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사도행전 1:12-26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더라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예수님께서는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이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행 1: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머물 기간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정함이 없는 기다림입니다. 그들은 정함이 없이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행동하기에 앞서 순종하되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내려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인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는 예루살렘 성전 뜰 밖을 한 바퀴 도는 거리(약 2,000큐빗; 900m)를 말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 숫자가 무려 12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무려 10일간이나 머물며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10일간 모여서 토론하거나, 우리 앞으로 잘 해보자며 단합대회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잘 전할 비결이 무엇인지 세미나를 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도 작전을 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10일간 마가 다락방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다 문제를 해결하고 깨진 사도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합심하여 기도하는 제자들의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제자들
가룟 유다를 뺀 11명의 사도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의 특징은 네 가지입니다.
합심 기도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하).
그들은 마가 다락방에 모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막연하게 기다리지 않고 120명이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120명이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둘만 모여도 각기 생각과 방향과 뜻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셋만 모이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기도이고, 기도 중에서도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자서 기도하는 것도 귀하게 여기지만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을 더욱더 귀하게 여기시고 그 기도를 속히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미국의 캐서린 쿨만은 합심 기도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이 다르고, 두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것이 다르다. 이것은 마치 장작불을 피우는 것과 같다. 장작불을 피울 때에 나뭇가지를 하나 피울 때와 둘 피울 때가 다르지 않은가? 장작을 많이 갖다놓고 불을 피우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여러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에 더 큰 능력이 있다.”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고 열 명, 백 명이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합심하여 기도할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부부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 교회가 한 목적(one purpose)을 가지고, 한 가지 기도제목(one prayer topic)을 놓고, 한마음(one mind), 한뜻(one spirit)으로 합심하여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독일 보헤미아의 진젠도르프 공작이 만든 모라비안 형제단이 처음 생겼을 때에 그들은 두 명씩 24조를 만들어서 아침 일찍부터 하루에 1시간씩 기도하여 24시간 내내 합심 기도가 연결되게 했습니다. 마치 군대에서 24시간 돌아가며 보초를 서는 것과 같이 그들은 24시간 내내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백 년 동안 계속했습니다. 이 기간에 모라비안 형제단은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하나님은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에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기도
그들은 자신의 개인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소원을 붙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방언을 받기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신유 은사나 예언의 은사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오직 약속하신 것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어떤 일에든지 순종하겠으니 성령의 능력을 주시옵소서. 성령의 능력을 주셔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그들은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고자 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집중적인 기도
그들은 옆에 누가 있는지, 추운지 더운지, 배고픈지, 시간이 가는지 모르고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인위적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집중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장을 보면 전심으로 기도하는 한나가 나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입은 열심히 움직였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집중해서 기도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술에 취해 중얼거리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나에게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며 포도주를 끊으라고 했습니다(삼상 1:14). 그때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삼상 1:15-16상).
엘리는 이런 한나의 마음에 감동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삼상 1:17). 하나님은 한나의 집중적인 기도에 응답하셔서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시는 기도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느냐, 기도의 산수(算數)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얼마나 기도가 웅변적이냐, 기도의 수사에도 있지 않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긴가의 길이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기도의 음악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논증적인가, 기도의 논리에 있지 않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순서와 규모에 맞느냐, 기도의 방법에 있지 않습니다. 기도가 교의에 얼마나 옳은가, 기도의 신학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귀하게 여기시고 이런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끙끙거리며, 문맥이 맞지 않는 기도라 할지라도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곳의 공통점은 모두 합심 기도에 있었습니다. 주 후 1905년에 영국의 웨일스에서 일어난 강력한 성령의 역사나, 1907년에 평양에서의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죄를 토설하며 합심 기도했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974년에 여의도에서의 강력한 성령의 역사도 100만 성도가 여름의 뜨거운 뙤약볕과 아스팔트의 복사열이 작열하는 여의도 광장에 모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합심하여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울부짖으며 기도했을 때 일어났습니다. 이후 한국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여 1,000만 성도로 부흥했습니다.
저는 개척 초기였던 1989년 초, 샤미나드 피정의 집에서 가졌던 신년 수양회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30여 명의 형제자매가 모여 밤새도록 인하대 복음화와 세계복음화를 위해 피정의 집 문지방이 흔들릴 정도로 통곡하며 눈물로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합심하여 기도했는지 수녀들이 쫓아 올라와 기도를 작게 하라며 야단치기까지 했습니다.
그 해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한국 교회 역사상 최초로 1989년 8월 29일에 동유럽인 헝가리에 첫 평신도 선교사(김흥식, 황 미, 김천석, 조봉순)들이 파송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수교도 이루어지지 않은 동토의 땅 러시아에 헝가리를 통하여 황돈연 선교사가 1948년 이후 최초로 모스크바대학에 유학생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는 4일간의 러시아 비자를 받아 헝가리 부다페스트역에서 36시간의 열차를 타고 1990년 9월에 13일 낮 12시 모스크바 기차역에 도착하여 비자 만료 시점에 모스크바 대학으로부터 유학생 비자를 발급받는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또한 헝가리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선교사 가정(김천석 조봉순)이 1990년 10월 15일에 루마니아의 첫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에 일어납니다.
가룟 유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도들
그들에게는 큰 걸림돌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어떻게 예수님이 가장 참혹한 형벌인 십자가에 돌아가실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걸림돌은 “가룟 유다가 어떻게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는가? 우리 사이에 저런 배신자가 나올 수 있는가?”였습니다.
“배신자는 원수보다 밉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많지도 않은 12명, 3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동역자가 스승을 배반하여 참혹한 십자가에 죽게 하다니! 그것도 우발적으로 배반한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계획을 짜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승을 배반하다니? 그런 마음을 품고 뻔뻔스럽게 마지막 만찬에 참석하여 주님과 함께 식사를 하다니!”
그들은 가룟 유다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가룟 유다의 문제는 공동체의 암적 존재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이 문제를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일어나 입을 열었습니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행 1:16).
베드로는 가룟 유다의 문제를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본래부터 예언된 것이 성취되었음을 선언했습니다. 성경은 일찍이 가룟 유다의 배반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유다의 배반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천지는 폐할지언정 성경은 폐하지 못합니다(마 5:18). 베드로는 계속하여 유다의 문제를 시편 69편 말씀으로 풀어나갔습니다. 시편 69편은 예수님께서도 다섯 번에 걸쳐 인용하셨습니다. 시편은 까닭 없이 고난 받는 한 사람의 원수들이 아무 이유 없이 어떻게 그를 미워하고 모욕하는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시 69:4).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악한 무리에게 미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의 분노를 그들의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시 69:24-25).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받은 은 30냥을 성소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마 27:5). 유다는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습니다(행 1:25). 배반자, 은혜를 악으로 갚은 유다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그는 지옥의 심판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다 문제를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도록 팔아넘겼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말미암아 만백성이 구원을 얻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공로자가 아닌가?”
그러나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할 수 없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예수님을 만백성을 구원할 구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악한 의도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3체’(3sifter) 문답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체는 ‘진실의 체’입니다. 두 번째 체는 ‘선의 체’로, 의도가 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체는 ‘중요성의 체’입니다. 가룟 유다는 진실하지도 못했고 의도도 선하지 못했습니다. 가륫 유다는 구원 역사의 공로자가 아니라 그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아 비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베드로는 유다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정치적으로 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유다 문제를 성경에서 찾아 해결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성경의 안경을 쓰고 해석하고 논증할 수 있는 식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슨 일을 결정할 때에 즉흥적이고 부화뇌동하지 말고 성경에서 모든 문제를 찾아 해결하고 결정하는 성숙함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경 몇 장 몇 절에 의하여 그것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만일 성경에서 답을 찾지 못했으면 답을 찾을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
깨진 사도 공동체를 회복한 사도들
베드로는 유다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는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깨어진 열두 사도 공동체의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열두 사도는 열두 보좌와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사도의 자격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행 1:21-22).
사도의 자격 조건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그 이후 삼년 반 동안 동행하면서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경험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등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람들 앞에 열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사도의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언입니다.
예수님의 지명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과 동행하고 부활을 목격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명하여 뽑으셔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직접 열두 사도를 부르시어 세우셨습니다(막 3:13-16). 사도는 시험을 봐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사도는 주님께서 지명하여 세우셔야 합니다.
제자들은 유스도와 맛디아, 두 명을 놓고 하나님께서 뽑아 세워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겼습니다. 그때 맛디아가 뽑혔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열두 사도 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서 열흘간 합심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유다 문제를 성경 말씀으로 해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깨진 사도 공동체를 새롭게 세웠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우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집중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의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