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로마서 12:3-8
믿음의 분량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 피해의식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신앙생활을 하나의 투자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투자에는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시적인 결과가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피해의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헌신과 봉사와 섬김,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진심을 드리는 것은 주님께 대한 투자가 아니라 예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투자자가 아니라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봉사, 나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은 봉사의 대원칙과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입니다. 봉사의 대원칙은 믿음의 분량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봉사와 섬김의 우선순위는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 봉사의 대원칙과 봉사와 섬김의 우선순위를 깨달아 섬김과 나눔이 교회로부터 출발해 가정과 캠퍼스와 직장, 사회, 그리고 민족과 세계로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
바울은 교회에서의 봉사를 우선적으로 말하기에 앞서 봉사의 대원칙을 설명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원문에는 ‘생각하다’라는 동사가 4회 나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한 단어라는 것입니다. 생각이란 지성의 역할을 말합니다. 지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합니다. 우리는 지성을 가지고 ‘나는 지금 어떤 믿음의 분량을 가지고 있는가?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떤 자리,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대해 냉정하고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자기의 장단점을 알게 되고, 남을 존중하게 되고, 자기의 단점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아서 보강하게 됩니다.
반면에 자기 성찰이 없으면 삶의 균형감각을 상실하여 자기의 믿음과 은사를 과대평가하게 됩니다. 고린도교회에 혼란이 일어난 것도 방언에 대한 과대평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받은 방언을 다른 은사보다 더 높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른 은사에 대해 낮게 평가하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분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겸손하라고 말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데, 지금 구원을 받아서 이런 사람이 되었고, 또 지금 어떤 점이 부족한가를 잘 압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냉정함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는 겸손한 사람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실천하는 첫 단추입니다. 모든 봉사와 섬김은 겸손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행동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한마디로 자기 분수를 압니다. 분수를 아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 서야 할 자리인가, 앉아야 할 자리인가, 누워야 할 자리인가를 알고, 섬기고 동역해야 할 자리인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가를 압니다. 그러나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해 그에 걸맞지 않은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고 행동한 대표적인 인물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위치와 신분과 분수를 알지 못하고 선악과를 먹었다가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위치와 직분을 알고 그것에 충성합니다. 비록 남이 알아주지 않는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기쁨으로 받아들여 열심을 다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아멘” 하고 섬깁니다. 우리는 보통 겸손 하면 ‘사양’으로 생각해 할 수 있는 일까지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것에 대한 직무유기입니다. 반면에 할 수 없는 것까지도 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것은 교만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높이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사양하지 말고 봉사해야 합니다.
교회는 섬김과 봉사의 최우선 자리
바울은 교회가 왜 우리가 섬기고 봉사해야 할 최우선의 자리인가를 설명해 줍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이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또한 우리의 몸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우리의 몸이기 때문에 당연히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몸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중에 내 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내 몸을 사랑합니다. 따라서 내 몸이 아프고, 내 몸에 어떤 위험이 닥치면 심각해집니다. 우리는 내 몸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이어트도 하고, 열심히 운동하고, 열심히 씻고, 열심히 가꿉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본능적인 자기애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내 손에 먼지가 조금이라도 묻으면 금방 닦지 않습니까? 교회 또한 이렇게 섬겨야 합니다.
한편 이웃은 내 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은 내 몸이 아니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교회가 이웃에 비해 훨씬 가까운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웃은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할 대상이고, 교회는 내 몸으로서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교우를 사랑하는 것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그 농도가 짙습니다.
우리 중에 예수님을 잘 믿고 교회를 잘 섬기는 분들의 얼굴을 보면 천사처럼 아름답고 곱고 밝습니다. 그들의 피부는 윤이 납니다. 이는 주님을 섬기고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섬김과 봉사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것은 곧 자기에 대한 봉사요, 섬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롬 12:4).
우리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는 여럿입니다. 그 기능 또한 다양합니다. 손과 발의 기능이 각기 다릅니다. 눈, 코, 귀, 입의 기능이 각기 다릅니다. 모든 지체가 똑같은 기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손은 손대로, 눈은 눈대로, 코는 코대로, 입은 입대로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눈은 보는 기능을, 입은 말하는 기능을, 귀는 듣는 기능을, 코는 냄새 맡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지체가 있는 이유는 몸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몸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다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롬 12:5). 지체의 역할과 기능이 각기 다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롬 12:6상).
우리의 은사는 각기 다릅니다. 은사가 다른 만큼 기능과 책임 또한 다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서 하는 일이 모두 별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예배드리고, 똑같이 헌금하고, 똑같이 봉사하기 때문에 무엇이 다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각기 사람들에게 당신의 일을 펼치도록 특별한 역할을 주십니다. 이것을 일컬어 은사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다양한 은사 중에 중요한 일곱 가지 은사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소수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은사가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만약 은사를 받지 않았다면 그는 지체라 할 수 없습니다. 지체라면 반드시 교회에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주님이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받은 은사대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주신 은사를 묻어두면 주님으로부터 나중에 악한 종이라고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는 모두 일곱 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하-8).
첫째, 예언의 은사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합니다. 예언이란 점쟁이들처럼 몇 살에 시집을 갈 것이며, 언제 취직이 될 것인가를 맞추는 일이 아닙니다. 앞을 내다보는 은사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은사입니다. 말씀을 잘 전하는 은사가 바로 예언의 은사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목회자에게 주어진 필수적인 은사입니다.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예언의 은사를 받아야 하고, 또 사모해야 합니다.
둘째, 섬김의 은사입니다. 섬김의 은사는 봉사하는 일에 남다른 은사를 받은 경우를 말합니다. 물론 교회에서 다 섬기는 자들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일에 뛰어난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은사는 자기 주도적으로 사역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주도적으로 사역을 펼치도록 돕습니다. 바울이 말씀을 선포하는 은사 바로 다음에 섬김의 은사를 언급한 이유는 그만큼 교회에서 섬기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있기까지는 그를 섬긴 아론과 훌이 있었습니다. 아론과 훌은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하루 종일 붙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적의 침략을 막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 뒤에는 그를 위해 목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있었고, 디모데와 디도가 있었습니다.
19세기 미국의 무디 목사가 있기까지는 섬김의 은사를 가진 생키가 있었습니다. 생키는 일생 동안 찬양으로 무디 목사의 사역을 섬기며 동역했습니다. 그가 찬양하면 회중의 마음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때 무디 목사가 말씀을 전하면 회중이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말씀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디 목사를 섬긴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강원도 예수원을 설립한 대천덕 신부의 할아버지 토레이 박사입니다. 그는 학문이 일천한 무디 목사를 항상 따라다니며 글을 쓰고, 설교문을 정리하고, 성경공부 교재를 만드는 사역을 도와주었습니다.
또한 존 스토트 목사가 있기까지는 그를 40년간 섬긴 여비서 프란시스 화이트헤드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의 모든 원고를 정리하고, 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들을 섬겼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녀에게 선사했습니다.
이렇게 뒤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위대한 사역자들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섬기는 자는 자기 빛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가르치고 지도하는 은사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섬김의 은사는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섬김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 빛납니다. 우리가 섬김의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사역을 섬길 때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셋째, 가르침의 은사입니다. 가르침의 은사는 예언의 은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예언의 은사가 영적인 능력이라면 가르치는 은사는 이해시키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빠르고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교수들 중에는 실력은 있는데 가르침의 은사가 없어서 인기가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실력보다 재미있게 잘 가르치기 때문에 인기가 많은 분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가르치는 것도 은사입니다.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성경 말씀이 청중의 마음에 쏙 들어오도록 잘 가르칩니다.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가르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넷째, 위로의 은사입니다. 위로의 은사는 낙심한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은사입니다.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잘 위로하고 격려하고 상담해 줍니다. 그와 대화하다 보면 삶에 지친 마음에 생기가 솟아나고,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됩니다. 위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마음이 따뜻합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위로의 은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외과의사라면 바나바는 간호사였습니다. 위로의 반대는 사람을 절망하고 낙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며 마음이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다양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사상이 혼재된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단순한 질서 속에 살던 이전과 달리 사람들이 갈등을 많이 겪고 상처를 많이 입습니다. 이런 시대에 위로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정형외과 원장인 이지동 박사는 위로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선교지를 심방하며 지치고 피곤한 분들을 섬깁니다. 병원에서 진료할 때도 20분이고 30분이고 환자들의 속내를 들어줍니다. 그러면 환자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스스로 힘을 얻습니다. 요즘은 어느 시대보다 상처가 많은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위로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다섯째, 구제의 은사입니다. 구제는 돈이 많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돈은 없어도 사랑을 베푸는 일이라면 앞장섭니다. 사랑을 베푸는 일을 무척 좋아합니다. 구제는 성실함으로 힘써야 합니다. ‘성실함’이란 인색함으로 하지 않고 후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다스림의 은사입니다. ‘다스리는 자’란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자를 말합니다. 다스림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평범한 사람을 유능한 사람으로 키웁니다.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의 주위에는 유능한 일꾼들이 자라납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도 그에게 가면 유능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주위에는 온갖 연약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다윗의 섬김을 받은 후에 모두 통일 이스라엘을 세우는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받는 큰 복은 다스림의 은사를 받은 지도자를 만나 유능한 지도자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일곱째, 긍휼의 은사입니다. 긍휼의 은사는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은사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어려운 사람을 챙겨주고 배려하고 베푸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긍휼의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은사는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27가지의 은사가 나옵니다. 그 외에도 더 많은 은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단지 바울 당시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은사만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은사를 사모하고 충만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은사를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하나님이 각기 은사를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데 있습니다. 교회의 목적은 예배, 친교, 제자도, 봉사,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교회의 목적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모든 은사는 예배를 섬기고, 성도들 사이에 깊은 교제를 나누고,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고,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는 것과 연관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은사를 가지고 교회에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사를 가지고 전도 사역에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각기 주님께 받은 은사로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분수를 알고 그 위치에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내 몸으로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교우 또한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나의 죄를 정케 하사 주의 일꾼 삼으신 구세주의 넓은 사랑 항상 찬송합니다 나를 일꾼 삼으신 주 크신 능력 주시고 언제든지 주 뜻대로 사용하여 주소서”(새찬송가 32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