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도행전 4:1-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초대교회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통해 날마다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적을 체험하면서 초대교회의 가슴 속에는 승리와 기쁨과 감격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믿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날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경험한 큰 복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부터는 이런 놀라운 감격과 기쁨과 환희 속에 고난과 환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공회에 선 사도들
사도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부활 메시지로 인해 부활의 복음이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만 가두면 될 줄로 알았습니다. 사도들을 감옥에 가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서기관은 헤롯당과 더불어 유대 사회를 지배하는 지배 계층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인정하는 사람들로서, 로마 세력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로마의 권력과 결탁하는 현실주의자들로서, 당시 교권을 잡은 세력이었으며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신학 사상과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만 나오면 하나가 되어 사도들을 옥에 가두고 교회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옥에 갇힘으로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때의 신자 수가 자그마치 오천 명이었습니다(행 4:4).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가 25,000-85,000명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인구 대비 6-20%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천 명은 당시 바리새인의 육천 명과 맞먹은 숫자였습니다. 이처럼 강력한 복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튿날에는 공회가 열렸습니다(행 4:5-6). 공회는 70명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데 앞장섰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도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심문하던 방식대로 사도들을 중앙에 세우고 물었습니다.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7).
그들은 걷지 못하는 이를 일으켜 세운 것에 대해 무슨 권세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행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도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고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고 따진 적이 있었습니다(마 21:23). 그들은 걷지 못하는 이를 일으켜 세운 사건을 정치적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때도 신앙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각색하고 변질시켰습니다. 고난에 직면한 사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000명의 신자들을 동원하여 대적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작전상 후퇴라는 말이 있듯이 작전상 잠시 동안 복음을 전하는 것을 중단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다가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복음을 전하다가 상대방으로부터 좋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될 때, 복음을 전하다가 조롱을 받을 때 한 걸음 물러서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닐 수 있고, 때가 아닌 것 같다며 중단하지는 않습니까? 회의적인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까? 제가 개척 초기에 인하대 도서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수위에게 쫓겨나고,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할 때 순간적으로 회의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곤 했습니다. 그러나 환난과 핍박을 받을 때 사도들의 자세는 어떠했습니까?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행 4:8).
베드로는 그 시각에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성령의 일반적인 역할은 중생과 성화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여 중생하게 합니다. 성령은 거룩한 삶을 살게 합니다. 더 나아가 성령은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런데 대개 성령 충만이라고 하면 방언을 연상합니다. 그리고 병 고치는 은사와 예언의 은사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엑스터시(ecstasy)를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몽롱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정신이 또렷합니다. 성령 충만은 사명 충만, 전도 충만, 지혜 충만입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했을 때 정신이 맑았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2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공회에 끌려가 핍박을 받을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대제사장 앞에서 성령 충만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금 말하는 것은 사도들 자신들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을 성령의 도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성령 충만하게 되면 담대해집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떤 굴욕도 참을 수 있습니다. 어떤 핍박도 이길 수 있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핍박과 환난 중에도 불사조와 같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오뚝이같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순교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원수들 앞에서 담대하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 4:10).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두려워서 도망갈 정도로 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복음의 원수 앞에서 담대하게 너희가 죽인 예수가 살아났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사도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이야기, 부활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승리를 노래하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이는 그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 마음의 첫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이는 마음이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으면 그 가득 찬 것을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욕으로 가득 차 있으면 돈 이야기를 합니다. 마음이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찬 사람은 남의 흉을 보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반면에 마음속에 기쁨과 소망이 가득 차게 되면 기쁨을 노래하고 소망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절로 튀어나오게 됩니다. 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이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밝은 자화상으로 조각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소망과 기쁨과 감사로 넘쳐흘러야 합니다. 그래서 입을 열면 자연스럽게 은혜와 사랑과 소망과 기쁨과 감사와 축복의 말이 나와야 합니다.
더 나아가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구원자이심을 선포했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 4:11).
이 말씀은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비유로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막 12:10). 사도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했습니다.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으시고 무관심과 냉대 가운데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셨고, 제자들로부터 배반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동족들과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버림받아 영문 밖에서 흉악범들이나 매달리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으로서는 참기 힘든 수모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셨으나 마치 건축자들이 집을 짓다가 필요 없다고 내어버린 돌처럼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cornerstone)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머릿돌입니다. 머릿돌을 기초로 돌을 한장 한장 쌓아갔습니다. 그러므로 모퉁이 머릿돌이 잘못 놓이면 집 전체가 뒤틀리고, 머릿돌의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집이 붕괴됩니다. 모퉁이 머릿돌은 기준석입니다. 그리고 머릿돌에 건축자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버린 예수님을 방향과 기초가 되는 기초석이 되게 하셨습니다(고전 3:11). 하나님은 예수님을 생명수의 반석이 되게 하셨습니다(고전 10:4). 하나님은 예수님을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딪치는 돌, 심판의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단 2:34; 벧전 2: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8).
천하 사람 중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요즘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사회 곳곳에 파고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단어가 ‘절대’입니다.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사상이 교회에 침투하여 복음을 상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점점 힘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상대적인 것에는 힘이 없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생각, 저것보다는 복음이 좀 낫다는 상대적인 생각, 이 종교도 좋고 저 종교도 좋다는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도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정한 구원은 복음의 절대성과 유일성에 있습니다. 복음만이 진리요, 생명이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 2:5-6).
사람들은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절대적인 구원의 길이라고 하면 그런 독선이 어디에 있느냐고 반발합니다. 사람들은 “철학과 종교가 동일한 목표와 목적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왜 당신이 믿는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느냐?”며 반발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절대성과 유일성은 독선이 아니라 은총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여객선이 파선되었다고 합시다. 선장이 외칩니다. “구명복을 입고 구조선을 기다려라! 이것만이 살 길이다!” 선장의 말이 독선입니까? 그들이 사는 길은 선장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죄로 죽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마귀가 공격합니다. 정욕과 쾌락과 불신과 미움의 세력이 공격합니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이 독선입니까? 그 구원의 길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그것이 독선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복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의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악의 길입니다. 악의 길은 굽은 길이요(잠 1:15-16, 10:9), 허무한 길이요(욥 6:18), 어둠의 길이요, 죄의 길이요(욥 24:13; 호 2:6), 황폐하게 하는 길, 사망의 길, 빈손의 길입니다(사 59:7; 잠 14:12). 그러나 의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마 7:13-14). 의의 길은 진리의 길이요, 거룩한 길이요(사 35:8), 평탄한 길이요(시 23:3, 25:10, 27:11), 부요한 길이요, 정직한 길이요(시 65:11; 잠 2:13), 생명의 길이요, 평강의 길이요(잠 2:19, 3:17), 새로운 살 길이요(히 10:20), 부요한 길, 천국 보화를 한 아름 안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힘써 가야 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제자들은 핍박하는 그들을 향해 구원의 메시지를 외쳤습니다. “그대들이여 나를 핍박하시오. 나는 더욱더 소리를 높일 것입니다. 그대들이여 나를 이 감옥 속에서 짓밟으십시오. 내 목소리는 더욱더 커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빛이요, 길이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마음이 복음으로 가득 차서 어떤 고난 중에도 예수님의 이야기, 부활의 승리를 말할 수 있는 복음의 사자들이 되어야 합니다.