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사도행전 3:1-10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밀레의‘만종’이라는 그림을 보면 부부가 일을 하다가 잠시 일손을 멈추고 머리 숙여 기도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부부를 통해 경건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만종에서 단순히 경건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뒤쪽을 보면 멀리 종탑이 보입니다. 부부는 해질 무렵 멀리 교회당에서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녘에 울려 퍼지자 잠시 일손을 멈추고 머리 숙여 기도합니다. 기도 시간에 일손을 멈추고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본문은 “제 구 시 기도 시간에”(행 3:1상)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유대의 시간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기준으로 합니다. 해가 뜰 무렵이 1시, 해가 질 무렵이 12시입니다. 제 9시는 우리나라 시간으로 오후 3시입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루에 세 번 성전에 가서 기도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루에 한번은 성전에서, 두 번은 성전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그들의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었습니다.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던 중에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여 구걸하는 이를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걷게 한 사건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기도하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그들의 말씀의 권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베드로와 요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는 모습은 아름답고 경이롭기만 합니다. 4복음서를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기보다 누가 큰가 하는 경쟁에 몰두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지 않은 대표적인 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던 순간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 14:34)고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코를 골며 잠을 잤습니다. 그러던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쟁 관계에서 사랑과 동역의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기도의 종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동역과 기도로부터 출발합니다. 선교의 추진력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교회에서 봉사하다가 좌절하여 멈춰버리고, 전도하다가 중단하고, 무슨 일을 하다가 그만 두는 이유는 기도가 멈췄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순간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함과 주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의욕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고, 비전이 생깁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우리의 우선순위에서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다니엘은 이방 땅에서 국무대신으로서의 바쁜 삶속에서도, 정적들이 기도를 문제 삼아 제거하려고 하는 순간에도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단 6:10).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지만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 55:17).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그들이 성전에 올라갈 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아침에 그를 메고 와서 성전 미문에 두었다가 저녁때에 메어 가곤 했습니다. 미문은 성전 동쪽의 이방인 뜰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죄인들과 이방인들이 그곳을 드나들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출발했기 때문에 미문(beautiful gate)이라고 했습니다. 미문과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이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그의 나이 40세 쯤이었습니다(행 4:22).
그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사람,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 저주받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과 부모님을 원망하며 불공평한 세상을 저주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운명의 노예가 되어 자학하며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여 오히려 구걸하는 생활도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시야는 자기 자신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기 세계에 갇혀 있었습니다. 미문을 드나들면서 하나님을 만나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돈 몇 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적선을 해주면 고마워하고, 안 주면 또 다른 사람을 향해 “한 푼 줍쇼” 하고 구걸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몇 푼 던져주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동전 몇 푼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구걸했기 때문에 구걸하는 것이 체질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면서 걷지 못한다고 해서 남을 의존하며 구걸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인간은 어떤 역경 중에도 자립하며, 오히려 다른 사람을 도와주며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사람이 매사에 남을 의존하며 사랑과 인정을 구걸하면 거지근성이 몸에 배어서 받아도 만족과 감사가 없으며 늘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에는 불행한 조건이지만 믿음으로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승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닉 부이치치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장남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브리즈번에서 태어났습니다. 출생 당시 그는 사지가 없는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양팔과 다리가 없었고, 두 개의 작은 발이 달려있었는데 한쪽발만 두 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함으로 인해 자살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21살의 나이에 복수전공(회계학, 재무설계학)으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발로 피아노도 치고 수영도 합니다. 지금은 여러 나라에 다니며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동기와 희망을 주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역경 중에도 믿음으로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성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자라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 또한 영적으로 거듭났으면 신앙이 자라야 됩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이 자라지 않는 이들을 향해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하)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합니다(엡 4:13).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베드로의 목자의 심정
미문에서 구걸하던 그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마 베드로나 요한은 그를 처음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도 전에 돈이 있으면 적선을 하고 없으면 ‘어쩌다 저런 삶을 살지?’ 하며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들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더불어 그를 주목했습니다(행 3:4상). 주목했다는 것은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고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베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마음과 마음이 마주칠 때에 베드로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행 3:4하).
베드로는 그를 주목하고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이는 과거의 베드로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기 위해 가실 때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맹인인 거지를 밀어 제쳤습니다. 그러던 그가 기도하러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걷지 못하는 자를 주목하며 “우리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 주님의 마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고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주님은 불쌍한 사람을 한 번도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군중 속에서도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지나치지 않고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돌봄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돌보셨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득 찼을 때 걷지 못하는 이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눈과 마음으로 그를 보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목자의 심정입니다. 목자의 심정은 사랑입니다. 사람을 돕는 첫 단계는 목자의 심정, 사랑입니다.
베드로의 온전한 믿음
미문에서 구걸하던 그는 그 순간에 그들로부터 무엇을 얻을까 해서 큰 기대감으로 바라보았습니다(행 3:5). 그런데 베드로는 그가 기대했던 말과 전혀 다른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행 3:6상).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는 크게 실망한 모습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돕고 싶은데 도울 돈이 없을 때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돈이 없다고 체념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과거에 부정적인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의 모습에서 부정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며, 지금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그 때 그는 소중한 것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새로운 삶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를 향해 외쳤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행 3:6-7).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런 베드로의 용기와 믿음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이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 100% 붙들린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감히 손을 잡고 일으킬 수 없습니다. 일어나면 다행이지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라고 외쳤습니다. 이 믿음과 용기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님 권세가 곧 내 권세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의심하지 않고 100% 믿는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100%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자 할 때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말씀의 원문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일어나 걸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만 생각하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목적으로 걸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과거에 자기 자신의 능력과 경험을 의지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예수님만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 걷지 못하던 자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행 3:8).
그는 말씀에 절대 순종했습니다. 베드로가 일으켜 세우자 순간 벌떡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믿음의 역사, 기적의 역사,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믿음은 재창조의 역사가 있습니다. 재창조의 역사는 믿음의 순종에서 일어납니다. 믿음의 순종은 고정관념을 깨고 상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40년간 한 번도 일어나지 못했다는 선입견과 굳어진 경험 논리와 의존심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운명과 고정관념과 의존심을 깼습니다. 그는 할 수 없다는 패배감을 버렸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은 일어나 걸을 수 없다는 상식을 깼습니다. 이때 “일어나 걸으라”는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과거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걸으라”는 말씀에 순종할 때 ‘걸을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던 그가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베드로의 소중한 재산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재산이 무엇입니까? 가장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건강? 물질? 명예? 목숨? 우리는 건강도 소중하고 명예도 소중하고 목숨도 소중하고 물질도 소중합니다. 부모도 소중합니다. 자녀도 소중합니다. 세상에 부모님보다 더 소중한 분이 어디 있고, 세상에 자식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와 자식은 물질과 결코 바꿀 수 없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자녀가 아무리 소중해도 우리가 죽음의 강을 건널 때 함께 건널 수 없습니다.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걸어가고 해를 만날 때 함께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순간에도 나와 동행하시고 나와 함께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의 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절대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러할 때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주님의 권세가 내 권세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권세는 내 권세가 됩니다. 우리도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 권세가 내 권세가 되도록 주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권세 예수님 권세 예수님 권세 내 권세 예수님 권세 예수님 권세 예수님 권세 내 권세 할렐루야 할렐루야 예수님 권세 내 권세 할렐루야 할렐루야 예수님 권세 내 권세”(복음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