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로마서 14:1-12
비판하지 말라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4:1).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믿음의 수준은 천차만별입니다. 성숙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미성숙한 사람도 있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믿음이 어린 사람도 있습니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불분명한 사람도 있습니다. 개념이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무개념의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갈등과 분쟁이 있기 마련입니다.
초대 교회 역시 곳곳에 갈등과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났던 교회입니다. 방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런 교회에도 분쟁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 신앙이 복음 신앙을 위협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은혜가 많은 교회로 소문이 났지만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자매가 서로 한 마음이 되지 못했습니다. 골로새 교회와 에베소 교회에도 기독론과 교회론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살펴보면 분쟁과 분열로 점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해방 후 60년 동안 한국 교회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바울 당시 로마 교회 안에도 믿음이 강한 성도와 믿음이 약한 성도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항상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바르게 세워나가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을 영접하라
당시 로마 교회에는 믿음이 강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이 있었습니다(롬 14:1-3). ‘믿음이 연약한 자’란 믿음의 연륜이 짧은 초신자들을 말합니다. 초신자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잘 넘어집니다. 당시 믿음이 약한 자들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안식일과 절기를 지켜왔습니다.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깨끗한 음식물과 부정한 음식물을 엄격하게 구분해 가려먹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상인들이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는 것은 곧 우상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그런 것에서 자유로웠습니다. 그들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으며 “별것 다 따지네. 고기는 그냥 고기이지. 거기에 귀신 이빨 자국이 있나? 침이 묻어 있나?” 하며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막 7:15-16 참조)고 하며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먹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먹지 않는 돼지고기와 개고기도 잘 먹었습니다. 그들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로 인해 서로 간에 장벽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판단하고 미워하고 정죄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향해 복음의 비밀도 알지 못하고 율법에 얽매인 형식주의자요, 완고한 채식주의자라며 비난했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믿음이 강한 사람들을 향해 돼지같이 아무것이나 먹는 불결하고 경건치 못한 자들이라며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같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함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돕고 있습니까? 그는 비판하지 말고 받으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롬 14:1-3상).
바울은 믿음이 약한 사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받으라'(accept)란 영접하고 수용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비판하지 말고 영접하라고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남을 비판합니까? 각기 생각의 다름을 수용하거나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얼굴이 똑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쌍둥이도 똑같은 것 같지만 똑같지 않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각기 생각이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름과 다양성을 수용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틀린 것과 다른 것을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수 중에 소수가 있을 경우 이를 틀린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소수는 생각이 다르고 시각이 다를 뿐 틀린 것이 아닙니다. 남들과의 다름은 차별이요, 차별성은 다른 사람보다 개성이 있고 남다른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아주 다를 경우 이는 독보적으로 유일한 것입니다.
같음에는 창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창조는 언제나 다름에서 옵니다. 창조는 주관적인 것이 객관화된 것입니다. 따라서 내 생각과 맞지 않으니 무조건 틀린 것이라는 흑백 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되고, 총천연색, 무지개 색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검정색과 흰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빨간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고, 분홍색도 있습니다. 사람도 각기 다릅니다. 같은 자녀라 할지라도 각기 다 다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이해가 되고 수용하게 됩니다.
믿음 또한 다양합니다. 믿음에는 붕어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건강한 사회에서 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반면에 획일적인 사회는 폐쇄된 사회입니다. 북한은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 획일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건강하지 못합니다.
사회가 분열되고 교회가 깨지는 것은 각기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깨지는 것도 부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차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은 인정하기는커녕 남자를 여자로 만들고, 여자를 남자로 만들려고 합니다. 자기와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갈등이 생깁니다.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름을 말합니다. 화성인 남자가 망원경을 통해 저 멀리 금성의 아름다운 여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화성인을 본 금성인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 신기하게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지구로 오게 되었고 기억상실증으로 인해 자신들이 원래부터 다른 행성에서 왔고,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서로에 대한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해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화성인은 스트레스를 받거나 고민거리가 있으면 동굴 안으로 들어가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반면에 금성인은 누군가에게 문제를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데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화성인은 고무줄과 같아서 잡아당겨질 때까지 최대한 멀어지고자 하는 반면에 금성인은 파도와 같아서 사랑받는다고 느낄 때 자부심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어느 순간 갑자기 기분이 바뀌면 사정없이 곤두박질쳤습니다.
화성인과 금성인, 즉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행성에서 왔기 때문에 사고방식과 사고내용, 그리고 생활양식이 달랐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성차를 인정해야 합니다. 각기 다름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3하-4).
하나님은 채식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고, 고기 먹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받아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정죄하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감히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남을 비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너 나 할 것 없이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남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마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현대인들의 최대 위기는 엇갈림, 관계의 위기라고 했습니다. 왜 인간관계가 엇갈리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일까요? 이는 무분별한 비판을 쏟아붓고 비판의 태도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비판하게 되면 비판하는 사람의 마음 역시 황폐해집니다. 남을 비판하게 되면 인간 관계성이 깨어져 한 사람의 동역자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비판하는 곳에서는 가정이 깨지고, 국론이 분열되고, 교회가 시험에 듭니다. 따라서 비판하기보다 이해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누구를 비판하고자 할 때 정면으로 비판하지 말라. 또 사람이 안 보는 데서 남을 비판하는 것은 더 나쁘다. 그때 그가 말하는 것을 모른 척하라. 더 중요한 것은 아예 비판하는 사람을 보지 말라. 허물이 될 이야기는 듣지도 말고, 비판해야 할 이야기는 기억도 하지 말라. 좋은 점만 보려고 노력하라. 이것이 제일 아름다운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롬 14:5).
바울은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적인 것이 있고, 윤리적인 것이 있습니다. 절대적인 것이 있고, 상대적인 것이 있습니다.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고,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고, 비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이 있습니다. 교과(text)가 있고, 상황(context)이 있습니다. 형식적인 것이 있고 내용적인 것이 있습니다. 형식은 변하지만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문화는 변하지만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상황은 변하지만 교과는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신앙 문제만큼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본질적인 것들을 붙들었습니다. 반면에 상황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너그러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반대로 비본질적인 것,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리처드 칼슨은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니까 절대적인 것은 양보하고, 양보할 문제 앞에서는 절대를 주장하는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이 지키던 월삭,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의 절기가 있었습니다. 이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절기들이고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날들을 귀히 여기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날이 동일한 날이니 특별히 이날만을 거룩하게 지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금요일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이므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로 정해서 지켰습니다.
오늘날 주일을 지키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 운동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주일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 운동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주일 예배를 드린 후에 운동하고 안 하고는 옳고 그름을 따질 만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비본질적인 문제에 속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서로 용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누구도 자기를 위해 살 수 없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로마서 14장 6-12절을 보면 ‘위하여’라는 말이 여덟 번 나옵니다. 이것은 목적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고,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목적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은 목적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됩니다. 사용되는 목적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라는 목적이 우리의 삶의 과정보다 우선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느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적보다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단 살고 보자”, “일단 먹고 보자”, “우선 살고 볼 일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목적을 중하게 여깁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롬 14:7).
세상에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 자기를 위해 죽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여자들은 화장을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화장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예쁘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살고 죽는 것보다 목적이 우선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삶의 의미가 분명해지고, 그 목적이 원대하면 그만큼 삶이 원대해집니다. 반면에 목적이 없고, 그 목적이 변변치 않으면 그 삶 또한 가치와 의미가 없어지고, 그 삶 또한 변변치 않습니다. 열심히 살기는 했는데 목적이 없는 삶을 살았다면 이는 인생을 헛되이 산 것입니다.
모든 사물에는 그 본래의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를 위해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나 됨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본래의 목적에 역행하게 될 때 불행해지고 기쁨도 사라지게 됩니다. 자기만을 위한 삶의 결국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입니다. “버는 놈 따로 있고 쓰는 놈 따로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를 위해 미련스럽게 재산을 모으거나 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을 위해 물질을 모으고 이를 위해 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땅에 물질을 쌓아두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우리가 사는 것이 자기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요, 또 죽는 것도 자기를 위해 자기 마음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는 ‘내’가 주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어가 되는 삶입니다. ‘나를 위해’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로 목적이 달라집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롬 14:9). 이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겨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사람은 근본적으로 형제를 판단하거나 업신여길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로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똑같이 서야 할 죄인들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도, 형제를 업신여기는 사람도 똑같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기 혀로 자기 죄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약한 자라고 해서 하나님이 봐주시지 않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롬 14:11).
우리는 때로 서로가 다 주를 위해 행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때는 무엇이 하나님을 위해서인지 구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사건건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다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
하나님의 심판대 앞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가지고 나가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각 사람이 자기 일을 직접 하나님께 고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각 사람이 홀로 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입니다. 심판대 앞에 서서 “주님, 저는 주를 위해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할 때 주님이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도다”라고 하면 주를 위해 산 것이고,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하면 평소에 주를 위해 살았다고 하나 사실은 자기를 위해 산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서서 하나님께 직고하는 자세로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하신 것처럼 우리도 연약한 사람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복음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