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로마서 12:9-13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성도는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봉사와 섬김은 먼저 교회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했습니다(갈 6:10). 교회는 주님의 몸인 동시에 우리의 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형제를 섬기고 교회에 봉사하게 하기 위해 각기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로 교회와 형제를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봉사라고 해서 다 유익하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봉사와 섬김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성경의 원리대로 섬기고 봉사할 때 바른 섬김과 봉사가 되고,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고, 주님께 드리는 제물이 거룩한 산 제물이 되고, 형제에게 유익이 됩니다. 우리는 봉사를 하되 거짓 없는 사랑으로 하고, 봉사를 하되 열심을 내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봉사해야 합니다.
거짓 없는 사랑으로 봉사하라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신자의 공동생활에서는 겸손이 중요한 만큼 사랑 또한 중요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고, 또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고전 13:1-2). 참된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거짓이 없다’(without dissimulation, KJV)란 위선적이거나 가식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연극이 아닙니다. 사랑은 위장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겉과 속이 다를 수 없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면 사랑이 아닙니다. 겉과 속이 같아야 사랑입니다. 그리고 ‘거짓이 없다’(sincere, NIV)란 성실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실하고 정직하다는 것은 남을 속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사랑과 교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참다운 사랑이며 진리에 속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을 속이는, 단순히 외형적이고 위장된 사랑은 아닌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사랑과 교제를 흉내 내는 식의 사랑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사랑은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사랑하면 우리는 세련과 상냥한 태도를 연상합니다. 세련과 상냥함은 외적인 모습입니다. 사랑은 얕지 않고 깊습니다. 사랑은 감상적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약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강합니다. 사랑은 의지적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을 줍니다. 사랑하면 기다려줍니다. 사랑하면 즐겁습니다. 사랑은 늘 마음에 두고 생각하게 합니다. 사랑은 감상이 아니기 때문에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변질되고 변덕스러운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시작했다가 나중에 돌아서는 것, 분위기에 따라 변하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은 거짓된 사랑, 사랑이 아니라 욕정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사랑과 욕정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욕정은 외모나 환경, 조건을 보고 출발합니다. 욕정은 철저하게 이용하고 이용당합니다. 욕정은 어둠침침한 곳에 숨어 줄을 쳐놓고 곤충을 잡아먹는 거미와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어려울 때 함께 그 어려움을 나누고, 기쁠 때 함께 그 기쁨을 나눕니다. 사랑은 환경이나 조건을 넘어섭니다. 사랑은 동기가 변하지 않습니다.
거짓된 사랑은 처음에는 좋은 동기로 시작했다가 점점 시간이 갈수록 변합니다.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변합니다. 기쁨으로 시작했다가 눈물의 씨앗으로 변합니다. 눈물의 씨앗은 사랑의 동기가 변한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아니라 기쁨의 열매로 맺어집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조건이나 지위를 보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조건은 시간이 변함에 따라 달라집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위도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잘나가던 사람이 어느 날 “56도”, “45정”, “38선”이 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상대방을 외모를 보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빼어난 몸짱, 얼짱일지라도 늙으면 쇠하여 화장발도 잘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10대는 치장, 20대는 화장, 30대는 분장, 40대는 변장, 50대는 무장, 60대는 환장, 70대는 포장, 80대는 매장, 90대는 끝장이다.” 사람들은 외모를 위해 위장에 위장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국 문에는 줄이 길게 서 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이 하도 성형수술을 많이 해서 원판과 일일이 대조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위장도 영원히 속일 수 없습니다. 자녀를 낳는 순간 그 사실이 다 드러납니다.
사랑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지속적입니다. 사랑은 변질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아무리 들어도 피곤하지 않고, 아무리 들어도 진력이 나지 않습니다. 억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어서, 기뻐서, 즐거워서 듣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합니다. ‘미워하다’란 혐오하다라는 뜻입니다. ‘속하다’(cleave)란 강력본드로 꼭꼭 붙들어 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사랑할 때 악까지도 사랑하기 쉽습니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는 말이 있습니다. 종종 젊은이들은 사랑할 때 악까지 사랑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눈이 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윤리가 있고,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악을 미워합니다.
악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악은 강합니다. 선한 것을 망가뜨리는 것이 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력본드로 선에 꽁꽁 묶어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악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악을 미워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시 97:10).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암 5:15).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악에 대한 혐오감이 더 커지게 됩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형제를 해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악인 반면에 형제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모두 선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
여기에서 ‘사랑’이란 형제 사랑이고, ‘우애’란 부모와 자식 간의 수직적인 사랑을 가리킵니다. 또한 ‘형제 사랑’이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피로 맺은 사랑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고 삽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한 형제입니다. 우리는 한 피 받은 한 형제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한 몸같이 친밀하고 마음으로 하나 되어 우리 주님 크신 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새찬송가 220장 3절).
우리 속담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피보다 진합니다. 믿음 안에서의 교우는 소중합니다. 교우는 지체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지체도 고통을 당합니다(고전 12:2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귀한 교우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랑 안에서 만났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망에 머물러 있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 아직도 사망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증거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분명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그렇다면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일단 그가 구원받았는가를 의심해야 합니다.
구원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구원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질의 문제입니다. 미움과 섭섭한 마음, 울분, 원망, 불평, 시기, 질투, 언제든지 공격할 것 같은 싸움닭과 같은 혈기, 공격적인 말투를 가지고 오래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삶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형제들의 따뜻한 사랑에 둘러싸인 삶이 진정한 천국입니다. 뜨거운 형제애가 있는 교회가 진정한 천국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뜨겁게 보듬어주고 감싸주는, 사랑으로 둘러싸인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그리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라고 했습니다. 존경은 남의 장점을 보는 마음입니다. 남을 높이는 마음입니다. 나보다 항상 남을 높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반대로 생각합니다. ‘나는 너보다 낫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늘 비판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부 간에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자녀들이 좀 잘못하면 “네 아빠 닮아서”, “네 엄마 닮아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내가 아내보다 낫다’, ‘내가 남편보다 낫다’는 생각이 숨겨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남을 낮게 여기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존경하되 우리가 먼저 남을 존경해야 합니다. 사랑이란 피동적이거나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다가서고 높이고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봉사하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예수 믿는 사람들은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게으르다’란 나태하고 느슨해져서 일을 건성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봉사의 원칙은 무슨 일을 하든지 진심으로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열심을 품다’란 불을 가슴에 안다는 뜻입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그 가슴에 뜨거운 불, 뜨거운 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열심히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쏟아붓습니다. 섬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열심을 내어 봉사합니다.
사람은 주의 일에 열심을 내지 않으면 다른 것에 열심을 쏟기 마련입니다. 학생이 공부에 열심을 쏟지 않으면 엉뚱한 것에 열심을 쏟게 됩니다. 직장인이 직장 일에 열심을 쏟아붓지 않으면 엉뚱한 짓을 하게 됩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는 데 열심을 쏟지 않으면 엉뚱한 곳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엡 4:27). 열심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미지근한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16).
하나님은 열심 없는 찬송, 열정이 담기지 않은 사랑, 열심이 없는 봉사, 진심이 없는 헌금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쏟아서,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누며 봉사하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봉사해야 합니다. 주님의 일에 힘쓰다 보면 즐거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 환난도 있고, 고통도 따릅니다. 그때 사람들은 과거를 아름답게 여깁니다. 그러면서 현재는 고통스럽고, 미래는 암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과거에 대해서는 열심히 주님을 섬기지 못한 것으로 인해 죄스러운 모습이 되어야 하고, 현재에 대해서는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감사해야 하며, 미래에 대해서는 소망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우리는 미래에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오늘의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시간을 정해 놓고 정성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누며 봉사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롬 12:13상).
사람이 살다 보면 늘 부족합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을 섬길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 말은 적게 하고 지갑을 열라”는 말이 있는데, 지갑이 비어 있으니 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꼭 무엇이 있어야만 남을 돕고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재산이 없더라도 줄 수 있는 일곱 가지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화안시(和顔施)로, 얼굴에 화색을 띤 채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언시(言施)로, 말로 베푸는 것인데 이는 사랑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양보의 말, 부드러운 말 등입니다. 셋째는 심시(心施)로,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한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넷째는 안시(眼施)로, 호의를 담은 눈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신시(身施)로, 몸으로 남의 짐을 들어준다거나 일을 돕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좌시(座施)로, 때와 장소에 맞게 자리를 내주어 양보하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찰시(察施)로, 굳이 묻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알아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또한 무엇이 있어야 구제할 수 있다면 일생 동안 남을 구제할 수 없습니다. 당시 로마 성도들은 극빈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극빈한 사람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는 데 힘썼습니다. ‘공급하다’란 단순히 나눠주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성도들의 쓸 것을 가지고 교제하라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그들의 짐을 자신의 짐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에 함께 참여하고, 실제로 그것을 스스로 느끼라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어려운 이들이 당하는 고난과 난관에 함께 참여하는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머니의 젖은 아기에게 지속적으로 빨려야 계속 나오지, 그렇지 않으면 말라버립니다. 이스라엘 땅에는 두 개의 작은 호수가 있는데, 곧 갈릴리 호수와 사해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흘러들어오는 것만큼 흘려보내기 때문에 늘 깨끗합니다. 그러나 사해는 받기만 하고 내보내지 않아 죽음의 바다, 사해(死海)가 되었습니다. 나눔과 섬김이 천국이요, 행복의 길입니다.
손 대접하기를 힘써라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하).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은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그만큼 손님 대접은 중요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바울 당시 여관은 도덕적으로 문란했고, 또 굉장히 비쌌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 돌아갈 곳이 없는 나그네들, 핍박을 받고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기독교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만 먹고 마시는 인색한 생활은 성도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구하느라고 모아놓은 재산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원수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라와 함께 친절하게 손님을 대접했습니다(창 18:1-8). 마음을 다해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손님을 대접할 수 있었던 것은 물질이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물질을 많이 소유했지만 마음이 인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요하신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셔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고후 9:8).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맘때 이삭을 선물로 주겠다는 기쁜 소식을 들려주셨습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이 말씀은 흘러가는 강, 혹은 바다에 던져버리라는 뜻입니다. 물에 먹을 것을 던지면 도로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물에 먹을 것을 던질 때는 찾을 생각을 하고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아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구제하고 도우면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프랑스 소설가 헨리 반다이크는 *대저택*이라는 작품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마을에 큰 부자가 굉장한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다가 죽어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에 가 보니 자기가 천국에서 살 집은 작은 오두막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영원히 살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한편 건너편에는 굉장한 대저택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저 대저택에 제가 살면 안 됩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안 된다. 그 집주인은 따로 있다.”
그는 다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너희 동네에 가난한 의사가 살고 있지 않느냐? 그 의사가 살 집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께 “아니, 의사가 가난하게 산 것은 그 사람 탓이지 제 탓입니까?” 하고 반문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그 의사는 항상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고, 치료비가 없으면 그냥 보내주었고, 가난한 사람의 경우 치료비를 받기는 고사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있으면 주머니를 털어서 주었다. 그러다 보니 남들은 의사로서 많은 돈을 번다고 하는데, 그는 매우 가난하게 살았단다. 바로 그 의사가 내가 마련한 이 집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의 선행은 오두막집의 지붕을 씌우기에도 부족하구나. 너는 너 자신을 위해서만 살았지. 그러나 그 의사는 평생 동안 남에게 사랑을 베풀었단다. 그가 베푼 사랑은 대저택을 짓고도 남을 분량이란다.”
평소에 주님과 교회, 그리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 나라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신앙생활은 남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양들을 위해 헌신하고, 십일조 하고, 감사헌금 하고, 주일헌금 하고, 구제헌금 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든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 헌신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한 뒤 손해 보았다, 피해의식에 빠졌다,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드린 시간, 드린 헌금, 드린 진실, 드린 헌신은 하나님 나라에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지금 드리는 모든 헌신과 봉사 역시 하나님 나라에 쌓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 헌신과 봉사는 하나님 나라에 나를 위해 저축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땅에서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랑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부지런하여 열심히 봉사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며 나누며 봉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진리의 싸움을 할 때 열심을 다하여라 모범을 보이신 예수 굽히지 않으셨네 너희는 충성을 다해 주님을 섬기어라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구원의 갑주를 입고 끝까지 싸워라”(새찬송가 57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