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로마서 14:13-23
걸림돌이 되지 말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롬 14:13).
사랑에는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은 믿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방의 말을 모두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습니다.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신뢰합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얼굴 표정만 봐도 다 압니다. 설명을 다 듣고 나서, 이해관계를 다 따지고 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둘째, 사랑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이해합니다. 상대방의 사정과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셋째, 사랑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현재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어린아이처럼 유치할지라도 기다려주고 참아줍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이 힘들어지면 이미 사랑이 떠난 것입니다.
후진국의 법은 강자와 자기를 위한 법입니다. 반면에 선진국의 법은 약자에 대한 배려가 그 기초가 됩니다. 본문을 보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거칠 것이 있게 하거나, 약해지게 할 수 있는 요소를 두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타인에 대한 배려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원칙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약자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부딪칠 것이 되지 말라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내 생각이 옳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내게는 옳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덕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롬 14:13).
본문에서 ‘부딪칠 것’이란 장애물을 말하고, ‘거칠 것’이란 덫을 가리킵니다. 장애물과 덫에 걸리면 누구든 넘어지거나 다칩니다. ‘주의하라’(make up your mind)는 결심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서로 판단하지 않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할 수 있는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고의적으로 형제 앞에 장애물이나 거칠 것을 두어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대개 부주의하여 형제를 넘어지게 합니다. 특히 사소한 문제로 넘어지게 합니다. 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 생각 없이 한 행동이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항상 자신의 말과 행동에 조심해야 합니다.
‘거칠 것’이란 구체적으로 음식을 뜻하는 것으로, 음식으로 인해 형제를 근심하게 하면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롬 14:15상). ‘근심하게 한다’란 형제를 망하게 하는 것, 신앙생활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먹는 문제로 인해 형제를 근심하게 하고 영적으로 힘들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넘어지게 하는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약점이 있습니다. 그 약점을 건드리면 누구를 막론하고 감정이 상하고 혈압이 오릅니다. 키 큰 사람은 키 큰 사람대로 약점이 있고, 키 작은 사람은 키 작은 사람대로 약점이 있습니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바로 상대방의 약점과 장점을 알아서 약점은 감싸주고 장점은 칭찬하는 것입니다. 왜 부부 싸움을 합니까? 기분 나쁜 말만 골라 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나 선후배 사이가 왜 틀어집니까? 이 또한 상대방의 약점이나 기분 나쁜 말만 골라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나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한마디 한 것밖에 없는데, 그런 말 가지고 뭐 그래?”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줍니다. 고통을 줍니다. 이로 인해 끝내는 인간관계가 틀어지고 실족하게 됩니다.
바울은 음식 문제로 형제를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롬 14:15). 그렇다면 음식이 나쁜 것입니까?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
바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다 선하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모두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저속한 사람들이 선하고 정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작품들을 속되게 바꾸었습니다. 예를 들어 포도는 탐스럽고 향기롭고 정한 과일입니다. 하나님은 포도를 누구나 먹고 즐길 수 있도록 아름답고 맛있고 정한 과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깨끗하고 정한 과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포도주를 만든 것까지는 좋습니다. 포도주는 포도주대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위가 나쁜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조금씩 들라고 권하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중동 지방은 물이 좋지 않아 그대로 마실 수 없기 때문에 포도주를 만들어 음료수로 사용합니다. 특히 성만찬 때 주님은 포도주 잔을 드시고는 “이는 나의 피다”라고 하시며 영원토록 성찬식을 가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포도주를 잘못 사용할 때 일어납니다. 포도주를 잘못 사용하면 불행해집니다. 1985년 바바라 톰슨이 쓴 *한 잔 술로 죽어간다*라는 책을 보면 방화와 익사 사건의 80%가 술 때문이고, 폭력 사건의 60%가 술 때문이고, 자살 사건의 30%가 술 때문이라고 합니다. 알코올중독자가 되면 인격이 파산하고, 가정이 깨지고, 급기야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먹는 식물 자체가 속된 것이 아니라 속되게 여기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소유하면 깨끗해지고, 더러운 마음으로 보고 듣고 소유하면 더러워집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롬 14:15-16).
음식 먹는 문제로 형제를 근심하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근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음식 문제로 형제를 근심하게 하는 것은 주님이 피로 사신 형제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먹는 문제로 형제를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에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가장 많이 부딪치는 문제는 술, 담배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그리스도인은 금주, 금연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금연과 금주는 한국 교회의 하나의 전통일 뿐 복음은 아닙니다. 한국 교회가 이런 전통을 갖게 된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던 초창기에는 술, 담배를 허용했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지금의 이화여고 자리에 장 정승댁이라는 큰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의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고 집을 성도들에게 개방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 집에서 1년에 몇 차례씩 사경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하루에 네 번씩 휴식 시간이 있었는데 틈틈이 술과 담배가 제공되었습니다. 당시는 담뱃대로 담배를 비벼서 피우던 시절이었습니다. 믿는 남자들이 허리춤에 담뱃대를 꽂고 와서 쉬는 시간에 둘러앉아 담배를 피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토요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곤드레만드레 되어 주일 예배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나라를 잃은 뼈아픈 슬픔 속에서도 하루도 쉬지 않고 술을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고, 도박을 했습니다. 이러다가는 조선의 장래가 희망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190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조선 기독교 7대 강령’을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예배에 빠짐없이 출석할 것, 둘째,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 셋째, 부모에게 효도할 것, 넷째, 일부일처제를 지킬 것, 다섯째, 가족을 구원시킬 것, 여섯째, 근면 성실하게 일할 것, 일곱째, 금주 금연할 것.
그래도 해결이 잘 안 되어 1914년에는 이 일곱까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장로로 세우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인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전통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는 한국 교회가 세속화되지 않고 놀랍게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믿는 사람들에게 “성경에 술 취하지는 말라는 말씀은 있지만 술 마시지 말라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다”고 하며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면서 술을 권유합니다. 그들의 말은 맞습니다. 성경에 술을 마시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술, 담배는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니 나는 자유롭다”고 하며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에게는 술을 마실 자유가 있고 담배를 피울 자유가 있다”고 하며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교회에 다니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제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성경을 읽고 메시지를 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연약한 형제는 실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가 실족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자기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린 사람들에게 걸림이 된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를 부부로 비유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과 아내로서 서로 얽매이게 됩니다. ‘얽매인다’란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것은 부부가 아닙니다. 서로에게 많이 얽매일수록, 책임을 강하게 느낄수록 좋은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한 지체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매임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아무리 자유와 권리가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위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우리는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우리는 사랑으로 종 노릇 해야 하고 사랑의 의무 앞에 절제해야 합니다. 성경에 비추어 죄냐 아니냐를 떠나 자신의 자유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형제를 실족시키지 않는 것이 믿는 자들의 도리입니다.
화평과 덕을 세우는 데 힘쓰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마시고 싶은 대로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안과 희락입니다. 여기에서 ‘성령 안’이란 ‘그리스도 안’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 평강, 희락입니다. 세 가지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다 온전히 성취되어야 합니다. 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입니다. 평강은 서로서로 화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희락은 마음의 기쁨입니다.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 화평은 서로와의 관계, 희락은 나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이와 같이 의와 화평과 희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복을 받게 될까요?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는 하나님께 영광, 자신에게는 기쁨, 사람들에게는 칭찬을 듣게 됩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화평에 힘쓰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19).
우리는 사소한 문제로 싸울 것이 아니라 화평하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화평입니다. 불화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사탄은 서로에게 불신을 심어 분열시킵니다. 부부 간에 불신을 심어 가정을 깹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평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마 5:9). 화평으로 심으면 의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약 3:18).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19하).
베드로는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말했습니다(벧후 1:5). 믿음은 신자의 삶의 기초요, 뿌리요, 터입니다. 이 믿음 위에 덕을 쌓아야 합니다. ‘덕’이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자신의 자유만 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고 생각하는 것이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음식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우리는 식물로 인해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거리끼는 일을 하지 말라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 14:20-21).
‘아름답다’(καλὀς)란 선하다는 뜻입니다. ‘선’이란 이웃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고 부담과 고민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은 선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안겨줍니다. 선은 한마디로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부담을 주지 않으니 사람들이 좋아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니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이것이 아름다움입니다.
믿는 바 확신을 가지라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살다 보면 줏대 없는 삶을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 확신과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경건의 형식은 다를 수 있지만 경건의 내용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경건의 형식은 양보할 수 있어도 경건의 내용만큼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봐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확신이 있으면 밀고 나가야 합니다. 지류는 양보하되 본류는 강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곁가지는 양보하더라도 본가지는 붙들어야 합니다. 다 양보하더라도 복음만큼은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더라도 자기 양심과 신앙의 자유만큼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믿음을 좇아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
‘죄’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진실을 말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내세웁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얻은 자유를 남용하여 약한 자를 넘어뜨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모든 일에 화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또한 자기 양심의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