는 청년의 때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전 12:1).
곤고한 날이 오고,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곤고한 날’, ‘아무 낙이 없는 날’이란 늙음의 때, 죽음의 때, 병든 때, 또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늙고 병듭니다. 무슨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고, 그런 삶을 살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 붙어 있는 청년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
예수님이 오실 날이 언제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도적같이 오시리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금일지, 오늘 밤일지, 아니면 내일일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바로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구원의 날인 동시에 심판의 날이기도 합니다.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주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 받아야 합니다.
“주 어느 때 다시 오실는지 아는 이가 없으니 등 밝히고 너는 깨어 있어 주를 반겨 맞으라 주 안에서 우리 몸과 맘이 깨끗하게 되어서 주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모두 기쁨으로 맞으라”(새찬송가 176장).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6상).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을 자가 다 돌아오면 오랫동안 우둔하고 굳은 마음을 가졌던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소망을 끊지 않으셨음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입니까?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롬 11:26하-28).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시온에 오신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회개시키셔서 죄 사함을 받게 하십니다. 현재 그들은 복음의 원수들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래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백성이요,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후회하심이 없다’란 뉘우침이 없다, 틀림이 없다,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자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입니다. 그 누구도 거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사건으로 나타나고, 부르심은 구체적으로 역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에는 후회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실패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놀라운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사랑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한 분이십니다(롬 11:30-32). 하나님은 긍휼을 기초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할 때 우둔한 이스라엘일지라도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할 때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소망이 있습니다. 지금 안 돌아오고 있을 뿐이지 장차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만 보고는 소망이 있다 없다, 됐다 안 됐다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소망이 없다고 해서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너무 많이 투자를 하게 되면 현재 손해를 보더라도 원금이라도 뽑기 위해 쉽게 그만두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를 투자하셨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귀한 것을 투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하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좀 허물이 있고, 시원치 않고, 실패했다고 해서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 말로 하면, 하나님은 쉽게 발을 빼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이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하나님은 이방인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긍휼로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율법에 순종했다는 교만과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불순종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의 교만과 의를 깨뜨리시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자기 의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서만 구원받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이십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해 큰 근심과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의 넘어짐과 그들의 회복을 통한 인류 구원 역사의 크신 뜻을 깨달은 그의 심장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시가 흘러넘쳤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롬 11:33-34).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이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누구도 만민의 구속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헤아릴 수 없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신비를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사람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속칭 예수 점쟁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만일 “당신은 언제 누구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언제 무엇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는 사이비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그 깊은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인간의 생사화복을 알 수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이 이루실 구속 역사의 오묘한 경륜을 알 수 없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숭배에 빠졌던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누가 감히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로만,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으리라고 어느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만 아시는 신비에 속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이 말씀은 바로 앞 절인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4-35)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렸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상받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희생했다며 자기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이 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원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유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심판주이십니다. 욥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일시적으로, 부분적으로 넘어지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한 가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는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만을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성부 성자와 성령 찬송과 영광 돌려보내세 태초로 지금까지 또 영원무궁토록 성삼위께 영광 영광 아멘”(새찬송가 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