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로마서 12:14-21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도시 사회, 대중문화 사회, 지식정보 사회, 스마트 사회입니다. 이런 시대의 특징은 한마디로 가치관의 혼란과 인간소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사회는 열린 사회가 아니라 닫힌 사회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웃에 대해, 다른 사람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다 보면 별별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됩니다. 나를 반기고, 나를 사랑하고, 나를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즐거울 때 함께 즐거워하고, 내가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잘난 체하는 교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선을 오히려 악으로 갚는 사람도 있고, 은혜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이도 있습니다. 나를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원수 같은 이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좋은 이웃이 있는 반면에 나쁜 이웃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 웃는 모습으로 대하는 사람과 같이 좋은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악의를 품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나를 핍박하는 사람,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웃는 자에게는 웃는 모습으로 대하고, 미워하는 자에게는 미움으로 대하고, 빼앗기면 빼앗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우리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상대적입니다.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에는 보복 심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요,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이웃에 대해 바른 자세를 가질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웃에게 선을 도모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핍박하는 자에게 복을 빌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보복 심리가 있음을 아시고 일찍이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신 19:21).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셨던 당시의 사회상은 이를 상하게 했으면 그 보복으로 이만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눈을 상하게 했으면 그 보복으로 눈만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상의 보복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악을 더 큰 악으로 갚지 않게 하시려고 이와 같은 복수의 한계를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요, 사랑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복수 심리는 섬뜩합니다. “여자가 한(恨)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한풀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문화를 “한 문화”라고도 합니다. 한을 풀 힘이 없으면 노래를 불러서라도 그 한을 풉니다. 그 예가 바로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입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제가 풀어본 가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를 버리고 가려면 가라. 그러나 가기는 가지만 십 리도 못 가서 발목이 부러져 넘어질 것이다. 나를 버리고 잘되는가 한번 봐라.”
이처럼 “아리랑”의 가사에는 보복 심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남북이 만나면 꼭 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니 남북 관계가 좋아질 리가 없습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미국의 서부활극을 보면 반드시 복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호머의 *오디세이*와 *일리아드* 또한 전쟁 영웅들의 복수가 그 중심 내용입니다. 제1,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원인 또한 보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인류 역사는 보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당하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보복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요, 우리의 모습이요, 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그를 위해 복을 빌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핍박은 고난과 다릅니다. 핍박이란 아주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악의를 가지고 괴롭히는 것을 말합니다. 악의를 가지고 힘들게 하고, 악한 의도를 가지고 괴롭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만도 어려운데 그를 위해 복을 빌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세상의 방법인 보복의 원리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방법, 축복의 원리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이 70명의 제자들을 마을로 전도하러 보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느 집에 가든지 무조건 먼저 그 집에 복을 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성도가 해야 할 사명은 가자마자 복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어떤 집을 방문하든지 먼저 잠깐 묵상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때 무슨 기도를 해야 합니까? 먼저 이 집에 복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집에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이 집이 예수님을 잘 믿는 가정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자녀들에게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필요한 모든 것을 날마다 풍족하게 채워주시옵소서.”
무디 목사의 전도 성공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먼저 무조건 복을 주시도록 기도한 데 있었습니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술주정뱅이나 누구를 만나든지 복을 받도록 기도부터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복을 비는 대로 사람들이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핍박받으실 때 결코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운명 직전에 계실 때도 핍박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또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우리는 지금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복을 빕니까, 아니면 저주합니까? 성경은 한 입에서 저주와 찬송이 나오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씀합니다(약 3:9-10). 저주는 하면 할수록 저주하는 당사자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복을 빌어야 합니다(눅 10:5-6).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에 권능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한마디, 기도하는 한마디에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그런데 문제는 전도할 때나 모르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도록 기도할 수는 있는데, 바로 옆에 있던 사람, 가장 가깝게 동역했던 사람, 마음을 주고 사랑했던 사람과 관계성이 어그러졌을 때 복을 빌어주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쁜 의도로 나를 핍박하고, 악한 의도로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복을 주시도록 기도하기는 고사하고 용서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핍박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복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순종하기 쉬운 말씀만 골라서 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참 제자의 삶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성경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합니다.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생각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으시면서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우리는 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원수를 용서하고 복을 주시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량없는 사랑과 은혜와 평강의 복을 주십니다.
이웃의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하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이 말은 “동고동락”(同苦同樂)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슬픔과 고통에 익숙해 남이 불행한 일을 만나면 함께 마음 아파하고 동정을 잘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눈 뜨고 못 봅니다. 이처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류 최초의 비극이 어디에서 발생했습니까? 아벨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자 그것이 싫었던 형 가인이 동생을 죽이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 사랑은 다른 사람이 잘될 때 마음으로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기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친구나 성도를 만나면 손을 붙잡고 안아주고 등을 두드려주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나기는 만났는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멀뚱멀뚱 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즐거울 때 즐거워하지 않고, 슬플 때 슬퍼하지 않는 것은 병든 신앙입니다. 무표정은 병든 신앙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즐거울 때 함께 즐거워하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형제 사랑은 칭찬으로 나타납니다. 누군가를 욕하게 되면 세 사람이 나빠집니다. 즉 욕을 듣는 사람, 욕을 전해 듣는 사람, 욕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칭찬하게 되면 칭찬을 듣는 사람이 좋고, 칭찬을 전해 듣는 사람이 좋고, 칭찬하는 사람 또한 좋습니다. 칭찬하는 것은 밑천이 들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이웃이 잘되는 것 때문에 은근히 마음이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다면 마음을 고치고 이웃과 함께 즐거워하기를 바랍니다.
이웃에게 겸손하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롬 12:16).
우리 속에는 ‘나는 너와는 좀 다르다’고 하며 스스로 잘난 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우쭐하고 싶은 우월감,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도 ‘나는 너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을 보면 그냥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겸손한 이웃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너는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낫다’, ‘너는 나보다 훌륭하다’와 같은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이유는 겸손한 마음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제 상처를 받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겸손한 사람으로부터는 절대로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만한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에 대해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배우고자 하기 때문에 성장합니다. 성장하니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성숙하니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좋은 영향을 끼치니 존경을 받게 됩니다. 존경을 받으니 마음이 기쁘고, 삶에 여유가 생깁니다. 삶에 여유가 생기니 겸손해집니다.
이웃에게 선을 도모하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바울은 선한 일을 ‘도모하라’(be careful)고 말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또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단서가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해도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계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적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선을 도모하는 것은 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롬 12:19-20).
이 말씀에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는 원수 갚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면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저주할 권한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저주나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에게도 저주할 권리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보복하라’, ‘정죄하라’, ‘심판하라’, ‘복수하라’는 단어를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사랑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기뻐하라’, ‘칭찬하라’, ‘복음을 전하라’는 단어를 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복수하거나 피를 부르거나 피를 묻혀서는 안 됩니다.
사회가 시끄럽고 우리의 내면이 시끄러운 이유는 이웃에게 선을 도모하지 않고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살아갑니까? 우리는 운전하다가 몰염치하게 새치기하는 사람을 보고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의견과 맞지 않는다고 매도하지는 않습니까?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정죄의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까? 즉결재판소의 판사들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서 남을 판단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잘 섬길 수 있을까? 어떻게 동료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전도를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잘 섬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비전을 이룰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잠을 못 이룹니까, 아니면 ‘나를 해치고 비방하고 욕하고 헐뜯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수할까? 어떻게 보복하고 앙갚음할까?’를 생각하다가 밤잠을 설치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이 남을 판단함으로 인해 생기는 질병에 대해 정신과 의사 데이비드 핀크는 “신경 긴장에서의 해방”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그는 1만 명의 긴장과 불안감에 휩싸인 환자를 상담하다 보니 1만 명 모두가 판단 전문가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성격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 의사 선생은 이래서 이렇고, 저 간호사는 저래서 그렇고, 이 영양사는 이래서 이렇고, 저 환자는 저래서 그렇다” 등 자고 나면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했습니다. 그 후 그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처방을 내렸습니다.
“오늘부터 당신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저 감사하고 사랑하고 용서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지금 생을 마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후로 사람들은 비방하고 정죄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기보다 감사하고 용서하는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70%의 사람들이 나음을 받고 퇴원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할 일은 복수가 아니라 원수가 목말라할 때 마시게 하고, 배고파할 때 먹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여러 종류의 형벌이 있었습니다. 태형과 단두형, 교수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숯불을 올려놓는 형벌도 있었습니다. 숯불을 머리에 올려놓으니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이처럼 원수인 것을 알면서도 어려울 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면 그 사람이 머리로부터 시작해 전신이 뜨거운 사랑에 감동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불에 복수의 칼이 녹는 것입니다. 사랑의 불은 원수의 마음을 녹입니다. 사랑의 불은 원수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게 합니다.
원수를 갚는 최대의 무기는 복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녹습니다.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이를 가리켜 ‘보상적 은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핍박을 받았다면, 아름답고 선하게 살았다면, 진실하게 살았다면, 원수를 사랑으로 대했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복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웃에게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대하는 대원칙이요, 기독교 가치관의 핵심입니다. 반면에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불신자들의 가치관이고, 선을 악으로 갚는 것,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은 야만인들이나 볼 수 있는 가장 저급한 가치관입니다.
악을 선으로 이긴 대표적인 인물은 요셉입니다. 요셉에게는 자기를 팔아넘긴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을 감싸주던 아버지 야곱이 운명하자 형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혹시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하여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갚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19-21).
요셉은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며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요, 목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한을 품거나 복수심을 가지고 사는 것은 가슴에 불덩이를 가지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가슴에 불을 가지고 다니면 가슴이 숯덩이처럼 시커멓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내면은 사랑과 기쁨, 감사와 즐거움으로 충만해집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원리를 이기고 성경의 원리대로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의 원리는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고, 겸손으로 교만을 이기는 것입니다. 칭찬으로 자랑을 이기고 정결함으로 부정을 이기는 것입니다. 정직함으로 거짓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내 주 예수 여전히 날 부르사 그 참되신 사랑을 베푸시나니 내 형제여 주님을 곧 따르라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항상 비시네”(새찬송가 29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