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사도행전 2:1-13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행 2:2-3).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크게 여섯입니다. 첫째는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까지 낮아지신 겸손입니다. 둘째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아픔과 고독,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평과 이웃과의 화해입니다. 셋째는 부활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의 역사가 아니라 부활의 역사, 생명의 역사입니다. 넷째는 승천입니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 되심의 선포입니다. 다섯째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입니다. 교회의 탄생과 복음의 증인 된 삶, 그리고 선교와 부흥입니다. 여섯째는 재림입니다. 승리와 영광스러운 환희입니다. 이 여섯 중에 하나만 없어도 구원 역사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입니다. 오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연결시켜서 생각해야 합니다. 오순절이 없는 부활절, 부활절이 없는 오순절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 없는 부활절은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로 남게 되고, 오순절이 없는 부활절은 우리에게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하나의 지식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통해 성령의 특징과 성령 사역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르매
예수님의 500여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고전 15:6).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함께 식사도 하고, 함께 걷기도 하고, 함께 대화도 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무려 40일 동안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신기하게 여길 뿐, 그들의 마음에 부활의 기쁨과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가슴이 싸늘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증언의 역사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지식과 체험은 신앙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성령 강림 이후의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객관적이고 지식적인 신앙이 체험적인 신앙으로 바뀌어져 생명과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했습니다. 부활을 목격하고도 두려워 골방에 숨어있던 그들이 오순절 성령을 체험한 후, 그들은 복음의 대적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비롯한 성경의 진리, 복음 속에 담겨진 모든 계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행 2:1).
그들은 오순절이 이르매 한 장소에 모여 같은 꿈을 꾸며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행 1:14). 오순절은 유월절, 장막절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 누룩 없는 떡을 떼며 지키는 절기이고, 장막절은 집에서 나와 일주일간 광야에 텐트를 치고 쓴 나물을 먹으며 조상들의 광야 40년간의 고난에 동참하는 절기입니다.
반면에 오순절은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이 날은 맥추절과 겹쳐 있기 때문에 맥추절, 혹은 칠칠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이 날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날에 곡식을 주시고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은 금식하고 고행하는 절기가 아니라 즐겁고 기쁜 절기입니다. 바로 이 날에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성령의 역사는 감사와 기쁨과 찬양의 사역입니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쓸쓸한 가을 남자가 되고 겨울 바다를 찾는 겨울 여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봄 처녀가 되어 찬양과 기쁨과 넘쳐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깃발은 기쁨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그들이 모여 합심하여 기도했을 때 오순절에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때 세 가지 초자연적인 표적들이 일어났습니다. 바람과 불, 그리고 방언이었습니다.
성령의 바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행 2:2).
누가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바람을 예로 들어 청각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바람으로 묘사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바람은 헬라어로 ‘푸뉴마’(πνευμα)입니다. 이는 ‘영’이란 뜻과 동일합니다. 바람은 회오리바람도 있고 산들바람도 있고 미풍도 있습니다. 그리고 유혹의 바람도 있고, 신바람과 치맛바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류 열풍, 이 또한 바람의 일종입니다.
그 누구도, 어떤 첨단 과학도 바람의 방향과 진로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위력과 소리 또한 대단합니다. 미국의 내륙을 강타하는 토네이도(tornado)는 100년이 넘은 나무들과 집들을 쓸어버립니다. 한편 언덕에서 부는 산들바람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줍니다. 이처럼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지나간 곳에는 흔적이 있습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바람은 옆에서 불어오는 동풍이나 서풍이 아니었습니다. 이 바람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이 바람은 급한 바람이었습니다. 급하고 강하게 내려온 바람이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각각 인격적으로, 동시에 드라마틱하게 임했습니다.
저자인 누가가 성령을 바람으로 묘사한 것은 성령이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지나간 곳에는 바람과 같이 반드시 변화의 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죄인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킵니다. 성령은 삶의 가치관과 소망을 변화시킵니다. 성령은 이기적인 사람을 희생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성령은 어둡고 부정적이었던 사람을 밝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성령은 연약하던 사람을 강한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성령은 교만하던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성령은 원망과 불평의 사람을 감사와 찬미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성령은 땅에 소망을 두고 살던 사람을 비전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성령은 민족주의에 갇혀 있는 사람의 마음을 넓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삼으십니다.
성령의 불
또 누가는 오순절 성령을 불의 예를 들어 시각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성령은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나타나 각 사람의 머리에 머물렀습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행 2:3).
성령은 잠시 있다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 임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한번 임하면 영원히 내주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회적이며 영원한 것처럼, 오순절의 성령 강림 또한 단회적이며 영원합니다. 한번 성령이 내주하시면 영원한 것이지 오셨다 가셨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라는 말씀을 들어 성령의 불이 꺼졌다가 다시 타다가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령의 활동을 제한하지 말라, 성령의 역사에 역행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불의 특성은 태워서 정결하게 합니다. 이사야서 6장에서 이사야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자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입으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입으로 사람을 비방하고, 정죄하고, 불신을 심고, 세상과 사람들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세상을 심판했습니다. 그는 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사야가 자신의 죄를 회개했을 때에 스랍 하나가 단에서 핀 숯을 가지고 와서 입에 대며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했습니다(사 6:5-7). 이처럼 성령의 불은 우리의 악과 죄를 정결하게 합니다.
또한 불의 특성은 뜨겁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렘 20:9)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인간적인 수치와 조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전파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이상하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불이 타올라서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뜨거운 마음을 주신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뜨거운 마음을 주셔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3-4).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우리에게 생명이 넘치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불길 같은 주 성령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영광 보여 주소서 성령이여 임하사 우리 영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소서 기다리는 우리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새찬송가 184장).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언어는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은 기도 방언이지만 오순절의 언어는 서로 간의 소통의 언어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의 언어는 각기 자기 나라 언어로 똑똑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였다면 사도행전 2장의 언어는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언어였습니다.
인류는 바벨탑 사건 이후 각자 언어가 달라져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장벽이 생깁니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갈등하는 것은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별거하고 이혼하는 것입니다. 민족과 민족이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전쟁의 비극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동족끼리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 소통이 안 되면 간극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이제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서로 말이 통하게 되었습니다. 메대인, 엘람인,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 등 각 나라 사람들이 모였는데, 전부 자기 말로 들렸습니다. 로마 사람들에게는 로마 말로, 헬라 사람들에게는 헬라말로 들려 서로 소통이 되었습니다.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단순한 의사 전달만이 아닙니다. 대화가 되면 소통이 됩니다. 소통이 되면 이해가 됩니다. 이해가 되면 적대감이 해소됩니다. 적대감이 해소되면 평화가 이루어지고, 평화가 이루어지면 아름다운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미국을 지배하는 힘은 3C(Communication, Community, Common sense)에 있습니다. 대화를 통해 상식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말하고 듣고 이해하는 기적, 이것이 대화의 기적,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과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하고 깨닫도록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놀라 기이히 여겼습니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행 2:7하-8).
그들은 귀가 열렸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신령해서 들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여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서 통역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언어를 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큰일의 말함을 듣도록 함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11하).
‘하나님의 큰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처럼 언어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성령 충만이 구원의 절대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도 사역을 위한 특별한 능력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은 방언이나 신유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을 방언과 신유로 제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성령 충만했을 때 이후부터 그들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이기심과 욕망, 그리고 야심을 가지고 다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불신과 교만과 편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되풀이될 수 없는 단 한 번의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그 효력이 영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순절의 기적 또한 역사적으로 되풀이될 수 없는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순절의 역사는 지금도 성령 안에서 말씀을 믿어지게 하고 말씀을 이해되게 하고 말씀을 받아들여지게 합니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들려지고 믿어지게 하여 소통하게 합니다. 또한 성령 충만은 믿는 이들을 증인의 삶으로 나타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