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로마서 15:1-13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바울이 로마서 14-15장에 걸쳐서 계속 말하는 주제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서로의 관계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14장 1-12절은 믿음이 어린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14장 13-23절은 비판하지 않는 데 그치지 말고 더 나아가 거칠 것을 그 앞에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회에는 똑똑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도 역시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 교회에서 믿음이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사회에서 똑똑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비실거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강한 군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강하라”(수 1:6상; 딤후 2:1; 고전 16:13)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이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강하게 해주십니다. 기도와 믿음으로 무장한 사람은 100만 대군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러면 강해진 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바울은 본문에서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
교회는 각계각층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세상에 교회만큼 이질적인 공동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단체들은 어떤 공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취미를 중심으로 모이는 동호회, 동향인끼리 모이는 향우회, 종씨끼리 모이는 종친회, 같은 학교 출신끼리 모이는 동창회, 그리고 전우들끼리 모이는 전우회가 있습니다. 그중에 유별난 해병전우회도 있습니다. 저 역시 해병 출신입니다만 그들의 공통된 특성으로 인해 구성원들이 쉽게 어울릴 수 있고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자연적인 성향으로는 함께 어울릴 수 없고, 태생적으로도 하나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띠가 있는데, 그것은 곧 복음과 거룩한 사명, 그리고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모두 찬양하며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알리세”(복음성가).
문제는 사랑과 믿음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차이가 천차만별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있는 반면에 믿음이 약한 자도 있습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사랑이 좀 부족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명이 투철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이 약한 사람은 강한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강한 자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앞뒤가 꽉 막혀 있지 않습니다. 생각이 깊고 넓으며 이해심 또한 많습니다. 사소한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쉽게 불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쉽게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쉽게 분내지 않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약한 사람은 아주 작은 것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까다롭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사소한 일에 얽매입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행함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남을 잘 비판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자기에게 적용시키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킵니다. 자기도 못하면서 남의 약점을 뜯어고치려고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유치합니다. 잘 토라지고, 잘 삐치고, 쉽게 분을 냅니다. 의지가 약하고 감정처리가 미숙합니다. 생각이 얕습니다. 교회에 이런 연약한 사람들이 많으면 바람 잘 날 없이 늘 시끄럽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강한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는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했습니다. ‘담당하다’(bear)란 부담하다, 내 것으로 받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예수님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상).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하).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예수님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담당하다’를 짐을 지는 것으로 바꾸어 표현했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짐을 지다’(bear, KJV)란 남의 실수를 자기의 실수로 여겨 이해하고 믿고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남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남의 고통과 함께하고, 남의 슬픔과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던지지 말고 함께 고난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의 실수를 보면 조롱하고 비웃고 정죄하고 손가락질합니다. 그 사람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약한 자나 강한 자나 모두 필요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춘추좌씨전*을 보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옵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입니다. 하루는 이가 입술을 원망했습니다.
“나보다 희지도 않고 단단하지도 않은 주제에 잘났다고 내 앞에서 떠들어!”
그런데 어느 날 넘어져서 입술이 깨졌습니다. 이는 깨진 입술을 보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것 봐, 까불더니 쌤통이다!”
그런데 겨울이 되어 찬바람을 맞자 이가 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이가 입술의 고마움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입술이 그동안 찬바람을 막아주었구나.”
이처럼 성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됩니다.
“저의 죄 짐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남의 죄 짐까지 져줄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서로 짐을 져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그리스도의 사랑을 뜻합니다. 사랑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남을 돕고 섬기고 베푸는 것입니다. 사랑은 약자에 대한 배려요, 섬김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은 강자가 약자를 무시하는, 즉 약육강식이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일수록 약자를 배려하고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남도 사는 길입니다.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던 선다 싱이 고통을 함께 나눈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그가 친구와 함께 눈 덮인 산길을 가다가 얼어서 죽어가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에 그는 함께 가는 친구에게 그 사람을 돕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나도 힘든데 어떻게 그 사람을 업고 갈 수 있느냐며 먼저 가버렸습니다. 혼자 남은 선다 싱은 쓰러진 사람을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갔습니다.
얼마 동안 가니 혼자 살겠다고 간 친구가 눈 속에 파묻혀 죽어 있었습니다. 친구는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죽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선다 싱은 얼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업고 가다 보니 땀이 나고 온기가 생겨 자기도 살고 그 사람도 함께 살았습니다.
이처럼 자기 혼자 살고자 하면 죽고, 남을 살리고자 하면 자기도 살고 남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의 짐을 서로 져주는 것이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복된 길입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본래 무교회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그가 무교회주의자가 된 것은 미국 유학 중에 그의 아내가 사소한 실수로 출교를 당한 데 있습니다. 그는 교회가 이런 사소한 죄를 용납하지 못하고 그 아픔을 감당하지 못하면 무엇 때문에 교회가 필요한가 하며 무교회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약자를 품어주고 감싸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의 죄 짐을 져줄 때 무겁던 죄 짐이 가벼워지고 작아집니다. 반면에 비난하고 정죄할 때 그 죄 짐은 더 커져서 감당할 수 없게 되어 결국 넘어지게 합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바울은 성도라면 마땅히 남의 약점을 비판하지 말고 담당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마땅히’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하).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기쁨과 행복보다 자기 자신의 기쁨과 행복에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남의 행복과 기쁨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접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도우려면 자기를 즐겁게 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기 것을 챙기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섬길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강한 자입니까, 약한 자입니까? 강자는 성숙한 사람이요, 약자는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교육(education)은 라틴어 ‘e’(빼낸다)와 ‘ducare’(끌어올린다)에서 온 단어로, 내부적 능력을 개발시키고 미숙한 상태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여 성숙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부모가 자녀를, 교사가 학생을, 선배가 후배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우리 모두는 미성숙합니다. 부모이지만 성숙하지 못합니다. 목자이지만 성숙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성숙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어리고 미숙합니다. 우리는 미성숙하기 때문에 돌봄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하고, 배움이 필요하고, 섬김이 필요합니다. 한편 미성숙한 우리보다 더 미성숙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주위에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미성숙한 사람, 연약한 사람들이 널려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연약한 자야”, “나는 도움이 필요한 자야”,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 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예레미야는 자신을 가리켜 ‘아이’라고 했습니다(렘 1:6). 그의 말을 들으신 하나님은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렘 1:7).
우리는 스스로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는 한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고, 섬길 수 없고, 한 사람도 전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늘 약하고 부족하고 어린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낮은 자존감을 버리고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고 돌봐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부족하고 약하고 어리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2).
‘선을 이루다’란 약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유익을 끼친다는 뜻입니다. ‘덕’이란 하나님 앞에서도 선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선하고, 이웃에 대해서도 선한 것으로, 이 세 관계가 합쳐져서 온전해질 때 덕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부득불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으면 이것은 아주 이상적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나의 유익을 버리고 너의 유익을 택하는 것이 덕입니다. 또한 너에게도 좋고, 하나님께도 좋으면 그것은 최상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부득불 선택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택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택해야 합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선을 이루는 것이고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죄로 여깁니다. 성경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갈 1:10상).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엡 6:6).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여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덕이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의지입니다. 덕을 세우기 위해 우리는 주도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시기 위해 모든 비방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15: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기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비방의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모든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주홍글씨*의 주인공 헤스터와 같이 일생 동안 죄의 표적을 가슴에 매달고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비방과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방의 표적이 되셨고,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셨고, 채찍을 받으셨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고, 창에 허리를 찔리셨고, 피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자신을 기쁘게 하시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어 그들을 징벌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처절한 죽음을 당하시면서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 또한 연약한 자들을 위해 모든 비방을 다 받았습니다. 사방으로 욱여쌈과 답답함을 당했습니다(고후 4:8).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고전 15:31). 이런 바울로 인해 많은 양떼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수없이 넘어졌지만 주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주님을 배반했지만 주님은 우리를 한 번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덕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소망을 붙들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께 이르기까지 덕을 세울 수 있습니까? 이를 위해서는 성경 말씀으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모든 말씀은 우리를 위한 교훈입니다. 성경은 인내와 위로를 통해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성경에는 고난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그중 대표적인 말씀은 욥기입니다. 우리가 욥기를 읽으면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인내와 위로를 주시고 소망이 넘치게 해주십니다. 성경은 온갖 어려움을 인내하게 해줍니다. 성경은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로해 줍니다. 성경은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가 소망을 잃지 않게 해줍니다. 성경은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료해 줍니다. 성경은 맺힌 한을 풀어줍니다.
어려울 때 절망 속에서 스스로 문제를 풀려고 하면 풀 수 없습니다. 절망 속에서는 절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희망 속에서만 절망의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절망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만 풀 수 있습니다. 어두움에서는 어두움을 풀 수 없습니다. 오직 밝음에서만 어두움을 풀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은총을 주십니다.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속에 문제의 답이 있습니다.
이어령 교수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도, 예수님의 부활도, 구원도 부정하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회심하도록 만들었습니까?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외손자의 과잉행동장애와 딸이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자신이 평생 쌓아올린 지식과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딸과 외손자를 통해 이성과 과학을 초월한 치료의 기적을 목격하면서 절대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더 말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사건은 기적보다도 말씀에 있었습니다. 그는 욥기를 읽으면서 지상의 언어를 버리고 천상의 언어를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욥기를 안 읽었다면 나는 세례를 못 받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지상의 언어를 버리고서 나는 캄캄한 가슴에 작은 별 하나 담은 게 아니라, 저 하늘, 어둠 속에 붙박인 별들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자신의 능력과 지식이 해체되고 창조주와 구원의 주이시며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하고 천상의 언어를 얻은 그 성스러운 곳,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욥기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그를 만나주셨고,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그는 성경 말씀을 통해 인간의 한계와 지식과 과학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손길과 영원한 세계를 발견하고 천상으로 가는 길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유일한 텍스트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집처럼 편안함을 느낀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유일한 텍스트입니다. 성경은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불행을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어줍니다.
한마음,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5-6).
인간의 의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형제의 약점을 감당해 주고 싶어도 잘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로마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더 이상 갈등하지 않고 서로 뜻이 같게 해주시고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지 않으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게 해달라는 기도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출신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능력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같은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같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사명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서로 받아들여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받으라’(accept)란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영접하고 친교를 나누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다 보면 환영받기보다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도할 때 환영을 받는 경우보다 거절당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입사원서를 내지만 회사에서 우리를 잘 받아주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슬픔이 있지만 거절당하는 고통만큼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거절당하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삶의 의욕이 없어집니다. 마음에 상처와 앙금이 생깁니다.
우리가 이처럼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영접하고 환영하고 함께 친교를 맺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받아주지 않으면 그들은 설 곳이 없고, 쉴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상처받고 고통당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영접하고 함께 친교를 맺어야 합니다.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롬 15:8).
‘내가 말하노니’란 예수님이 할례의 추종자가 되심으로 두 가지 일을 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곧 첫째로 유대인들의 구주가 되셨고(갈 4:4-5; 창 17:1-21; 롬 4:12상), 둘째로 이방인들의 구주가 되셨다는 것입니다(롬 15:9상).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다 영접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하나님의 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연약하고, 상처가 많고, 서로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를지라도 서로를 영접하고 존중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바울은 시편과 이사야 말씀을 근거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 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롬 15:9하).
일인칭은 유대인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열방 중에서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셨습니다. 열방은 유대인들이 누리는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롬 15:10). 이로 인해 유대인들과 함께 세계 만민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롬 15:11). 이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가 건설됩니다(롬 15:12). 선지자들은 온 세상이 하나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는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망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소망의 하나님은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게 해주십니다. 기쁨과 평강이 충만해지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소망이 넘치게 해주십니다. 이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소망입니다. 이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됩니다. 그날 우리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소망의 하나님을 믿고,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고, 소망의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강한 자가 되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고,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