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로마서 15:14-21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로마서의 본론은 15장 13절의 기도로 끝났습니다. 이제 15장 14절-16장은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바울의 개인 기도제목과 로마 성도들에 대한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가장 슬픈 것은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치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정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집안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온 가족이 기뻐합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기뻐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한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5:7). 이를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롬 15:16). 복음의 제사장의 직무는 한마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직무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로마 성도들을 칭찬하는 바울
로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로마 성도들을 칭찬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롬 15:14).
바울은 로마 성도들이 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으며, 또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칭찬했습니다. 누가 훌륭한 사람입니까?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입니까? 훌륭한 사람이란 상대방의 좋은 점을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남을 칭찬해 주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상대방을 칭찬하는 데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칭찬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켄 블랜차드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에 등장하는 주인공 웨스 킹슬리는 회사의 중역으로, 회사와 가정에서 인간관계로 많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플로리다에 출장을 가 있는 동안 우연히 씨월드 해양관에 가서 범고래의 멋진 쇼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3톤이나 되는 범고래가 저렇게 멋진 쇼를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범고래 조련사를 만나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조련사는 그에게 ‘고래 반응’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첫째, 범고래가 쇼를 멋지게 해냈을 때는 즉각적으로 칭찬하라고 했습니다. 행동과학에서도 60초 이내에 칭찬할 때 효과가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 실수를 했을 때는 질책 대신에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라고 했습니다. 셋째, 중간 중간 계속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고래 반응을 사용한다면 가정에서 존경받는 부모, 직장에서 성과 높은 비즈니스맨이 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일본의 파동학자 에모토 마사루는 그의 책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물도 사랑에 반응한다고 했습니다. 물을 향해 “너를 죽여버리겠다. 너를 증오한다”며 저주를 하면 물의 결정체가 흉악하게 깨져서 아주 형편없게 되고, 결정체 가운데에 보기 흉한 구멍이 생기고, 파장이 날카롭게 변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물에게 “사랑해. 감사해” 하고 칭찬하고 복을 빌어주면 물의 결정체가 아름다운 육각수로 변하여 부드럽고, 파장에 규칙적인 굴곡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는 사랑의 주파수가 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생명이 없는 물이라 할지라도 미움을 받으면 결정체가 무너지고, 사랑을 받으면 활기차고 아름다워진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 몸은 80% 이상이 물로 되어 있습니다. 태아는 100% 물속에서 자랍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미워하고 분노하고 심한 욕을 하면 체내의 물이 어떤 형태로 변할까요? 흉하고 무질서한 혼돈 속에 80%의 물이 결정을 잃게 될 것이 뻔합니다. 질서를 잃은 물은 병균의 침투에 저항력을 잃어버리고, 그 결과 온갖 질병의 서식처가 되고 말 것입니다. 반면에 칭찬을 하면 사람 몸속에 있는 물은 아름다운 육각형이 되어 온몸에 건강과 생명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물이 가장 아름다운 모양으로 변하니 영적 건강과 육적인 건강, 그리고 정신 건강이 좋아질 것입니다. 태아 또한 건강하게 자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남을 미워하고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침묵이 금이다”, “과묵이 미덕이다”라고 하며 침묵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만나면 서로 감사하고, 서로 기뻐하고, 서로 기도해 주고, 서로 칭찬합시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책망하기보다 축복하고 칭찬해 줍시다. 그럴 때 자녀들이 건강하고 축복된 자녀들로 자라게 됩니다.
로마 성도와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바울
구원의 은혜를 나누고자 함
로마 성도들은 착하고, 성경 지식이 해박하며, 서로 권하는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이런 교회에 바울이 편지를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은혜를 나누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롬 15:15).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로마 교회와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 은혜는 가장 먼저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기 자신이 복음의 원수요, 복음의 훼방자요, 죄인 중의 괴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는 인간적인 조건으로 보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열렬한 신봉자로 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을 만난 순간 주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하나님은 죄인이었던 바울을 조건 없이 구원하셔서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는 이 은혜가 놀랍고 감격스러워서 일생 동안 은혜에 빚진 자로 살았습니다.
존 뉴턴은 과거 노예 선장으로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중 술에 취해 장난삼아 예배드리고 있는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예배당 맨 뒷좌석 구석에 앉아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던 그가 갑자기 숙연해지면서 눈에서 눈물이 흘렀고, 거만했던 고개가 숙여졌고, 드디어 자기도 모르게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날 그가 들은 설교는 누가복음 15장,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탕자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말씀이 그의 심령에 부딪쳤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새 사람이 되어 세상 떠날 때까지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는 천국에 가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면 세 가지 놀라운 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내가 천국에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다음은 분명히 천국에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없는 것이고, 그 다음은 나 같은 죄인이 천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그동안 돈벌이의 대상이었던 아프리카 흑인들의 영가에 맞춰 찬송가를 작시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새찬송가 305장).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은혜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우리는 전도를 은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도하는 것을 일로 생각하여 매우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전도를 은혜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왜 은혜가 됩니까?
첫째,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전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롬 15:16상).
여기에서 ‘일꾼’(minister)은 노예나 머슴이 아니라 성직자, 장관이라는 뜻입니다. 성직자나 장관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잘난 사람을 제쳐두시고 우리를 부르사 복음 전하는 자로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의 입술로 복음을 전하여 영원히 지옥 형벌에서 죽을 죄인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직분을 영광스럽고 감사히 여겼습니다(롬 11:13; 딤전 1:12).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하고 똑똑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쓰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면에 약하고 무능하고 가진 것이 없어서 무시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쓰임받게 되면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본 회퍼 목사는 부르심 자체가 은혜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되고, 무엇을 많이 가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업과 소유에 주님을 위한 사명이 부여되는 것이 중요합니다(직업+사명).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은혜가 아닙니다. 그 돈이 하나님을 위해 쓰임받을 때 은혜가 됩니다. 사회적인 지위를 가졌다고 해서 은혜가 아닙니다. 그 지위가 하나님께 쓰임받을 때 은혜가 됩니다. 학문이 많다고 해서 은혜가 아닙니다. 그 학문이 하나님께 쓰임받을 때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받을 때 은혜가 되고 귀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크게 복 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만의 큰 특권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둘째,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롬 15:16중).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을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됩니까?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원수끼리는 화해가 필요합니다. 화해에는 제사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출 28:1).
‘제사장’이란 히브리어로 코헨(Kohen)으로, 서 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이 있는 성막에는 의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늘 서서 섬깁니다. 제사장은 섬기는 자입니다. 또한 제사장은 라틴어로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 역할, 즉 중보자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영화롭고 영광스러우며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직무를 아무나 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다윗 같은 훌륭한 왕도 제사장 직분을 대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웃시야는 훌륭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물을 드리다가 문둥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구약 시대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제사장 직분을 넘보다가는 큰 변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런 제사장 직분을 자신에게 맡기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바울과 같은 특별한 몇 사람에게만 제사장 직분을 맡기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베드로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켜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사도 요한은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들을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10).
요한은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렸습니다(계 1:6). 따라서 내가 과거 어떤 사람이었는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으면 거룩한 제사장, 왕 같은 제사장이 됩니다. 이 직분을 천사도 흠모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끝까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새찬송가 508장).
제사장의 직분은 중보기도와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양이나 소를 잡아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이방인을 제물로 드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정결하고 흠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요, 부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물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그들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하).
우리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성령께서 추한 죄인들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해 주십니다(딛 3:5).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성령께서 추한 죄인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주십니다. 운명주의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를 영접하고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교만한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절망과 미움으로 병든 마음이 희망과 기쁨으로 변합니다. 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복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비전이 없던 사람이 미래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와 같이 전도의 열매가 곧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었고, 이를 위해 복음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제사장으로서 의 직무유기입니다. 전도는 신앙생활에서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셋째, 전도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롬 15:17-19상).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특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것은 성령의 체험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곳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막 16:15-17). 사복음서나 사도행전을 보면 표적과 기사의 능력은 모두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눈먼 자가 눈을 떴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랑하고 간증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랑을 하게 되고 남의 흉이나 보게 됩니다. 반면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에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니 매사 자신감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니 성령께서 하신 일을 자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니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바울의 개척정신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19하-20).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은 후에 10여 년 동안 1, 2, 3차에 걸쳐 선교 여행을 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 아가야, 마게도냐 지방을 종횡무진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현재의 유고슬라비아)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습니다. 이 거리를 합산하면 무려 2,000km나 됩니다. 바울은 이 먼 거리를 걸어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할 수만 있으면 미개척지에 가서 전도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이런 개척정신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5:21).
바울의 개척정신은 목자의 심정에서 나왔습니다. 목자의 심정은 그를 안주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복음을 전할 새로운 도시를 위해 기도했고, 가서 전도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과 마게도냐 지방에 더 이상 복음을 전할 곳이 없게 되자 이제 로마를 거쳐서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음의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주님께 거룩한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전도할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믿음이 성장하게 되고, 신령한 은혜가 부어집니다. 우리 모두 복음을 전함으로 영광스러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가라 가라 세상을 향해. 가라가라 말씀 가지고. 가라가라 온 땅을 향해. 가라가라는 예수님의 명령. 우리 모두 가겠어요 온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복음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