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사도행전 2:37-41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베드로는 일생토록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을 너희가 못 박아 죽였다고 했습니다(행 2:23).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가 못 박아 죽인 바로 그 예수님을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했습니다(행 2:36). 베드로는 두 번이나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너희가 예수님을 못 박았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은 당시 여우같은 늙은 제사장인 가야바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못을 박은 사람은 로마 군병들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 준 사람은 가룟 유다였습니다. 더 나아가 좀 더 넓게는 예수님이 재판 받을 때에,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에, 그 밑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흉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순례자들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무리들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베드로에게 세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덤덤한 반응입니다. 저가 말하는 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반발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본문 말씀처럼 마음에 찔려 “어찌 할꼬?” 묻는 것입니다(행 2:37). 우리 모두가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죄 사함 받아서 성령의 선물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회개하라
그들은 베드로의 메시지를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행 2:37).
그들은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나와 무관하게 느껴졌던 십자가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동안 무관하게 느껴졌던 십자가를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들였을 때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는 마치 가려졌던 것들이 밝은 빛 앞에 노출되는 것과 같았습니다.
자매들은 화장을 합니다. 화장이란 자신의 모습을 좀 더 예쁘게 하기 위해, 혹은 좀 더 젊게 보이기 위해 치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름살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무리 파운데이션을 발라도, 어두운 저녁에는 주름살이 안 보이지만 밝은 대낮에는 주름살이 드러납니다. 이처럼 우리가 스스로 거룩한 척, 스스로 의인인 척, 스스로 깨끗한 척, 스스로 경건한 척 위장을 하고 가면을 쓰고 다닐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춰보면 다 드러나게 됩니다. 이 때 마음이 찔리게 됩니다. ‘찔린다’는 것은 몸의 통증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몸의 통증을 느끼면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고 건강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 있는 데 그 병은 간경화입니다. 그런데 간경화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심경화’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고도 심경화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찌릅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나의 거짓과 불신, 탐심이 얼마나 가득한 사람인가! 고상한 척 하지만 얼마나 더럽고 추한가!” 사람들 앞에서 좋은 소리 듣는 것으로 만족하던 사람이 말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죄로 인해 애통하게 됩니다. 뻣뻣하게 굳은 목이 숙여집니다. 불신과 거짓과 탐욕으로 남을 찌르던 사람이 이제 스스로 찔려서 회개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은 마음이 찔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어찌 할꼬”물었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듣는 자들의 바른 반응입니다. 찔림이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희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베드로는 회개하도록 촉구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행 2:38상).
회개란 생각을 다르게 하고 생각을 고친다는 뜻입니다. 회개란 단순히 어떤 사건에 대해 후회하거나 슬퍼하는 등 감정의 표현이 아닙니다. 회개란 잘못된 것에서 돌아서는 것, 방향을 바꾸는 것, 결정된 마음과 뜻을 돌이키는(U-turn)것,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180도 전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회개는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해 살던 데서 방향을 바꿔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애통이 뒤따르지만 슬픔 자체가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에는 사고와 행동의 일대 전환이 따라야 합니다. 정욕의 노예가 되어 밤거리를 헤매던 사람이 회개했으면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기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이 회개했으면 실제적으로 나눠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당을 짓고 진리를 좇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거짓과 술수로 정죄를 일삼던 사람이 회개했으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회개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구원은 이러한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회개에는 신분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회심이 있고, 수준의 변화, 즉 성화를 위한 회개가 있습니다. 회심은 일생에 단 한 번으로 이루어집니다. 단번에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단번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그 신분이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인쳤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심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성화, 곧 수준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위해 회개해야 합니다. 매순간 회개를 통해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윤리 의식과 예수님의 품성을 닮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성화에 힘쓰라는 것입니다(빌 2:12).
지금 한국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는 신분의 변화 이후에 수준의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신분의 변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수준의 변화, 성화에서 옵니다. 우리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회심이나 회개는 나의 의지로 안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해야 합니다.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5하).
우리는 살면서 여러 역경과 고통을 겪습니다. 이때 우리는 낙심하고 낙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고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안에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요,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으라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행 2:38중).
죄를 회개했으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는 예수를 믿는다는 공적인 고백입니다. 이는 결혼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결혼식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결혼식은 공적으로 부부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공적인 선포입니다. 다시 말해 세례는 이미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 새로운 공동체, 예수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불교나 유교의 제자에서 예수님 제자가 되었으며,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교도가 유대교로 전환할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세례(baptize)는 물에 잠긴다는 뜻으로 연합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나의 죄에 대한 죽으심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완전히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요,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은 곧 내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주님과 함께 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으라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 인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예배당은 세상 복을 구하는 성황당이나 산신각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죄 사함을 받고, 죄 사함의 기쁨을 누리고자 함입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보혈을 흘리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게 하고자 함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심판과 영원한 형벌에 처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리게 하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덧입을 때 죄 사함 받고 복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다윗은 죄 사함을 받은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예수님의 피는 세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죄의 사슬을 끊게 하는 힘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애굽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출 12:13). 왜냐하면 바로의 권세가 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는 아홉 번의 재앙을 만나고도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장자의 재앙을 통해서 바로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자들을 치셨습니다. 죽음의 재앙이 모든 장자를 칠 때 어린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에 바른 집만이 죽음의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부나 권세나 사회적인 지위나 학력이나 미모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만이 죽음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피 흘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진노와 죽음의 재앙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합니다(골 1:13). 예수님의 피는 능력이 있습니다.
언약의 인(印)침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후 그들 마음속에 박혀 있는 노예근성과 거지근성을 빼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 위해 율법을 주시고 이를 준행하도록 하셨습니다(출 24:6-8).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때 모세는 언약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피로 인을 쳤습니다. 이 언약은 돌에 새긴 언약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파기되었습니다.
이 언약이 파기되자 하나님은 새 언약을 마련하셨습니다. 구약은 행위로 말미암은 행위 언약이기 때문에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지켜질 수 없었습니다. 또 구약은 짐승의 피로 인친 것이기 때문에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언약이요, 돌에 새기지 아니하고 마음에 새겨진 언약입니다(렘 31:31-34).
사람과 맺은 언약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손가락을 걸고 맹세를 한 언약도 하루 만에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요즈음 남녀 간의 사랑, 특히 정치인들의 약속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은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하나 밖에 없는 아무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도장을 찍으셨기 때문에 확실한 구원의 보증이 됩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속제의 능력이 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 피는 죄를 속하는 능력이 있습니다(레 17:11).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짐승의 피를 흘려 죄를 속죄해야 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짐승의 피는 일시적으로 장차 올 구속 역사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보내셔서 인류의 죄를 속하는 희생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요 1:29).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상).
예수님은 화목제물이 되셔서 속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단번(once and for all)에 자기 피로 온전하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 9:11-15).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속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언제, 어디서든지 진실하게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됩니다.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하).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는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세상의 원리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자기 능력과 자기 지략으로 살았습니다. 이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계속하여 여러 말로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했습니다(행 2:40). 여기에서 ‘구원’은 종말론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구원을 말합니다. 이로 인해 무려 3,000명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무리들에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면 예수님은 죄를 사해주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면 성령의 지배를 받아 성령의 기쁨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거룩한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